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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코린토스 전쟁 1 - 스파르타 vs 반스파르타 연합

Buddhastudy 2023. 10. 26. 20:34

 

 

코린토스 전쟁 (Corinthian War)

BC 395부터 BC 387년까지 지속된 고대 그리스 전쟁입니다.

 

코린토스 전쟁의 시작은

스파르타 동맹인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Achaemenid Empire)

지지를 받은 반스파르타 동맹인

테베, 아테네, 코린토스, 아르고스로 이루어진 연합과의

대립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코린토스 전쟁이 시작되기 10년 전인 BC 404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그리스 도시들과 페르시아 제국의 지지를 얻으며

에게해에서 대부분의 섬 국가들을 지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를 향한 견고했던 지지 기반은

전쟁 이후 몇 년 내에 분열됩니다.

 

그리스의 내전이라 할 수 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대결이었는데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과의 공동 승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리품들과 번창했던 아테네 제국의 조공을

혼자서 독차지하였습니다.

 

또한,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아테네를 제압함으로써

이제 스파르타는 노골적으로

다른 폴리스들에게 강력한 힘을 행사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2년의 시간이 흐른 BC 402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

엘리스(Elis)를 진압하고자 합니다.

 

이때, 그동안 스파르타의 강압적인 행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2,3 세력인 코린토스와 테베는

엘리스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요청한 군대 파견을 거부합니다.

 

BC 398년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 2세는

예전 그리스의 여러 도시였던

이오니아 쪽 영토를 페르시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소아시아 원정을 벌입니다.

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페르시아와

결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 원정에서도 역시 테베, 코린토스, 아테네는 참여를 거부하는데

심지어 테베는 아게실라오스가 출정 전에

승리를 기원하는 주요행사인 희생제의까지 중단시켜 버립니다.

 

그리스 세계에서 스파르타를 향한 지지도가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아게실라오스는 리디아(Lydia)에서

페르시아를 상대로 효과적인 전략을 펼쳤으며

사르디스(Sardis)에 이르는 내륙까지 전진했습니다.

 

아게실라오스는 소아시아의 태수들을 상대로 우세한 전투를 벌였으며

후퇴 직전에는 페르시아 황제에게 진군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지방 태수를 의미하는

사트라프 중 한 명인 티사페르네스(Tissaphernes)

아게실라오스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집니다.

 

티사페르네스의 뒤를 이은 사트라프 티트라우스테스(Tithraustes)

아게실라오스를 막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아게실라오스에게 뇌물과 협력을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다른 지방인

헬레스폰트 프리기아(Hellespontine Phrygia) 쪽으로

스파르타군을 돌리도록 설득합니다.

 

이에, 아게실라우스는 상당한 규모의 해군을 준비하며

헬레스폰트 프리기아 쪽으로 목표를 바꾸게 됩니다.

 

한편, 헬레스폰트 프리기아의 사트라프였던 파르나바주스는

자신들 쪽으로 아게실라우스 병력이 오는 것을 보며

그 역시, 전력에서 크게 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파르나바주스는 아게실라우스의 발걸음을 되돌리기 위해

그리스 본토에 문제를 일으키는 전략을 구상했습니다.

 

그는 그리스의 주요 도시들에 금 만(10,000) 다릭(darics)을 나누어주고

스파르타에 반기를 들도록 선동하기 위해

아시아계 그리스인인 로도스의 티모크라테스(Timocrates of Rhodes)를 보냈습니다.

 

티모크라테스는 아테네, 테베, 코린토스와 아르고스를 방문하였고

각각의 도시국가들에서 반스파르타 정책을 추구하도록

강력한 파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크(Plutarch)의 영웅전에 따르면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는 아시아를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10,000명의 페르시아 궁수에 의해 쫒겨났다.”

여기에서 궁수(Toxotai)”는 앞면 디자인으로 인해

다릭에 붙여진 그리스어 별명이었습니다.

, 스파르타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키도록

10,000 다릭에 해당되는 금액이

아테네와 테베의 정치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로써, 스파르타를 향한 반감을 보였던 테베인들은

전쟁을 일으키는데 착수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은

코린토스 전쟁 초기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개합니다.

 

코린토스 전쟁은 BC395

할리아르토스 전투(Battle of Haliartus)로부터 시작합니다.

할리아르토스 전투는 스파르타와 테베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페르시아의 특사 사트라프 파르나바주스와

로도스의 티모크라테스가 그리스에 도착할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페르시아는 테베에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선포한다면

자금과 병력을 지원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스의 많은 폴리스들은

스파르타의 공격적이고 안하무인격인 행동들로 인해

자존심이 상해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제안에 이끌리게 됩니다.

 

하지만, 테베는 스파르타에 직접 대항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어

자신들이 직접 나서는 대신

동맹국인 로크리스 (Locrians)에 접근합니다.

 

로크리스는 포키스(Phocis)와 일부 영토를 두고

서로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로크리스로 하여금 그 땅에 세금을 징수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포키스는 로크리스를 침공하였고

로크리스 영토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로크리스는 테베에 도움을 호소했으며

테베는 로크리스를 도와주는 명목으로 포키스 영토를 침략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포키스가 동맹국인

스파르타에게 도움을 호소했는데

스파르타는 테베를 훈육할 구실을 갖게 되어

만족해하며 총동원을 명령합니다.

 

테베는 스파르타에 맞서 다른 폴리스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그중에는 오랜 기간 앙숙으로 지내던 아테네도 있었습니다.

 

아테네 또한 스파르타에 대항하기 위해

테베를 지원하기로 표결했으며

아테네와 테베가 이끌던 보이오티아 지역 연합 사이에는

영구적인 동맹이 체결됩니다.

 

할리아르토스 전투에서의 스파르타의 전술은

두 군대가 합류해 합동 공격을 하는 전술로

리산드로스(Lysander)의 휘하 군대와

파우사니아스(Pausanias) 휘하 군대를 소집했습니다.

 

명장 리산드로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잠재우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장군이었고

파우사니아스는 독재 견제를 위해

두 명의 왕이 존재했던 스파르타에서

페르시아 원정을 떠난 아게실라오스 외에 또 다른 왕이었습니다.

 

파우사니아스 왕이 이끄는 군대는

스파르타군과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으로 구성되었고

리산드로스가 이끄는 군대는

포키스 군과 다른 그리스 북서부 동맹군이었습니다.

 

두 군대는 할리아르토스(Haliartus) 도시에서 만나

함께 공격을 하려 했지만

파우사니아스가 전장터에 도착하는 데 오래 걸려 합류가 늦어졌습니다.

 

평소 리산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는

정치적 행보에서 대립각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에 리산드로스는 파우사니아스를 더 기다리는 데 지쳐

혼자서 군대를 이끌고 할리아르토스 성벽까지 진군했습니다.

 

하지만, 도시에는 리산드로스가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많은 규모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결국, 리산드로스는 할리아르토스 성벽 아래

전투 도중 전사하게 됩니다.

 

 

 

 

파우사니아스의 군대는 리산드로스가 사망한 후

뒤늦게 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사망한 리산드로스와 전사한 병력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테베와 휴전 조약을 맺었습니다.

 

테베는 파우사니아스가

보이오티아를 떠난다는 조건으로 휴전을 받아들였습니다.

 

파우사니아스는 전사자들의 시체를 모아 스파르타로 돌아갔는데

리산드로스와 가깝게 지내던 파벌은

파우사니아스가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승리 때도

아테네의 민주정에 협력했다는 이유 등을 붙여

파우사니아스를 재판에 회부합니다.

 

결국, 파우사니아스는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지만

그는 형 집행 전에 테게아로 도망쳐 망명하게 됩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영웅 리산드로스의 죽음.

한 명의 왕인 파우사니아스의 망명으로 인해

가장 권력이 강했던 3명 중 2명이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스파르타에서는 아게실라오스 2세만이 남아

권력을 독차지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에 뒤이어, 스파르타와 반스파르타 연합국들은

다가오는 중요한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BC395년 말, 코린토스와 아르고스는

아테네와 테베의 공전국으로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코린토스에서는 이러한 동맹의 사안들을

관리하기 위한 의회가 수립됩니다.

 

이후, 동맹국들은 다수의 더 작은 도시국가들로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이들 중 많은 도시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습니다.

 

스파르타에게 반기를 든 도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트 로크리스(East Lokris), 테살리아(Thessaly), 레우카스(Leukas),

아카르나니아(Acarnania), 암브라키아(Ambracia), 찰키디안 트라키아(Chalcidian Thrace)

에비아(Euboea), 아타마니아(Athamania), 아이니스(Ainis). 등의

작은 국가들이 반스파르타 연합국에 합류했습니다.

 

이제 그리스에서는 오직 포키스와 오르코메노스만이

북부 그리스에서 스파르타에 여전히 충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개에 불안해진 스파르타는

새로운 동맹에 대항하는 군대를 보낼 준비를 했는데

이 때문에 페르시아 원정을 떠났던 아게실라오스에게 전령을 보내

그리스에 돌아오도록 요청했습니다.

 

아게실라오스는 이 요청을 받아들고서

페르시아에 타격을 줄 수 있었던 현재 상황을 포기하는 것이 안타까워

씁쓸하게 본국의 지시를 따랐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10,000명의 페르시아 궁수들만 아니었더라면

아시아를 격파할 수 있었을 것이라 아쉬워하며

결국, 발길을 돌려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 (Hellespont)를 건너

트라키아(Thrace)를 향해 서쪽으로 행군하게 됩니다.

 

 

 

오늘은 BC 395년부터 시작되었던

스파르타와 반스파르타 연합군의 전쟁인

코린토스 전쟁 첫 번째 이야기로 정리해보았습니다.

 

다음 세계사 영상에서는 스파르타와 연합군의

좀 더 본격적인 전투들이 벌어지는

코린토스 전쟁 두 번째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