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역사, 세계사

삼국지 5 : 1, 2차 당고의 금, 십상시, 두무

Buddhastudy 2023. 11. 22. 19:53

 

 

후한(後漢) 말기.

어린 황제를 자신들의 손으로 마음대로 주물린 환관 집단, 십상시는

삼국지라는 대격동기의 시작을 알리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후한 시대에는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여

그에 따른 외척이 권력을 차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황제들은 어린 시절이 지나 성장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힘을 찾기 위해

궁궐에서 권세를 휘두르고 있던 외척을 없애기로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이때 황제는 자신과 가장 가까이 지내고 있는

환관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고

환관들은 황제의 친위대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많은 외척 중에서도 황제 이상의 권세를 누린 외척으로는

지난 삼국지 4편에서 다룬 양기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양기는 부인 손수와 함께 모든 정권을 손아귀에 넣어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8살 황제였던 질제에게는

독살을 시행하기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146. 후한 11대 황제 환제는 자신을

황제의 자리로 이끈 양기의 횡포를 힘없이 볼 수밖에 없었지만

환제도 성장함에 따라

외척 세력을 몰아낼 궁리를 하게 됩니다.

 

15년이 지난 159.

환제는 환관들과 논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양기의 죄를 물으며 그의 저택을 포위합니다.

그리고 양기와 그 일족은 모두 목이 잘린 채 거리에 버려졌습니다.

 

이로써, 환제는 자신의 손발을 꽁꽁 묶었던

외척 세력을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후에는 되려

양기 제거에 공을 세운 환관들의 세력이 비대하게 커져 나갔습니다.

이제는 환관들이 내정에 간섭하고, 자신들의 일족을

지방으로 파견시키는 등 세력을 확장해 갔습니다.

 

사대부 및 관료 계층은 이러한 외척과 환관의 세력을 비판했는데

사대부들은 호족 세력과 유교적 도덕규범에 따른

향거리선제를 통해 진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호족이라는 명칭은

한국사에서는 통일신라 말기 무렵부터 등장했는데 반해

중국의 호족은 주로 한나라 때부터

위진남북조시대까지 나타난 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지방에 세력을 둔 우수한 친족집단으로

같은 가문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환제 시대 때의 후한의 호족들도 있었고

앞으로 벌어지는 삼국지 시대에서도

조조와 유비, 손권의 위촉오 또한

지역 호족들의 지지와 협조로 건국된 나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환제는 환관들의 기를 살려주며 양기를 처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어지는 환관들의 전횡은 유교의 기반을 둔

호족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어, 양기가 죽은 지 7년 뒤인 166.

1차 당고의 금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사대부를 이끌던 인물 중에는

청류당의 이응(李膺)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문무에 재능이 뛰어났으며

환관이 득세한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고결함을 유지하던 인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고사성어 등용문은 바로

이응의 추천을 받는 것은 용문에 오르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유래했는데

그만큼 젊은이들에게는 청렴결백한 이응의 추천으로 출세하는 것은

남다른 인정을 받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양기의 사후, 청류파 사인들과 3만 명의 태학생들은

연일 환관들이 궁에서 제멋대로 하고 다니는 행태에 대해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환관들은 자신들의 입지에 위기를 느끼며, 이를 모면하고자 했습니다.

 

환관들은 자신들과 가까이 지냈던 환제에게

요즘 궁궐의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하는 무리가 있는데

이들은 왕권에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하였고

이에 환제는 이응과 200여 명의 관료 계층을 잡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재판이 시작되니 환관들의 계략과는 달리

법정 진술 과정에서 청류당은 저마다 입을 모으며

환관의 죄상을 폭로하기 시작했습니다.

 

환관들은 이대로 이응과 무리들을 놔두면 더 큰 일이 될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새로운 해결방안으로 두무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두무는 청렴하고 강직한 인물로 그의 가족은

평소 호의호식하지 않고 가난하게 지냈는데

두무의 장녀 두묘가 궁으로 들어가면서 환제의 귀인으로 책봉되자

낭중이라는 관직에 임명되었습니다.

 

환관들은 외척 두무 등이 상주하여 간한 것을 기회로

청류당 200명에게 관직을 박탈하고

이후 평생의 관직 진출을 막는 금고형을 내리게 됩니다.

이 일이 바로 166년에 일어난 ‘1차 당고의 금사건이었습니다.

 

3년 후인 169. 외척의 힘을 누르고

환관의 세상을 만들어주었던 환제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환제가 붕어하자 황태후가 된 사람은 바로 두무의 딸인 두묘였습니다.

환제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두묘는 다른 이를 황제로 내세웠는데

그가 바로, 십상시를 두고 아버지, 어머니라 불렀던 영제였습니다.

영제가 즉위할 때, 두묘가 황태후라는 배경으로 인해

대장군으로는 두묘의 아버지 두무가 임명되었습니다.

 

실권을 잡게 된 두무는 1차 당고의 금을 해제한 후

청류당에 속한 인사들을 등용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환관의 세상이었던 환제 시대를 벗어나고자

환관들을 제거하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외척 두씨 세력의 중심이었던 두무는 사대부를 이끌었던 이응과

태학생들에게 명망이 높았던 진번 등에게 접근하여

함께 환관 세력을 제거하는 모의를 했습니다.

 

하지만 두무가 잠시 휴가를 떠난 사이

환관 중 한 명인 주우

이 사실을 부하에게 듣고서, 궁중으로 가서 17명의 환관들에게 알렸습니다.

환관 조절왕보는 영제에게 거짓말로 고하였는데

두무와 진번이 새 황제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영제를 피신시켰습니다.

그리고, 왕보는 칼을 빼들어 관리들을 위협하면서

스스로 황문령라는 관직에 올라 두태후를 위협하여 인수를 빼앗게 됩니다.

 

이에 청류당의 진번이 8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왕보를 꾸짖으며 돌격했지만

실권을 가진 궁궐의 신하들에게 잡혀 살해당했습니다.

 

 

 

때마침, 당시 한나라를 흉노와 오환으로부터 지키던

장환이라는 장군이

흉노의 사자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장환은 외세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장군이기도 했지만

소수민족의 안무에 힘을 쓰는 온건책을 지향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영제가 즉위 후 조정의 일을 전혀 몰랐던 장환은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돌아왔고

환관들의 조작된 조서를 받아 두무를 토벌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전쟁터에서의 경험이 풍부했던 장환에 맞서

두무의 병사들은 달아나거나 항복했고, 두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일이 바로 영제 즉위 직후에 일어난 2차 당고의 금으로

두무는 사건 발생 때 자살해 버렸고

이응을 포함해서 잡혀 죽은 자만 100여 명이 넘었으며

그 외 600~700명이 사죄(死罪), 유죄(流罪), 금고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또한, 태학생 1,000여 명이 체포되어 사인 집단의 힘이 크게 약화되면서

조정은 외척들과 사대부들이 한꺼번에 설 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2차 당고의 금은 1차 때와는 달리

주도 세력들을 사형하기까지 이르렀으며

호족과 사대부 세력 또한 극단적으로 배척되었습니다.

 

영제는 2차 당고의 금 사건 이후, 자신을 지켜줬다고 생각한 왕보를

중상시로 승진시켰습니다.

사대부 세력이 없어짐으로 인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했던 향거리선제는

무용지물이 되며

조정의 권력은 자연히 환관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조정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던 두 차례의 당고의 금은

그 반작용으로 청류파라는 이름의 사인 집단을 결속시켰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희생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스스로 도덕적으로 우월한 집단이라 여기는 청류파로 불렀습니다.

 

 

후한의 제12대 황제인 영제는 이후로도 자신을 향한

쓴소리를 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날리는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친황제 세력인 환관 세력들과

권력에 눈치를 살피는 사대부들만이 궁궐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청류파 사대부들은 낙양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원래 기반이 있던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으며

후한은 십상시의 손에 놀아나게 되었습니다.

 

외척, 사대부, 환관의 세력에서 살아남은

십상시를 막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습니다.

십상시의 부정부패는 끝을 달릴 줄 몰랐고

관직 자리를 두고서는 매관매직이 흔하게 번져나갔는데

이를 두고 황제인 영제는 어차피 막지 못할 매관매직이라면

아예 공식적으로 매관매직을 승인하면서

황제도 재물을 늘리는 데 힘을 썼습니다.

 

한편, 두무를 토벌했던 장환은 그 공적을 인정받아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대사농이라는 관직에 올랐지만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괴로워했습니다.

장환은 금고된 사람들은 모두 사면되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환관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장환은 홍농군으로 돌아가

문을 닫고 더 이상 집밖에 나서지 않고

죄책감을 가지고 1천여 명의 제자를 가르치면서

책을 저술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아직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전인 181,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러한, 장환의 죽음이 안타까웠는지

삼국지 배경인 창천항로 만화 작품에서는

조조가 장환을 거두어들이며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데 좀 더 활동을 이어가는 설정이 나오기도 합니다.

 

 

오늘은 삼국지 다섯 번째 시간으로

십상시가 권력을 잡게 된 경위인

1, 2차 당고의 금에 대해 정리해 보았으며

참고로 삼국지 시리즈는 채널 내 재생 목록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