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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아테네 vs 멜로스의 비극, 무력과 정의의 기준

Buddhastudy 2023. 9. 13. 19:50

 

 

기원전 5세기 경. 페르시아의 침입으로부터

그리스 세계를 막아낸 폴리스들은

평화에 만족하지 않고 힘이 큰 세력을 중심으로

저마다 그리스의 주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중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 전체를 손에 넣고자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델로스 동맹을 창안했고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스파르타는

이에 맞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구축하게 됩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은

처음에는 직접적으로 맞부딪히지는 않았지만

주변 세력의 작은 도시 국가였던

에피담노스의 분쟁으로 시작해

케르키라와 코린토스의 대립으로 확장

결국 기원전 431년부터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본격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는 거의 매년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의

대군까지 끌어모아서 정기적으로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반도로 쳐들어갔으나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리더십 아래

무난하게 이를 잘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430년부터 아테네에서 시작된 역병은

지도자 페리클레스의 목숨을 앗아갔고

아테네에서는 강경파 클레온이 집권을 하게 됩니다.

 

아테네의 강경파 클레온과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는

수년간 그리스 세계를 헤집어놓으며 황폐화해갔고

둘은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모두 사망하게 됩니다.

 

전쟁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모두 죽고 나자

기원전 421년에는 아테네의 온건파

니키아스의 주도로 50년간의 평화협정.

니키아스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감정의 골이 깊었던 두 나라는

실질적으로는 잠시 전쟁을 식히는 분위기 속에서 휴전하는 형식이었으며,

양측은 언제든지 서로를 공격할 수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니키아스 협정이 있기 전 약 25년 전에도

두 나라는 30년 평화 조약을 맺은 적이 있었는데

조약은 조약일 뿐이었죠.

다만, 그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의 평화협정은 무적 스파르타 육군의 우위 속에 맺어진 협정이었다면

이번 니키아스 협정에서는

필로스 전투에서의 아테네 승리로 인해 아테네가 우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적 스파르타 육군의 위세도

필로스 전투의 패배로 인해

더 이상 다른 국가들에게 위화감을 보이진 못하게 되었죠.

 

아테네의 새로운 강경파 지도자로서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동성 연인으로 알려진

알키비아데스가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그는 이 평화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스파르타를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스파르타와 동맹으로 맺어진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와해시키려고 했습니다.

 

니키아스 협정에서는 스파르타만 서명했을 뿐

테베와 코린토스는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에 벌어진 틈을 이용하고자 했던 겁니다.

 

그리고 아테네가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민주정의 영향을 받은

아르고스, 만티네아 등과 힘을 합쳐

스파르타를 압박하려고 했습니다.

 

때마침,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아르고스가

스파르타와 맺었던 평화협정의 시기가 끝이 났는데

아르고스는 스파르타와 지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었지만

외교적으로는 대립하고 있던 국가였습니다.

 

이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동안에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와의 평화협정이 끝나자

아테네가 접근 및 지원을 해주었고

아르고스 주변의 만티네아, 엘리스 등의 다른 폴리스들과 함께

아르고스 동맹을 만들게 됩니다.

 

이로써, 아테네는 직접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아르고스 동맹을 이용하여

스파르타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게 되었던 겁니다.

 

 

 

세력이 커진 아르고스 동맹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부를 차지하였고

이에 스파르타는 반도 북쪽의 다른 동맹국들과 함께 고립됩니다.

이어, 아르고스 동맹은 자신감을 얻어

스파르타 앞에 있는 테게아를 포위했고

아테네에게도 참전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는 민주정을 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모든 의사 결정에서 만장일치하기에는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강경파 알키비아데스는 이때가 기회라고

아르고스를 본격적으로 지원하려고 했지만

아테네 내부에서는 온건파 니키아스도 있었고

그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평화협정을 먼저 깰 수 없다는 의견을 고수했습니다.

이에, 알키비아데스는 어쩔 수 없이

의용병 형태로 고작 1,000명의 숫자로 아르고스 동맹에 참전하게 됩니다.

 

한편,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질서가 무너졌고

그동안 약소국이었던 국가들이 힘을 합쳐 스파르타를 압박해 들어가자

스파르타로서는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모아서 혈전을 벌일 준비를 하게 됩니다.

 

기원전 418. 만티네아 전투의 초기 양상은

스파르타의 아기스 왕의 무리한 공격으로 인해

아르고스 동맹군이 승기를 잡는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진행될수록 경험이 적었던

약소국들 연합체인 아르고스 동맹군과

뼛속까지 전투능력으로 몸에 배여 있던 엘리트 스파르타 군사들의 대결은

일방적인 스파르타군의 우세로 흘러갔습니다.

 

결국, 만티네아 전투는 스파르타의 완승으로 끝이 났고

스파르타의 위용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테네의 의용군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도망쳤고

펠로폰네소스에서 퍼지고 있던

민주정에 대한 움직임은 모두 끝이 나며

반도에서는 여전히 스파르타 정치 체계인 과두정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만티네아 전투가 끝난지 1년이 좀 더 지난

기원전 416. 아테네는 멜로스 섬을 공격하게 됩니다.

멜로스는 스파르타와 같은 도리아인 계열의 도시였는데

이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펠로폰네소스 동맹들의 함대가

자유롭게 기항을 하며 보급을 해주던 곳이었습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장기간의 대립에서

완벽한 우위를 보이지 못했으며

이전에 있었던 만티네아 전투의 추태도 이어져

이를 매우 불명예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오랜 전쟁으로 인해 아테네의 내정도 불안했고

아테네 시민들의 자존감도 이전만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아테네는 다시 예전의 명성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자신들보다 세력이 약한 멜로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멜로스는 섬으로 이루어진 폴리스였는데

아테네는 같은 해양 국가로서

중립의 멜로스를 그대로두지 않고

자신들 밑으로 굴복시켜야 된다고 여겼습니다.

 

이는 아테네가 지배하고 있다고도

과언이 아니었을 델로스 동맹 체제에서

다른 해양 국가들의 눈치를 보는 면도 있었는데

아테네가 멜로스를 간섭 없이 그대로 두었다가는

다른 델로스 동맹국들이

왜 멜로스는 가만 두냐는 이탈의 움직임을 우려하기도 했던 겁니다.

 

 

 

 

멜로스는 그동안 중립을 지켜왔기에

갑작스러운 아테네의 공격에 당황스러웠습니다.

느닷없이 무력을 앞세운 아테네는

너희들은 스파르타와 같은 종족이기 때문에 중립을 믿을 수 없다

항복을 하든 멸망하든 선택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때 이루어진, 아테네와 멜로스 협상단의 대화는

현대 시대까지도 무력과 정의에 대한 글 중

유명한 글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그 내용을 일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아테네의 주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난 시절

페르시아인들을 무찔렀기 때문에

다른 그리스인들을 지켜주겠다는 의무가 있다는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겠다.

당신들도 잘 알겠지만 힘에 의한 문제들이 논의될 때

정의의 기준은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의 질에 달려 있다.

사실상 강자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힘을 사용하는 것이고

약자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에 대한 멜로스인들의 답변입니다.

당신들은 정의를 도외시하고

득실에 관해서만 논의하자고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 보편적인 선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당신들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위기에 처한 사람은 누구나

공정한 처우를 받아야 하며

다소 타당성이 결여된 소명에 대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결국엔 이러한 원칙이 그대들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다.”

 

아테네와 멜로스의 대화를 요약하면

아테네는 누구나 힘을 가지게 될 때는

응당 이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한,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반항하며 전쟁을 치르게 될 때

서로가 피를 흘리는 것보다는

지금 항복하는 편이 양쪽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멜로스는 보편적인 선에 대한 문제,

외교적 명분, 신에 대한 믿음과

이후 스파르타가 우리를 도울 수도 있다고 주장했지만

아테네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결국 멜로스는 스파르타의 도움을 기다리며 아테네에게 항전했지만

스파르타는 도와주러 오지 않았고

아테네는 멜로스를 정복하게 됩니다.

 

멜로스의 남자는 모두 죽게 되었고

여자와 아이는 노예로 팔려나갔으며

도시국가 멜로스는 그리스 세계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은 펠로폰네소스 5번째 영상으로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 동맹을 이용하여

스파르타를 치려고 했으나 실패한 내용과

멜로스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멜로스와의 대화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음 세계사 영상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여섯 번째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