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교장쌤 특강]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Buddhastudy 2024. 4. 1. 20:01

 

 

--무엇이 무아인가?

오늘은 무아가 진아다라고 하는 주제로 강좌를 진행하겠습니다.

불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무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없음

 

그런데 내가 없다라는 말을 생각으로 오해하면

그러면 또 잘못 분별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없다, 무아다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있다 없다라고 하는 생각으로 분별하고 있는데

그런 없음이 아닙니다.

그럼 잘못 가는 거예요.

 

그럼 어떤 게 무아냐?

우리 어렸을 때 갓난아기 때 보면 갓난아기는 내가 없어요.

갓난아기는 없다고 해서 완전히 없는

무슨 기계나 무생물이 아니고 뭔가가 있어요.

뭔가가 그 자리에 대신 있습니다.

그런 무아를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무아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여태까지 내가 알던

나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의 무아지

있다 없다라는 무아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로부터 벗어난다]라고 하는 것은 뭘 말하냐면

[살아있는 공자리]가 된다는 거예요.

 

제가 또 살아있는 공자리다 하면

살아있는 공자리구나하고 생각으로 또 거기 가서 달라붙으면

그러면 또 그건 무아가 아니라

무아를 빙자한 유아가 됩니다.

 

그래서 정말 이렇게 생생하게 아무것도 아닌 이 자리

그렇지만 살아있는 이 자리

이 말도 떨어지면 안 되는 이 자리

그것이 되셔야 돼요.

 

그럼 예를 들면 TV를 보는데

갑자기 이렇게 제가 세계 테마여행인가 이거 보면

그 앞에 꼭 세이브더칠드런 해갖고

불쌍한 어린애들 그게 나와요.

그럼 참 그건 보면 측근 하고 참 안 됐다라고 하는

이 측은지심 자비지심이

어디선가부터 나와요. 어디서부터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가 무아의 자리에요.

무아라고 해서

뭐가 없다, 무조건 없다, 내가 없어야 되는데

이러고 있으면

그건 분별심이다. 무아가 아니다

아시겠죠?

 

그래서 있다 없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 분별을 딱 넘어서 있지만

있는 그대로, 이렇게 뭔가 그 자체로 있는 활짝 열려 있는 이 자리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자리고

또 살아있는 공자리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어요.

 

그래서 결국은 다 이 말에 떨어지면 안 되는데

말이 다 똑같은 말입니다.

무아니 무념무상이니 진아니 참나니 살아있는 공이니 이런 말들이

결국은 다 이 손가락이에요. 달을 가르치는.

그러니까 이 달을 가르치는 이 손가락이 뭘 가르치고 있나?

그게 지금

~

이거를 알아듣는 이 자리를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마음악교에서는

이 자리를 무지개 몸이다라고도 얘기를 하고

살아있는 진리의 자리, 부처님 자리, 하나님 자리라고도 말합니다.

 

--자신을 살펴보는 방법

근데 이 자리가

여러분이 자꾸 생각 따라가지 마시고

한번 자기의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라고 하는 이 존재 방식을

한번 잘 자기 상태라고 할까, 자기 존재가 어떻게 지금 자각되고

이렇게 일어나고 있고, 사라지고 있고, 표현되고 있나를 잘 지켜보세요.

 

예를 들면

오늘 아침에 내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눈을 떴어요.

자연스럽게 눈을 떴더니

아직 의식이 구체적으로 발동되기 이전에

그냥 이렇게 모든 게 하나인 약간 몽롱한 듯한 그 자리에서

새소리가 들려옵니다.

또는 무슨 차임벨 소리가 들려옵니다, 자명종 소리가.

 

이런 소리가 들려올 때 우리는 그 새소리가 들려오면

그 들려오는 이 자리가 있어요. 이 살아있는 이 자리.

이게 분별이 일어나기 전의 자리

분별이 일어나면

이건 침대다’, ‘이건 내 방이다’, ‘오늘 몸 컨디션이 어떻네

이런 거 일어나기 전에 이 자리

그 자리가 우리가 말하는 그 원인체죠.

 

이 자리가 원인체라는 것도

근원체가 있어서 원인체가 있는 거니까

결국 그 자리가 법신자리에요.

법신자리가 살아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자리죠.

근데 그게 나눠지기 이전 자리다 보니까 그냥 하나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깨어났다라고 하는 거는

이 자리가 지금 이 자리에도 생생한 거예요.

이 자리가 생생한 이걸 바탕으로 해서 여기에서

아 저 사람은 누구다’, ‘이거는 뭐다

이런 분별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지.

 

그래서 분별에 떨어지면서 이 바탕 자리를 잃어버려요.

그런데 항상 우리는 이 자리가 아닌 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을 있게 하는 게

바로 이 자리예요.

 

세상이 드러나고 인식되며

저절로 이게 살아있기 때문에

나를, 모든 것을 살려주고, 모든 것이 살아 돌아가게 하고 있어요.

 

자 만약에 이거다라고 하면

이거라고 하는 이걸 말하는 게 아니고

이거라고 하는 이것을 있게 하는 자리.

이거라고 말할 게 대상이 있는 게 아니고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게 하고

이거라는 이것을 드러나게 하는 자리가 그거다 이 말입니다.

 

 

--공자리, 무지개몸

그래서 이 자리가 바로 공자리다 이렇게 말하지만

이게 왜 우리 학교에서는 무지개 몸이다, 이렇게도 얘기를 하냐면

여기에서 다양한 게 다 쏟아져 나와요.

 

여기에서 보는 자도 나오고

아는 자도 있고

그리고 여기서 지금 여러분들이 이 동영상을 보시면서도

예를 들어 딴 생각을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러면 제 말이 안 들어오고

그 딴 생각에 마음이 잠시 딸려가거든요.

그러면 그 딴 생각이 이미지를 동반했다면

상상을 동반한 거예요.

어떤 이미지가 마음속에서 그려집니다.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네’ ‘몸이 어디가 쑤시네뭐 이러면

또 그거가 이렇게 에너지라든가 기운이나 느낌으로 다가와요.

 

이렇게 다양한 것이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언제 일어났다 사라지는지도 모르게 또 슬쩍 사라져요.

우리가 너무 무심하게 이 자리를 살고 있지만

이 자리가 이렇게 다양한 무지개 색깔처럼

정말 신령한 방식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있어요.

 

하나님 부처님도 이거 이상이 없어요.

그냥 이거 갖고

신이라고 해서 뭐 더 특별한 다른 거를 보나?

다 똑같은 걸 봅니다.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자리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살아있는 공자리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일상속에서 깨어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속에서도 깨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자꾸 뭔가를 따라가거나

생각에 자기가 일으킨 것에 빠지거나

이러지 말고

계속 일어나는 이것과

이것의 배경이 되는 이것이 아닌 것

다시 말하면 전체

이 전체를 있게 하는 자기 자신의 자각을 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걸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 있는 이대로 이거거든

지금 여러분 눈앞에 있는 이거 그대로거든

이게 그냥 진리가 벌어져 있는 거예요.

 

내가 이걸 벌렸습니까?

우리는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떴으니까 보이고

내가 이렇게 느끼니까 느낌이 오는 거다.

이렇게 전도몽상을 하고 있는데

사실은 거꾸로 저절로 다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자리가 바로 사실은 무아의 자리에요.

그리고 진아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내가 있다라는 건 내가 일으킨 생각이거든요.

내가 있다, 내가 보고 있다, 내가 받고 있다. 내가 느끼고 있다라는 건 내 생각이지

실제로 이 자리에서는

내가라고 하는 것이 없어요. 붙을 데가 없어요.

그냥 모든 게 저절로 일어나고 있어요.

보여지고 있고, 느껴지고 있고, 들려지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들으면 음악만이 있어요.

내가 음악을 듣는다 이런 주체, 객체 행위는

우리 분별 생각 속에만 있는 거지

실제로는 음악만 흐르고 있어요.

 

맛있는 커피를 마신다했을 때

그때 이 커피 맛만 있지

내가도 없고, ‘마신다는 행위도 없어요.

그냥 커피 맛 맛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거예요.

 

이렇게 이 무아의 자리가 바로 진아의 자리로

딱 같이, 하나의 동전의 양측면 같아요.

 

그래서 사실은 이 자리가 바로

온 우주를 있게 하는 자리이고

온 우주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이 자리에 비춰진 상이에요.

 

우리가 거울을 보면은

거울은 모든 걸 비추지만

자기 자신을 비추지 않은 자기 자신을 보여주진 못해요.

 

한 번도 여러분들이

거울이 아무것도 안 비친 상태로 나 거울이야하고

스스로를 보여주는 적을 보신 적은 없을 거예요.

 

마찬가지로 이 본래면목 자리도

모든 것을 이렇게 비춰주고 나타내게 하지만

자기는 거울과 같아요.

분명히 있는데 드러나질 않아요.

?

그게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무아의 진짜 의미는?

그래서 무아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것을 한번 걷어내 보면

그 자리에 참나가 있던 것이 드러난다 이 말이지

그래서 무아는 방편의 말이에요.

이거 좀 한번 무아를 해봐라. 무아를 체험해봐라, 무아가 돼 봐라

이 말이지

무아가 진리다라는 말이 아니에요.

 

무아는 진리가 아닙니다.

무아는 진리로 가는 길을 말하는 방편에 불과해요.

 

 

--무아와 심우도

그러니까 이거를 심우도에 비유해서 말하자면은

여러분들이 좀 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서 십우도에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십우도라는 게

처음에는 소를 찾는 尋牛심우

그다음에 소 발자국을 본 見跡견적

그다음에 소 궁댕이를 봤어 見牛견우

그다음에 소 고삐를 딱 잡았어 得牛득우

그다음에 이놈이 처음엔 말을 안 들어요. 그냥 지멋대로 굴어요. 그래서 牧牛목우

고려시대 때 그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계시잖아요.

근데 그분이 자기의 호를 목우자라고 썼단 말이에요.

소를 키우는 사람

 

그 목우를 하고 나서는 그 騎牛歸家기우귀가

소를 타고 집으로 간다.

집이 어디예요? 기우귀가라는데.

집으로 가는 집이 어디예요?

무여열반의 자리가 집이에요. 성불의 자리가 집이라고

 

, 그런데 여기까지는 아직도 법이 있고 내가 있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한테 견성의 자리를 설명하고 있는데

오늘 요 말씀을 잘 들으신 분들은

견성이 저런 거구나’, ‘이거 뭐 감이 잡히네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깨닫기는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

이런 말도 있는 거예요.

근데 문제는 그다음이 사실은 더 어려워요.

 

 

--심우도, 망우존인

무슨 말이냐 하면

기우귀가 다음에 忘牛存人망우존인이라는 게 있어요.

망우존인

소를 잊어버리고 사람만 있다라는 거예요.

소가 뭐예요?

법이죠.?

법공이 되는 거예요.

 

근데 나는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망우존인 다음에 뭐가 있냐면 人牛具忘인우구망이 있어요.

소도 나도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소도 나도 다 잊어버리면 아공법공이 다 됐다는 거예요.

구공이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에 返本還源반본환원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면 이게 바로 견성을 말하는 거예요.

본성을 개합했다.

여기가 견성이에요.

 

앞에 견우니 득우한 건 견성이 아니에요.

그런 건 초견성, 이런 걸 말하는 거고

제대로 된 견성은 반본환원이 돼야 됩니다.

인우구망 하면 그 반본환원 아니에요?’ 하는 질문이 하는 분이 있는데

인우구망 하는 이 법견이 있어서 아직 아니에요.

그런 법견조차도 벗어버려야 반본환원이 돼요.

 

그러면 이게 뭐냐?

살아있는 공자리에 개합을 했다는 거에요.

그래서 견성이에요.

그 다음에 이제 入廛垂手입전수수가 있습니다만

입전수수는 반본환원이 돼서

다시 이 세상을 이렇게 자유스럽게 살아가는 그런 경지를 말하는데

입전수수는 제가 나중에 따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옛날 선사분들이 말씀하신 거를 보면

견우까지는 37일이다, 이런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똑똑한 머리 좀 돌아가는 사람은, 알아듣는 사람은

견우 하는데 사흘에서 늦어도 7일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목우부터 반본한원까지는 빨라야 10년이다 이런 말이 있어요.

 

깨닫는 거는 그러니까 초견성하는 건 그렇게 쉬운데

진짜 완전히 개합해서 하나 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보림이 필요하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존재중심 옮겨가는 방법

왜 그러냐면 자기 살아온 업습이 자꾸 나와요.

그리고 존재의 중심이 이동을 잘 안 해요.

 

저도 그런 세월을 많이 거쳤는데

알았다하는 놈이 있는 거예요.

나 그 법을 알았다’ ‘봤다내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알고 본 놈이 여전히 남아있어. 법은 저기 따로 있고

 

그런데 이게 확 뒤집혀서 어떻게 되냐면

내가 있는 이 살아있는 이 진리 자리, 이 공자리 그 자체가 되고

무슨 법이니, 나니 이런 것들은 그 안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멸이 하는 어떤 구름같이 보이기 시작해야 돼요.

다시 말하면 바다가 돼서 파도를 보는

이런 식으로 존재 중심이 이동해야지

내가 아직 일어났다 사라지는 파도 자리에서

, 내 바다 봤네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아라고 하는 것은

그 진리로 가는 길에 있어서, 우리가 견성하는 길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견우나 둑우하는 길에 있어서

하나의 그 지팡이와 같아요.

 

무아가 돼 봐야

겨우 견우나 득우를 하는 거예요.

아직 목우자도 안 됐어요.

 

여러분들이 무아를 방편 삼아 수행을 해나가야 해요.

마치 험한 산길을 가는 데 있어서

무아는 등산화와도 같고 스틱과도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