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09)

즉문즉설_법륜스님(제137회) 108배가 힘들어요. 적극적인 포교를 하는 친구

Buddhastudy 2011. 5. 9.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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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해도 됩니다. 안 해도 괜찮아요. 108배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많을까? 안 하는 사람이 많을까? 안하는 사람이 훨씬 많겠지. 그래도 이 세상 잘 돌아가요. 불자 중에도 108배 안하는 사람이 많고. 스님 중에도 매일 108배 안하는 사람이 더 많아요. 108배 안한다고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본인은 해야 되요. 천하가 안 해도 괜찮은데. 왜 본인은 해야 되느냐? 좋고 싫고는 우리 업식으로 부터 일어납니다. 좋고 싫고가.

 

그런데 이 좋고 싫고를 따라가면 좋다고 행하고 싫다고 거부하고 이렇게 따라가는 거는 업식의 노예가 되는 거요. 그 업식에 끌려 다니는 인생이다 이 말이오. 그런데 우리가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업식의 노예로부터 벗어나는 거요. 그 업식의 노예가 되서 늘 계속 반복되는 거를 우리가 윤회라 그래. 윤회로부터 벗어나야 되.

 

그러니까 짜증을 내고 싶어서 내는 게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고, 나도 모르게 성질이 나고, 나도 모르게 화가 나고, 나도 모르게 졸리고, 이런 식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것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려면 이 좋고 싫고로부터 자유로워야 되. 그래서 신심명 첫 구절이 뭐요? 至道無難지도무난 아니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는 짓만 안하면 된다.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는다 이 말이 좋고 싫고에 끄달리지만 않으면 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 본인이 지금 자기 입으로 뭐라 그랬어? 절하기 싫다 그랬지. 그러니까 그건 해 버려야 되. 싫은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해 버려야 되. 뿌리를 뽑아 버려야 되. 그래서 절 그 자체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본인이 절하기가 싫다. 그래서 안하면 업식을 따라하는 거요. 어떤 사람이 저는 절하는 게 너무 재미있습니다. 그러면 스님이 그냥 하세요. 그래. ? 절한다고 뭐 손해날 일 없잖아. 그죠?

 

그런데 저는 관절염인데요. 절이 너무너무 하고 싶어요. 이래 말해. 그러면 절하다 죽든지 병신이 되든지. 병신이 안 되려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된다? 안해야 되. 하고 싶은데 그 먹으면 병난다. 술이 너무너무 먹고 싶은데 위궤양이에요. 이럴 때는 안 먹어야 되. 먹고 싶으면 과보를 받아야 되. 먹고 싶은 데로 따라가면.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것도 손해가 따르면 어떻게 해야 된다? 안해야 되고. 하기 싫어도 손해가 따르면 어떻게 해야 된다? 해야 되.

 

그런데 본인은 하고 싶고 하기 싫고를 너무 이 민감하기 때문에 늘 자기 까르마에 노예가 되 산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아요. 그러면 두 가지 길이 있어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려면 과보를 받아야 됩니다. 그에 따르는 과보가 올 때 내가 아이고 그럼 뭐 그렇게 했는데 내 성질대로 했는데 당연히 과보를 받아야지. 이렇게 과보를 받아들이든지. 그 과보가 싫거들랑 인연을 짓지 말아야 되거든요.

 

그러면 좋고 싫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되. 그런데 이 좋고 싫고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게 어렵습니다. 이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 밖으로 천만의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가 자기를 이기는 게 더 어렵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이기는 것이 진짜 장부다. 그래서 부처님을 뭐라 그런다? 대웅이다. 그래서 대웅전이라 부르잖아. 큰 영웅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면 자기가 자기를 이기는 연습을 해 봐야 되. 그러기 때문에 지금 온 갖게 있겠지만 그 가운데 절하는 게 하나의 과제로 남았어. 그러면 이거를 내가 어떤 노예근성에서처럼 종교인이라 그래서 절이나 하고, 뭘 바라고, 빌고 그런 거 안 해도 되. 그러나 하기 싫어하는 내 마음을 내가 극복하는 수단으로 뭘 해본다? 절을 해 본다. 이렇게 입장을 딱 정해서 오늘부터 해보세요.

 

 

Q2

정말 친구냐? 이게 중요한 거요. 내가 그 친구를 정말 내 친구라고 생각하느냐? 정말 내 친구라고 생각하느냐? 이걸 자기한테 몇 번 되물어 봐야 됩니다. 정말 내 친구다. 그러면 그 친구를 위해서 그 친구 좋다면 내 뭘 못해줘? 그래. 니 좋다면 뭐 뭐든지 해. 설명하고 싶어? 가줄 수도 있지. 뭐 그 어려운 일이야. 설명해. 그래. 재밌다. 그래.

 

사실이에요. 좋은 일이잖아. 나를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는. 그러니까 지금 본인이 내가 보기에 흔들려 마음이. 교회에 가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 ? 일 년에 한 번 만나든, 일 년에 두 번 만나든 정도밖에 만나는 게 아니잖아 그죠? 그러니까 만났을 때 설명을 하면 친구니까. 그래 설명해 봐라 하는 마음으로. 그래 설명 많이 해라. 내 니 하자는 데로 할게. 이렇게 말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설명하면 자기 나름대로 열성으로 오랜 친구를 위해서 설명해 주니까 그냥 들으면 되지. 기꺼운 마음으로. 그런데 친구가 그렇게까지 설명 좀 하는데 그거 뭐 한 창세기부터 해도 하루 종일 할 건 아니잖아. 친구도 만나고 무슨 관계에서 만나서 얘기하는데 시간이 제한이 돼 있잖아. 동창이면 동창회, 동네면 동네지. 그게 한 시간이면 한 시간, 두 시간이면 두 시간, 제한 되 있지. 그게 뭐 이틀 삼일 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고 시간에 앉은 상태에서 그건 내가 그만두자 안 해도 자연적 시간이 그만 두게 되 있는 제한된 시간이라는 거요. 인생이라는 거는. 그러니까 그 시간이 되면 저절로 끝나기 때문에 내가 의도적으로 끝내려고 하지 말아요. 왠만하면. 여러 명이 만나면 딴 사람들이 얘야 그만하고 가자가자 해서 끝나든지 무슨 일이 벌어질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러니까 정말 친구라면 그냥 종교문제로 내세우지 말고. 그냥 그거 뭐 불교니 기독교니 나는 불교인데 그런 얘기 할 필요가 없고. 그냥 얘기하는 데로 들어주고 시간되면 밥 먹으러 가고 밥 먹고 나면 헤어지고, 이렇게 얘기하지 관심표명도 하지 말고, 거부도 하지 말고. 관심표명하면 달라붙으니까. 거부하면 내가 기분 나쁘니까. 그러니까 관심표명도 하지 말고. 거부도 하지 말고, 그냥 고 순간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친구를 위해서 내가 마음의 여유를 갖고 내 주고 들어주면 된다. 이게 하나있고.

 

두 번째는 내가 그것도 싫다하는 마음이 있으면 진짜 오래 관계를 맺었지만은 우리는 친구사이는 아니다. 그도 나를 친구로 생각안하구나. ? 자기 종교적인 정열을 갖고 나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진짜 종교를 떠나서 친구로 안 받아 들이구나. 나도 그 친구가 그렇게 정렬적으로 얘기하는데 그거 내 맘에 안 든다고 듣기 싫다고 외면하는 거 보니 나도 또한 진정한 친구는 아니구나.

 

그렇다면 굳이 뭣 때문에 내가 그런 말에 연연해서 이렇게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될 이유가 뭐가 있느냐? 그는 그의 길로 가고 나는 나의 길로 가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해서 그걸 뭐 나하고 안 맞는다. 가자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이. 그냥 안녕히 계십시오 라는 마음을 내면 되. 안녕히 계십시오 했다는거는 안녕히 계십시오가 안 됐다는거 아니오. 이게 번뇌가 되는거는 안녕히 계십시오가 안된다는거요. 그지?

 

그래서 내가 늘 얘기하잖아. 안녕히 계십시오는 36가지 계략 중에 마지막 계략이다.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고 안 돼서 안녕히계십시오 할 때는 털끝만큼의 미련도 없습니다. 아직도 앞에 방법을 시도를 덜 해보고 귀찮다고 안녕히 계십시오를 먼저 해 놓으니까 지금 미련이 남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했으면 미련이 없어야 되고. 미련이 있다면 풀어야 된다 이 말이오. 푸는 게 친구로서 최선을 다 해봐라. 최선을 다 해보고 아~ 이건 정말 안 되겠다. 방법이 없다. 그때 안녕히 계십시오 할 때는 털끝만큼의 미련도 안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