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정토회)

즉문즉설_법륜스님***제57편 불생불사, 생사고 (43:41)

Buddhastudy 2011. 10. 11. 22:31

  방송 보기: 정토TV

 

우리가 헛된 도를 구하면 안 돼. 이 헛된 도가 뭐냐? 상에 집착 하는 거요. 그 머리모양, 그 옷 모양, 그 지식, 그 지위, 그 이름, 법륜스님이라고 하는 이름, 머리 깎은 모양, 가사장삼이라는 모양, 뭐 안 먹는다 하는 그런 거, 책 썼다 하는 지식. 이런 것으로 어쩌구 저쩌구 하면 안 돼. 그런데 집착하면 우리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이 네 번째 경지에 오면, 이 첫 번째하고 두 번째하고 큰 차이가 있어? 하나는 바보같이 바다에 가서 빠지고, 살려달라고 아우성 치고, 다른 하나는 바다에 안 나가니 얼마나 현명해요. 바다에 빠진 사람은 육지에 있는 사람보고 부러워하죠? 자기인생을 후회해.

 

그런데 첫 번째 두 번째 보면 돌다 갇혀 있죠. 반쪽짜리잖아. 그러니 세 번째 사람은 바다에도 마음껏 다니잖아. 그런데 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사람의 공통점이 뭐요? 물에 안빠지는 거요. 아무튼. 행복은 물에 안빠지는 거요. 그런데 첫 번째 사람은 안빠져야 되는데 빠졌으니 죽을 맛이고. 두 번째 사람은 안빠질려고 바다에 안가는 거고. 세 번째 사람은 바다에 가도 안 빠져. 자랑스러워. 그런데 네 번째 사람은 물에 안 빠져야 된다, 하는 이것도 놔 버렸어. 그럼 이게 무슨 뜻이냐? 이 사람은 바다에 가도 좋고 안가도 좋고. 바다에 갈 때 작은 배도 좋고, 큰 배도 좋다. 이 사람은 풍랑이 쳐도 좋고 안쳐도 좋고.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도 괜찮아. 안 빠지면 안 빠지는데로 좋고, 빠지면 뭐한다? 빠진 김에 조개를 줍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유용하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유용하다. 그러기 때문에 첫 번째 사람은 재앙이 많아. 물에 빠져 아우성치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쳐. 온 갖게 다 재앙이야. 네 번째 사람은 온 갖게 다 가피야. 이 세상에 자기에게 일어나는 게 부처님가피가 아닌 게 하나도 없어. 이래도 가피고, 저래도 가피고. 이것도 좋은 일이고. 저것도 좋은 일이고. 물에 안 빠지면 안 빠진 데로 잘 놀다 오고, 빠지면 빠진 데로 조개 주워오고. 빠지는 것도 가피고 안 빠지는 것도 가피야.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피가 늘 가피 속에 살아. 가피 좀 주세요.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 늘 가피의 바다 속에서 사는 거요.

 

이걸 철학적으로 뭐라 그러냐? 사사무애의 법계다. 이래 말해. 사사무애 법계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똑같이 얼굴을 가지고, 똑같이 밥먹고 사는데, 그 사는 세계가 이렇게 서로 다른 네 종류가 있다. 이렇게 분류한게 화엄경에 네 가지 법계에서 四法界觀사법계관이라 그래. 가장 핵심된 사상이오. 여러분들은 어디 속해요?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거는 첫 번째 단계 사람은 두 번째 단계를 부러워하고, 두 번째 단계를 위대하다고 생각해.

 

그런데 두 번째 단계에 가보면 역시 한계가 있어. 그래서 한 단계 더 넘어가면 어디로 간다? 세 번째 보살의 단계로 가. 그런데 사실은 그것도 완전한 자유는 아니에요. 완전한 자유로 가련면 네 번째 단계로 가야돼. 그런데 네 번째 단계는 이렇게 돌아갈 것 없이 첫 번째 단계에서 바로 갈 수도 있어. 물에 빠져서 살려 주세요하면 첫 번째 단계고, ‘물에 빠진 김에 조개 줍자이러면 뭐가 된다? 바로 네 번째 단계요.

 

남편이 술 먹어서 못 살겠다, 이러면 첫 번째 단계고, ~ 이 남자 내가 치료해야 되겠다. 이러면 몇 번째 단계다? 네 번째 단계요. 애가 장애가 낳아가지고 내가 전생이 무슨 죄로 이런 애 낳았나?’ 이러면 첫 번째 단계고. 어떤 사람은 남의 집 애, 장애를 모아다가 돌보는 복 짓는 사람 있지. 그런데 내 애 돌보는 거 아무것도 아니죠. 그죠? 이런 애가 생긴 짐에 뭐하자? 장애자 수용소 하나 만드는 거요. 어차피 나도 하나보니까 다른 애들도 몇 애 더 데려와서 돌보자. 이렇게 탁 한 생각 바꿔버리면 뭐가 된다고? 네 번째 단계요.

 

이러면 머리 안 깎아도 해탈 할 수가 있고, 이혼안하고도 해탈 할 수가 있고. 술 한 잔 먹고도 해탈 할 수가 있어. 이건 내가 안 가르쳐 줘야 되는데. 이게 한 생각 돌이킨다 그래. 한 생각 딱 돌이키면 바로 가버려. 이거를 과학적으로 얘기하면 우주공간이 휘어져있다 그러죠. 그래서 빛이 우리가 눈에 볼 때는 직선으로 오는데, 빛이 직선으로 오지 굽어서 오는거 아니죠. 그러나 우주 공간이 휘어져 있기 때문에 공간을 따라 온다. 그런데 그 휘어진 공간이 안쪽으로 이렇게 통과 하면 바로 와 버려요.

 

여기서 북극성에서 여기까지 빛이 오려면 천백 년이 걸리는데. 그 이면의 소위 블랙홀을 통해서 그 쪽으로 오면 즉시 되. 즉 지구가 둥근데 둥근줄 모르고 평면인줄 알고, 이 보살 하고 나하고 등을 맞대고 있으면, 뒤로 가고 앞으로 가면 어때요? 저쪽으로 가면 나는 이쪽으로 가면 영원히 멀어지죠. 그죠? 영원히 멀어져. 그래서 최고로 멀어질 때가 언제고? 더 이상 뒤로 못나갈 때요. 더 이상 뒤로 안 나가져. 이때가 둘이 제일 멀어지는데. 더 이상 뒤로 안 나가질 때가 언제일까? 둘이 등을 맞대고 있을 때요. 이 말 이해하세요?

 

둥근 지구에서 하나는 이리로 가고, 하나는 이리로 가가지고 점점점 멀리가, 더 이상 뒤로 안 나가져. 돌아보면 등을 맞대고 있어. 제일 멀 때가 제일 가까울 때요. 그런데 뒤로 돌아봐야 되. 앞으로 보면 제일 멀고, 뒤로 돌아보면 제일 가까워. 왜 그러냐?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져. 평평하면 이런 일이 안 벌어져.

 

그것처럼 한 생각을 돌이키면 즉시 이렇게 되. 그래서 중생이 깨달으면 부처가 되고, 부처가 어리석으면 중생이 된다. 부처중생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돌아보면 부처고 앞을 보면 중생이고 이래. 길가다가 돌부리에 탁 체서 해서 넘어졌다. 재수 없지. 그래 생각하면 중생이야. 탁 넘어지자마자 ~ 돌이 여기 있었구나. 오늘 내가 넘어져 무르팍을 깨므로 해서 이 돌을 발견했지. 이 돌을 발견하므로 이 돌을 캐낼 수가 있지. 만약에 내가 안 넘어지면 이 돌이 있었는지 몰랐을 거 아니야.

 

그러면 이쪽으로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넘어졌겠어. 그죠? 그러니 내가 넘어지므로 해서 이 돌을 알게 되고, 이 돌을 캐내므로 해서 수십수백명이 넘어질 거를 다 막아내니까. 오늘 잘 넘어졌나? 못 넘어졌나? 잘 넘어졌어. 넘어져서 무르팍을 깨서, ‘아야하면서도 슬픈게 아니라 뭐하다? 기쁘다. 그런데 나만 생각하면 어떠냐? 재수가 없고, 일체 중생을 생각하면 잘된 일이야.

 

그래서 이 분상에서는 실패가 곧 성공이야. 그런데 우리는 실패가 곧 좌절이고 절망이지. 현실에서 함 봐라. 노무현이가 국회의원을 부산에서 출마해서 떨어졌으니 대통령 됐지 걸렸으면 대통령 됐겠나? 안됐겠나? 안됐지. 그렇게 생각 안 해? 그죠? 떨어지니까 사람들이 욱 해가지고 밀어붙인거 아니오. 그런데 그때 좌절하느냐? 요령을 따라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 큰 차이가 있는 거요. 결과적으로 잘 돼 버린 거요. 그런다고 여러분들이 길을 가면서 일부러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그래서 이 해탈 지도를 아는 사람은 특별히 따로 법수행 할 게 없어. 그냥 살면 되. 넘어지면 뭐하고? 넘어진 짐에 돈 줍고, 안 넘어지면 안 넘어진 대로 빨리 가고. 아무나 하고 결혼해도 괜찮아. 나보다 나은 사람이면 어때요? 잘 만났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면 뭐한다? 보살행 하고. 복 짓고. 아무 문제가 없어. 함부로 하는거 하고 틀려. 자기가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에 전혀 구애받지 않아. 결과는 이래 나와도 저래 나와도 다 유리해요.

 

그렇게 보면 지금 남자 다 잘 만났어? 못 만났어? 다 잘 만났어. 잘 만났다 하는 건 뜻이 조금 틀려. 다 잘 만났어. 이래 만나든 저래 만나든 거기엔 다 공부거리가 참 많아. 애기가 어쨌든 다 잘났어. 부부간에 갈등이 있으면 이걸 통해서 한 생각 돌이키면 어때요? 공부거리가 되. 애기가 문제가 있으면 공부거리가 되. 내가 낳아서, 내식대로 키웠는데, 내 맘에 안 든다? 모순 아니오. 그죠? 그런데 이게 왜 이런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 저거 누구 닮았나? 이래. 스님 닮았나? 내 닮았다, 이거야. 내닮았는데 왜 내 맘에 안 들까? 이렇게 연구를 해 들어가면 그 아이로 인해서 자기를 알게 되.

 

이런 분상에서 세상을 살 때는 세상은 그냥 한바탕 놀이야. 넘어지면 일어나면 되. 모르면 물어서 알면 되고. 틀리면 고치면 되고, 잘못했으면 뉘우치면 되고. ~ 잘못됐네. 고쳐. 잘 봐야지 이러면 끝이야. 아이고 나는 왜 이럴까? 이건 좌절이지. 이것도 지 잘났다는 얘기야. 자기는 실수할 수 없는 사람인데 실수했어. 실수한 자기가 자기를 용서를 못해요. 그래서 자기를 미워해. 그래서 후회하는 게 되. 후회하는 거는 부정된 마음이오.

 

애들보고 자전거 하나 사줘봐라. 두 번, 세 번 넘어진다고 안타드나? 아니죠? 무르팍 깨져가면서 계속 타잖아. 넘어지는게 곧 뭐하는 거다? 타지는 거지. 넘어지는게 타지는 거요. 그런데 그 넘어지는게 타지는게 되는 이유는 뭘까? 게는 넘어지면 일어나서 또 타고, 넘어지면 일어나서 또 타고. 넘어져서 무르팍을 깨면서도 인상 쓰면서 일어나 재미로 타. 그러니까 그게 타지는 거요. 자전거를 발로 차버리든지. 안타면 안넘어지니까 안타든지. 그럼 못타죠. 이게 인생의 큰 차이오. 이게 낙관적이냐? 비관적이냐? 하는 거요. 낙관적이라는 거는 막연히 잘되겠지 하는 게 낙관적이 아니라, 다만 할 뿐이오.

 

아까 광주에서 법회하는데 이래 질문했어. 기도하는데 기도가 무지무지 하기 싫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 내가 하지 마라 그랬어. 안하면 어떻게 될까? 안하면 지 꼬라지대로 사는 거고. 자기 생긴 꼬라지대로 살겠다면 안 해도 되. 그런데 자기 삶을 좀 변화시키겠다면 해야 되. 생긴 꼬라지대로 살겠다. 그러면은 그냥 살면 되요. 괴롭지. 그러니까 괴로움의 과보가 따른다. 그런데 안 괴롭도록 살겠다, 그러려면 조금 고쳐야 되. 고치려면 수행을 해야 되. 어떻더라도? 하기 싫더라도 뭐해야 된다? 해야 되. 하기 싫은데 어떻게 합니까? 그냥해요. 어떻게 그냥 하는 거요. 그냥.

 

하고 싶은 날도 뭐하고? 하고. 하기 싫은 날도? 하고. 하고 싶고, 하기 싫고 하고는 상관없이 그냥 해 버려야 되. 그게 공부요. 하고 싶은 날 하는게 공부가 아니오. 하고 싶은 날 하고, 하기 싫은 날 안하는 거는 업대로 사는 거요. 하고 싶든, 하기 싫든, 하기로 했으면 해버리는 거요. 그러면 이게 고쳐 져버려. 그리고 어떤 날은 절이 하고 싶어서 절이 잘되고, 어떤 날은 절이 하기 싫어서 그냥 염주 돌아가는게 그냥 ??같애. 그러면 이 날은 기도가 잘되고, 이 날은 기도가 안됐다. 이리 평가하는데, 전혀 그건 잘못된 생각이오.

 

그건 이날은 절이 잘되고, 이 날은 잘 안됐다고 평가 하는 거는 몰라도. 기도는 이날이나 저 날이나 똑같이 다잘 된 기도야. 아시겠어요? 오르막 올라갈 때나, 내리막 올라 갈 때를 보고, 오르막 올라갈 때는 길을 못가고 내리막 갈대는 잘한 거 같지만, 어차피 갈 길에 오르막도 가는 길이고 내리막도 가는 길이오. 그러니까 살면서 이런 일이 생겨도, 저런 일이 생겨도, 다 내 인생이오. 그렇게 딱 보고 살면 사는게 괜찮아. 다 내 원하는 대로 된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내 원하는 대로 되든지 안되든지 중요한게 아니야. 원하는게 될 때도 있고, 원한게 안되는 될 때 있고 그래. 세상은 원래 다되는 거 아니오.

 

원하는 게 되면 돼서 좋고, 안되면 안 되는 것도 좋고 그래요. 여러분들은 법륜스님이 뭐하면 다 잘되는 줄 알아? 부처님 가피를 줘가지고. 그렇지 않아요. 나는 내가 원하는 데로. 순간순간 된 게 거의 없어. 내가 북한 갈려고 그러니까 한국정부가 못가게 해서. 한국정부가 가라 그래서 갈려고 그러니까 북한에서 오지마라 그러고. 그런 것처럼 뭐 하나도 그것 시작할 때 지지받고 찬성 받아서 되 본적이 없어. 북한돕기 할 때 신도들도 다 반대 했어. 그때 한 1/3은 떨어졌을 거요. 특히 부자들. 배운 사람들.

 

그런 것처럼 안 되는게 잘되는 거요. 그 도리만 알면 살기가 좋아. 뭐가 잘되는 거라고? 안 되는게 잘되는 거야. 그런데 여러분들은 되는 것만 잘된다. 이래 생각하기 때문에 안 돼. 그래서 여기 질문에 조금 문제가 있는데, 불생불사라는 건 그런 거요. 생도 없고 사도 없어. 좋은 일도 없고 나쁜 일도 없어. 이것도 일이고 저것도 일일 뿐이야. 한번 만에 올라가지면 올라가는 거고. 한번 만에 못 올라가면 한 번 더 올라가는 거고. 어차피 한번 만에 올라가고 한번 만에 올라가고, 열까지 올라가나. 하나를 가지고 열 번시도해 올라가나 마찬가지요. 개수가 몇 개 올라가면 더 좋다, 하는 양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니까 그건 성공이고 이건 실패 같지.

 

한번만 올라가지면 다음 거를 가지게 되고. 한번 만에 못 올라가지면 그 올라가는 연구를 해야 되. 그런 생각, 사고로 인생을 사는게 뭐라고? 불생불사야. 생도 없고 사도 없어. 그러니까 올해만 생각하면 싹이 트는 거는 시작이고, 잎이 지는 거는 끝이지만. 내년도 보면 어때요? 잎이 지는게 시작일 수도 있지. 어떻게 생각해? 그래서 하루살이는 내일이 있는 줄 모르고, 일년초는 내년 봄이 또 있는지 몰라. 아시겠어요? 그런데 다 보는 사람은 내일도 있고, 내년 있고, 그런 거요.

 

육신을 나라고 생각하니까 나고 죽는다.’ 이러지. 조금만 더 넓게 보면 나고 죽는 일이 없어.’ 그게 불생불사야. 그런데 그거를 난다 죽는다, 생긴다 사라진다, 좋다 싫다, 잘된다 안된다, 이렇게 보니 뭐가 발생한다? 고가 발생한다. 그래서 뭐다? 생사고. 이렇게 말하는 거요. 생사, 생멸관에 빠지면 고가 발생하고, 불생불멸인줄 알면 고가 사라진다. 이런 얘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