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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코린토스 전쟁 3: 페르시아, 반 스파르타 연합군에 지원하다

Buddhastudy 2023. 11. 2. 19:30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동지였던 순간도 잠시

BC 431년부터 도시 국가들끼리 간의 패권 다툼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루게 됩니다.

 

BC 404.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을 강압적으로 지배하려 했고

이에 스파르타에 불만을 품은

반스파르타 동맹군이 형성되었습니다.

 

스파르타 다음으로 세력이 강한 폴리스들인

아테네, 코린토스, 테베, 아르고스 등은

페르시아에 지지를 받으며

BC 395년부터 스파르타와 반스파르타 연합 간의 전쟁인

코린토스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전쟁 초기의 주요한 전투로는

네메아, 크니도스, 코로네이아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 무렵의 스파르타는 아게실라오스 2세 왕이

페르시아에 위협을 줄 만큼 강한 군사력으로

페르시아 영토를 침략하고 있었는데

그리스 본국에서의 내전으로 인해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메아 전투에서는 스파르타가 연합군을 상대로

육지전투에서 우위를 보였고

코로네이아 전투에서는 아게실라오스 2세가 귀국하는 동안에 만났던

수많은 연합군을 물리치며 스파르타로 돌아가는 데 성공합니다.

 

반면, 해상전투인 크니도스에서는

페르시아 함대의 총독 파르나바주스 2, 아테네 출신의 명장 코논이

공동 지휘권을 가지고

아게실라오스 2세의 처남인 페이산도로스의 120척 함대를 궤멸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BC 394년에 있었던 전투로 인해

스파르타는 육지에서는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바다에서는 취약점을 드러냈습니다.

 

연합 국가들은 육지에서의 스파르타 군대는 이길 수 없었지만

동맹을 공고히 유지하며, 스파르타가 중부 그리스를 거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는데 주력했습니다.

 

BC 393. 페르시아의 파르나바주스는

크니도스에서의 승리 이후

이오니아의 여러 스파르타 동맹 도시들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과두제에 맞서기 위해

아테네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움직임을 선동했습니다.

 

파라나바주스와 코논은 함대를 이끌고

에게해의 멜로스(Melos) 섬들로 향하여 그곳에 기지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90년 전 그리스 폴리스 연합군들과 페르시아 간의 전쟁 이후

페르시아가 이만큼 서쪽으로 향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1세기 전만 하더라도 살라미스 해전을 통해

아테네 함대와 페르시아 함대가 서로 맞붙었지만

이제 페르시아의 입장은 스파르타에 맞서 여러 섬들을 점령하며

민주주의 혁명을 비롯, 아테네와 새로운 동맹을 형성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함대는 스파르타의 영토를 침략하며

더 먼 서쪽으로 계속 나아갔습니다.

연이어 페라이 (Pherae)를 초토화시키고

메시니아 (Messenian) 해안을 습격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스파르타에 대한

메시니아 노예들의 반란을 선동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시니아는 페르시아 함대가 머물기에는

빈약한 자원과 적은 항구, 그리고 스파르타 구원병이 급파할 가능성이 임박했기에

서둘러 이 지역을 벗어나게 됩니다.

 

이후, 이들은 라코니아(Laconia) 해안을 습격하며

키테라(cythera)섬을 장악했습니다.

페르시아가 키테라를 장악한 것은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이집트 사이에 전략적 경로를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이에 따라 스파르타와 이집트의 결탁을 막게 됩니다.

 

동시에 스파르타의 항구인 태나룸 (Taenarum)

직접적으로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파르나바주스 2세는 키테라에

함대의 일부분을 남기고 코린토스로 향하였습니다.

그는 스파르타인들을 더욱 위협하기 위해

스파르타의 경쟁국들에게 자금을 지원했고

스파르타에 저항하는데 용이하도록

코린토스 함대의 재건에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그리스 내전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30년간 치루어진 전쟁으로 큰 범주로 보면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대결이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도시가 통째로 살육될 뻔했지만

스파르타가 다른 폴리스들을 견제하기 위해

아테네를 멸국시키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건으로 강력했던 아테네 함대를

더 이상 건조하지 않을 것과

아테네의 방어선인 피레아스 근처 장벽을 없애야 하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10년 전의 조약은 이제 상황이 바뀌면서

아테네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지금은 페르시아로 망명했지만

한때 아테네 출신의 장군이었던 코논이 아테네를 설득하여

결국, 피레아스 근처의 긴 장벽을 재건하였고

이는 스파르타에게 큰 타격이 되었습니다.

 

파르나바주스는 이 과업을 달성하도록

코논에게 80척의 함대와

추가 자금을 열성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파르나바주스는 상당한 자금과 대규모 함대를 거느린

코논을 아티카(Attica)로 보냈으며

이곳에서 코논은 아테네에서 피레아스까지

긴 장벽의 재건에 합류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당시 스파르타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었던

아테네의 과두제 30인 정권을 무너뜨린

트라쉬불로스(Thrasybulus)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아테네에서는 함대 뱃사공들과

페르시아의 돈을 받은 노동자들의 지원으로

장벽의 건설은 금세 완공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

자신의 책 헬레니카 (Hellenica)에서

코논과 파르나바주스의 활동에 대해

동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냈습니다.

 

 

잠시, 크세노폰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코논은 파르나바주스에게 자신이 함대를 갖도록 허가한다면

섬들에서 오는 공물로 함대를 유지할 것이며

그 사이 아테네에 합류하여

긴 장벽과 피레아스 주위 벽을 재건하도록

아네테인들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스파르타인들에게 있어

이보다 더 큰 타격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를 들은 파르나바주스는 그를 기꺼이 아테네로 보냈으며

그에게 장벽을 재건할 추가 자금을 제공했다.

지원이 도착함에 따라 코논은 자신의 선원들에게 일을 맡기고

목수와 석공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비용이 얼마나 소요되든 간에 필요한 모든 사람을 만나며

장벽의 많은 부분을 건설했다.

 

 

하지만, 장벽의 일부 부분은

아테네인들이 스스로 지었으며

또한, 보이오티아와 다른 국가들의 자원자들이 건설을 돕기도 했습니다.

 

아테네는 곧 스키로스(Scyros), 임브로스(Imbros),

렘노스(Lemnos) 섬들을 장악하기 위해

이러한 장벽과 함대를 이용하며 확장된 섬들에 식민지를 수립했습니다.

 

한편, 페르시아 본토에서는

파라나바주스가 스파르타 압박에 성공한 대가로

파르나바주스와 페르시아 왕의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파르나바주스는 황제의 소환을 받았으며

총독은 티리바주스(Tiribazus)로 교체되었습니다.

 

 

 

 

이 무렵, 코린토스에서는 민주주의 정당과

과두제 정당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였습니다.

 

아르고스(Argive)의 지원을 받은 민주주의자들은

반대파에 공격을 시작했으며

과두제 지지자들은 도시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이 추방자들은 스파르타로 가서 지원을 요청하였고

민주주의 정당은 아테네와 보이오티아에게 지원을 받았습니다.

 

추방자들과 스파르타군은 야간 공격을 통해

코린토스만에서 코린토스의 항구인 레카에움 (Lechaeum)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으며

다음날 자신들에게 맞서기 위해 찾아온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반스파르타 동맹은 이후

계속해서 레카에움을 되찾기 위해 시도했지만

스파르타인들은 이들을 물리쳤습니다.

 

BC 392.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사트라프(총독)인 티리바조스(Tiribazus)에게

안탈키다스(Antalcidas)를 사절로 파견했습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에게 예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시절

무적의 아테네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를 격퇴한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의 의도는 사실

아테네 제국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지금의 페르시아를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움직임은 단연

페르시아가 반스파르타 연합군에게서

떠나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스파르타가 사절을 보낸 사실을 알게 된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의혹을 해소시켜주기 위해

코논을 통해 여러 명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아테네는 반스파르타 동맹들에게 이를 알렸으며

아르고스(Argos), 코린토스(Corinth), 테베(Thebes)

티리바조스에게 사절을 파견했습니다.

 

이렇게 개최된 회의에서, 스파르타는

모든 국가들의 독립을 기반으로 한 평화를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는 10년 만에

에게해에서 얻은 세력을 유지하고 싶어 했으며

테베는 보이오티아 동맹(Boeotian league)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길 원했고

또한, 아르고스는 이미 코린토스를 자국으로 흡수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제안은 동맹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에 따라 회의는 결렬되었지만

티리바조스는 코논의

친 아테네적 행위를 경계하여 그를 체포했고

그리스 내부의 갈등을 유지시키기 위해

스파르타에 함대를 갖출 자금을 은밀히 제공했습니다.

 

두 번째 평화 회의는 같은 해 스파르타에서 열렸지만

이곳에서 이루어진 제안들 역시 동맹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이는 자주권 원칙의 영향뿐 아니라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에 넘기는 것이

제안된 조건들에 포함되어 있어

아테네인들이 분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협의점을 찾기 위한 평화 회의는 결렬된 후

페르시아의 티리바조스는

상황 보고를 하기 위해 수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지휘권을 이어받기 위해

새로운 사트라프인 스토르타스(Struthas)가 파견되었습니다.

 

스토르타스는 이전 사트라프인 티리바조스와는 달리

반스파르타 정책을 추구하였으며

이에 스파르타는 티뷰론(Thibron) 장군을 보내

페르시아의 국경을 공격하여 유린했습니다.

 

티뷰론은 소아시아를 휩쓸고 다니며 실력을 과시했지만

방심한 틈을 타 스토르타스의 매복 공격으로 인해 전사하게 됩니다.

 

이후, 스파르타는 티뷰론의 뒤를 이어

디프리다스(Diphridas)를 전장에 보냈고

급습을 통해 스토르타스의 사위를 붙잡기도 했지만

극적인 성과는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간의 신경전이 점점 거세지고 있을 무렵

코린토스에서는 도시에 거점을 두고 있는 민주주의 정당에 맞서

추방자들이 레카에움에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과두정이었던 추방자들은 스파르타의 지원을 얻어

코린토스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재생목록 세계사 내

코린토스 전쟁 시리즈 3번째 이야기로

스파르타와 반스파르타 연합군의 대결에서

페르시아가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이야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기원전 4세기 초의 정세는

그리스 내 권력을 차지했던 스파르타가

다른 주요 도시 국가들과 페르시아에

모두 적을 둔 형국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럼,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