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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그리스 최강 아테네 해군 vs 시라쿠사 스파르타 연합

Buddhastudy 2023. 9. 20. 19:57

 

 

 

기원전 431년부터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의 최강 함대를 보유한 아테네와

그러한 아테네의 번영을 두려워하는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군과의 대결이었습니다.

 

아테네는 얼마 전 페르시아로부터

무적함대를 내세우며 그리스를 지켜냈지만

앞으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아테네가 외세의 침입을 막아준다는 명목하에

다른 폴리스들로부터 상납금을 받기 시작했고

이에 불만이 쌓이던 다른 폴리스들과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에 맞섰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초기 양상은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가

강력한 스파르타 육군을 활용해 자주 아테네로 원정을 떠난 형태로

아테네에서는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농성 전술을 택하여 불필요한 소모를 줄였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에서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수만 명의 사상자와 동시에 페리클레스를 잃게 된 아테네에서는

강경파 클레온이 전쟁을 이끌게 됩니다.

 

역병으로 인해 아테네는 인구의 절반을 잃고

승리의 기운은 스파르타 쪽으로 기우는 듯했으나

아테네의 데모스테네스가 필로스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완벽하게 제압함으로써

전쟁의 분위기는 아테네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갔습니다.

 

그러다, 아테네의 강경파 클레온과

스파르타의 강경파 브라시다스가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모두 전사함으로써

아테네에서는 온건파 니키아스의 주도로 니키아스 협약이 맺어집니다.

 

잠시 평화가 오는 듯했지만

아테네 내부에서는 우리 아테네가 유리한 상황에 놓여있는데

왜 스파르타를 압박하지 않고 있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한편, 이탈리아 남서부의 큰 섬 시칠리아에서는

그리스 폴리스의 식민지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독립 지위를 누리는 도시국가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세력이 큰 도시는 시라쿠사로

시라쿠사의 사람들은 스파르타와 같은 출신의 도리아인 이었습니다.

 

때마침, 세게스타라는 작은 도시 국가가

시칠리아 내부에서 싸움에 밀려 아테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아테네로서는 세게스타의 요청을 수락함과 동시에

이참에 시라쿠사를 비롯하여 자원이 풍부한 시칠리아를 통째로 삼키고 싶어 했습니다.

 

아테네 민회는 전함 130여척을 비롯한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고 장군들을 파견하는데

전쟁 천재로 알려진 알키비아데스와

평화의 상징 니키아스, 그리고 백전노장 라마코스

세 사람에게 지휘 사령관 자리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그간 아테네 함대를

무적으로 이끌었던 전투 능력은 뛰어났지만

평소 온화하지 못한 성품과 정치에는 자질이 없었던 터라

아테네 내부에 정적이 많았습니다.

 

세 사령관이 출항하기 전날 밤 아테네에서는

헤르메스 흉상이 새겨진 직사각형 돌기둥인 헤르마가 다수 파괴되었고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주범이라는 여론을 일으키게 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아테네 내에서 죽을 바에야

스파르타에 망명신청을 했고

스파르타로서는 전력에 큰 보탬이 되는

알키비아데스를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었습니다.

 

아테네의 에이스라 할 수 있는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에 망명한 가운데

아테네는 어쨌든 시라쿠사를 포위하는 데는 성공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떠나버리고, 라마코스 또한

시라쿠사 포위 도중 전사하면서

이제는 전쟁에 소극적인 니키아스가 전권을 지휘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전쟁 경험이 부족했던 니키아스가 우왕좌왕하던 중

포위되어 있던 시라쿠사는 스파르타에 원군 요청을 했고

스파르타에서는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시라쿠사에 원정군을 보내게 됩니다.

 

결국, 아테네 함대의 시라쿠사 포위망은 실패로 돌아갔고

지휘관 니키아스는 아테네 본국에 서신을 보내

원정이 실패로 돌아갈 것 같으니 본국으로 철수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는 니키아스의 요청을 철회하였고

오히려 에우리메돈과 데모스테네스 지휘하에

1차 원정군과 비슷한 규모의 원정군을 보내며

아테네군의 전력은 2배가 되었습니다.

 

 

 

 

10년 전 필로스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던 데모스테네스의 출전으로

아테네는 사기가 올라 시라쿠스 성벽을 향해 적극적인 공세를 가하였습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준비되지 않은 야간 공격은

아테네군들끼리 서로 오인하며 전투를 벌인다거나

모르는 지형 탓에 수많은 병사들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등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기다 아테네군의 영채가 습지에 위치해 있는 바람에

질병에 취약한 환경이 되었고

이로 인해 아테네군의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추가 병력으로 왔던 데모스테네스와 에우리메돈은

더 이상 전투를 진행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판단하여

철수하자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니키아스가 철수를 반대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전쟁을 원치 않았던 그가

갑자기 반대의 뜻을 나타낸 이유는

아테네 법에서는 전투에서 실패한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는 등의 무거운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니키아스는 전투에서 패배할 바에야

승리할 가능성을 기원하고 있었는데

그의 계산으로는 포위되어 있는 시라쿠사의 재정이 소진된다면

시라쿠사 안의 친 아테네 세력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물거품이 되었고

사기가 꺾인 아테네군로서는 더 이상의 행보는 불가능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하늘에서 월식이 일어났고

이를 불운함의 징조로 받아들인 신관들은

9일씩 세 번을 기다리라는 조언을 합니다.

만약 이때, 빨리 철수라도 했으면

아테네는 큰 위기에 빠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고대 사회에서 신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아테네군은 진격도 철수도 못한 채 어물거리는 사이

시라쿠사 해군과 스파르타 연합군은

아테네 해군을 격파하고 출구를 봉쇄합니다.

 

이제는 입장이 뒤바뀌어 아테네 함대가 고립되었고

아테네군은 있는 힘껏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했지만

경험이 부족한 니키아스의 해군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4만여 명의 아테네군은 바다가 아닌 육로를 통해

주변 동맹국으로 탈출하고자 했지만

뒤따라오는 시라쿠사와 펠로폰네소스 동맹 연합군의 추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그나마 아테네에서 이름 있는 인물들인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를 포로로 잡아가려고 했는데

시라쿠스에서 이들을 모두 처형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전투 중 잡았던 7천명의 포로는 노예로 삼아

채석장에서 죽을 때까지 강제노동을 시키게 됩니다.

 

 

 

 

아테네는 시라쿠스 원정에서

델로스 동맹에서 지원받은 병력까지 포함해

200여척의 함선과 4만여 명에 달하는 군대를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자면 군인들의 급여라든가

무기 제조 등의 돈을 필요로 하는데

이 원정에서 아테네는 5년 치 연소득에 해당하는 국가예산을 모두 소진하게 됩니다.

 

뿐만아니라, 아테네에서 영향력 있던 인물들인

니키아스, 라마코스, 데모스테네스, 에우리메돈이 모두 전투 중에 전사하였으며

심지어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망명까지 하게 됩니다.

 

시라쿠사 전투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군으로서 큰 역할을 했는데

그는 시라쿠사에 원군을 보내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동시에 아테네 근처 데켈레아를 점령해야 된다고 합니다.

 

스파르타는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라

데켈레아 요새를 장악했으며

이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괴롭히는 한 수가 되었습니다.

 

시라쿠사는 이번 아테네와의 전투를 통해

더욱 스파르타와 친교를 맺으며

이후로는 스파르타에게 대규모 함대를 제공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아테네군은 거의 전멸을 당하였는데

탈출한 사람도 거의 없었던 탓에

시칠리아 전투가 끝난 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인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무역을 하던 한 상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발사에게 한마디 말을 건넵니다.

시칠라에서 아테네가 전멸했다는데 아테네 본국은 괜찮은가보네?”라는 말을 건넸던 겁니다.

이발사는 아테네가 패배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혼비백산하여 광장으로 뛰어나가 사람들에게 아테네의 전멸 소식을 알렸고

아테네인들은 그리스 최강 해군함대 아테네가

괴멸했다는 소식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울러, 아테네는 얼마 전 역병으로 인해 민심이 좋지 않았던 터라

아테네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발사에게 고문을 가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시민들에게 가짜 뉴스를 퍼뜨려서

아테네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다는 죄목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거짓 소문이라고 입을 틀어막아도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 실패는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이었고

아테네의 재정과 국력은 크게 감소하여

더 이상 예전의 아테네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펠로폰네소스 7번째 영상으로

오랫동안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손에 쥐고 있던 아테네 해군이

시칠리아 원정에서 처참하게 무너지는 이야기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에서 힘을 축적하며

자타공인 그리스 최강국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국내 정치인들의 시기와 질투, 정적 제거 활동은

결국 아테네를 심각한 위기로 밀어 넣었습니다.

 

다음 세계사 영상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여덟 번째 이야기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