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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아테네 vs 스파르타 : 알키비아데스 키지코스 해전

Buddhastudy 2023. 9. 27. 19:36

 

 

페르시아 전쟁으로부터 그리스를 지켜낸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의 폴리스들은

이제, 그리스인들끼리 평화를 만끽할 법도 했으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으로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기원전 431년부터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전쟁으로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기원전 413년 무렵이 되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에는

스파르타가 우세를 보이는 듯했으나

전쟁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페르시아 전쟁 때 주로 활약한 아테네 함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기를 이끌게 됩니다.

 

하지만, 아테네는 평화로운 시기 때

민주정이라는 가장 인간 존중에 가까운 정치체제를 보였지만

전시 때는 정치인들끼리의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당파 싸움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통일된 군사전략을 구사하지 못했습니다.

 

아테네의 장군 중에는 최강의 명장이라 불리는

알키비아데스 장군이 있었는데

그는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인성이 좋지 않아 정치판에서 적이 많았습니다.

 

아테네 내부의 그를 반대한 정치 세력은

시칠리아 원정 도중 알키비아데스를

신성모독죄로 사형 재판을 이끌었고

알키비아데스는 차라리 스파르타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의 전투 능력은 아테네에 있을 때는 큰 힘이 되었지만

스파르타로 망명 후에는 되려

스파르타의 군사력을 신장시킴으로써

이제는 아테네가 알키비아데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준 피해보다

훨씬 큰 이익을 보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했고

이에 스파르타는 그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아테네 군사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최강의 사령관이

적군에 붙어버리는 초유의 사건 때문에 혼란스러웠는데

남은 아테네의 사령관은 평화주의자 니키아스였기 때문에

둘의 군사전략의 차이는

그야말로 전쟁 전문가와 초보자의 대결이었습니다.

 

결국, 기원전 413. 아테네 민회는

알키비아데스가 없어도 다른 장군들이 대체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시칠리아, 스파르타의 연합군과 맞붙게 되었지만

전투의 결과는 아테네 함대의 전멸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 등 주요 지휘관들도 모두 전사하게 됩니다.

 

시칠리아의 대재앙이라는 최악의 참패를 경험한 아테네는

국가 재정도 큰 손실을 입게 되고

아테네의 정계도 요동치게 됩니다.

 

시칠리아 전투 이후, 아테네의 존속 여부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동안

스파르타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는

군사적 성격이 강했던 스파르타라는 국가에도 잘 녹아들어

마치 원래 스파르타인처럼 잘 적응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절제된 생활을 잘 보여주었던 알키비아데스는

그만 스파르타의 왕 아기스의 아내인 티마이아와의 간통이 발각되었고

알키비아데스는 도주하여 페르시아에 몸을 의탁합니다.

 

기원전 411. 시칠리아 전쟁에 5년치 예산을 부였던 아테네는

전멸이라는 성적표로 인해 국가 경제가 심하게 흔들리게 되자

아테네 민회는 귀족들과 부자들에게 강력한 세금을 부과합니다.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아테네 민회에 불만을 갖고 있던 귀족들은

정변을 일으켜 민주정을 엎어버리고

과두정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아테네 주요 함대 측에서 민주정을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민주제와 과두정의 절충형이었던 “5000인 회가 성립되었습니다.

 

 

 

국내의 정치상황은 혼란스럽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부터는

끊임없이 전쟁 도발이 이어져 핀치에 몰린 아테네는

마침 페르시아에 몸을 맡긴 알키비아데스를 다시 불러들이게 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비도스 해전에서 함대를 거느리고

아테네를 지원하며 승리를 보여주었는데

알키비아데스의 신용회복은

이 정도로는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나마, 아비도스 해전의 승리에서 아테네는 오랜만에

전국의 주도권을 가져오며 에레토리아를 수복했고

마케도니아의 지원도 받게 되며 국력을 약간 증강시켰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비하면

아테네가 받는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오래전, 그리스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던 페르시아는

정복 실패 후, 그리스 세계의 전황을 관망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리스 내부에서 전쟁이 터지자

이참에 자신들에게 큰 위협이 되는 아테네 함대를 박멸하고자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막대한 지원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아테네가 규모가 작은 전투에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타격을 입힌들

페르시아 제국이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뒷받침 해주게 됨으로써

다시 전력이 원래대로 회복되는 형국이었습니다.

 

아테네로 귀환하고자 했던 알키비아데스는

처음에는 페르시아의 인맥을 통해

아테네에게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그는 큰 전투를 통해

상대를 한방에 압살할 수 있는 공략을 준비하게 됩니다.

 

작은 전투에서의 승리 정도로는

우위를 점할 수 없다고 생각한 알키비아데스는

트라시불로스, 테라메네스 등과 합류하여

86대의 함대를 끌어모았습니다.

 

아테네가 함대를 모으는 동안

스파르타의 민다루스와 파르나바조스는

마르바라해 남쪽 해안의 키지코스 시를 점령했습니다.

 

이에, 아테네 함대는 키지코스 시를 수복하려 나서게 되고

키지코스 북서쪽 프로콘네소스 섬에 도착합니다.

 

프로콘네소스 섬에서 알키비아데스는 군사들에게

적들은 페르시아가 도와주지만

우리는 이제 도와줄 주변국이 없기 때문에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 해 싸워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합니다.

이는 당시, 아테네가 처한 암울한 현실을 다시 부각시키며

동시에 자신도 모든 것을 걸겠다는 각오가 포함되었던 겁니다.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총 80척이었는데

이들은 아테네가 끌어모은 함대의 숫자가

자신들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펠로폰네소스는 아테네의 재정 상태가 상당히 취약하고

자신들은 페르시아라는 든든한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는 궁지에 몰렸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함대가 결코 86척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는 안 되며

아주 적은 숫자의 함대만 유지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보내야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 자신이 미끼가 되어 펠로폰네소스 함대들을 유도한다면

나머지 함대들이 포위하는 작전을 구상했습니다.

 

스파르타의 민다루스 지휘관은 노련했던 함대 지휘관으로서

그리 호락호락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알키비아데스는 더더욱 신중을 가해

군사들에게 비밀 유지를 강조하였고

진영을 조금이라도 빠져나가는 자가 있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사형이라고 공표합니다.

 

 

 

 

아테네군은 민다루스의 80척 함대 앞에 도착하기 전

몰래 셋으로 갈라졌는데

먼저 알키비아데스가 20척만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유인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테라메네스와 트라시불로스는

나머지 배들을 아르타카 반도와 폴리도로스 섬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병력들 중

다수를 뽑아 카이레아스의 중장보병에게 맡겼는데

이는 해전이 벌어지는 동안

키지코스 도시를 탈환할 양동작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알키비아데스는 소수의 병력만으로 미끼 역할을 자처했던 겁니다.

 

병력이 거의 없는 가벼운 알키비아데스의

20척 함대는 키지코스로 접근했고

이를 본 펠로폰네소스 함대에는 총사령관 민다루스와

이전 시칠리아 전투에서 공을 세운 헤르모크라테스 등

다수의 장군들이 20척의 배를 보고

앞다투어 전공을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전공 욕심을 내는 장군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알키비아데스가 미끼 역할을 하는데 호재로 작용되었고

결국 펠로폰네소스 함대들은

알키비아데스의 유인책에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코너에 몰린 함대들은 측면과 후방으로부터 나타난

아테네의 함대에 짓눌려 포위된 채

손 한번 쓸 수 없는 패배를 맞이하게 됩니다.

 

한편, 총사령관 민다루스는

갑자기 나타난 아테네 함대들을 보고 깜짝 놀라

자신의 함대를 키지코스 서남쪽 클레리 해안선으로 돌렸습니다.

 

그곳에는 같은 편인 페르시아군이 주둔해서

후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겁니다.

아테네 함대는 민다루스를 제외하고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압살하여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총사령관을 없애야

자신이 아테네로 돌아갈 명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무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민다루스를 쫓아 육지로 향하였고

그곳에는 지상전의 최강인 스파르타군

그리고 동맹군인 페르시아군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키비아데스는

테레메네스와 트라시불로스와 함께

강력한 아테네군의 힘을 보였고

결국 민다루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민다루스가 죽고 나자 전선은 붕괴되었고

키지코스 해전은 아테네군의 완승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인해 아테네는

키지코스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펠로폰네소스 함선들까지 포획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테네는 마르마라 해의 재해권을 접수하면서

자신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작은 도시들도 평정하며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 귀환하게 됩니다.

 

알키비아데스가 키지코스 해전에서 승리를 하던 중

아테네에서는 5,000인 회에서

다시 민주정 체제로 회귀하였습니다.

 

그동안 절망적이었던 아테네는 이번 전투로 인해

다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스파르타에서는

기원전 408년에 해군 제독으로 임명된 리산드로스 제독이

아테네에 대한 설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펠로폰네소스 9번째 영상으로

국가 존폐위기까지 몰렸던 아테네가

키지코스 해전으로 인해

다시 자신감을 되찾는 이야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음 세계사 영상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10번째 이야기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