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정토회)

즉문즉설_법륜스님***제30편 열등감 (19:58)

Buddhastudy 2011. 9. 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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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누가 질문했는지는 모르지만 나하고 비슷한 거 같애요. 법문 들은 대로 안되는 게 정상입니다. 아시겠어요? 안되는 게 비정상이 아니고 안되는 게 정상이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그럼 안 되니까 포기하면 업대로 사는 게 되고, 안되지만은 되는 쪽으로 향해서 계속 하게 되면 수행자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 저는 해 보니까 잘 안되던데요. 이 말은 이 사람 해 봤다는 얘기요 안 해봤다는 얘기요? 이 사람 하고 있다는 거요? 안하고 있다는 거요? 그러니까 안하는 사람 보다 나아요? 안 나아요? 낫지? 그러니까 안 되도 안하는 거 보다는 낫다.

그러니까 사실 안 된다 하는 것도 상당히 높은 수준에 속하는 거요. 안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데 안 되기 때문에 아이고 나는 왜 이리 안 될까?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게 안되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나는 왜 이리 안 될까? 해서 그만두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사람 얘기한데로 열등감에 젖는 게 문제다. 안되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러면 불교인은 인과법을 믿지 않습니까? 어떠한 결과든지 그러한 결과가 나오기 위해서 그러한 결과를 만들은 뭐가 있다? 원인이 있다. 그렇게 배웠죠. 세상 원리가 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래. 다만 우리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우연히 일어난 거 같기도 하고 또 억울하고 분하기도 한거요.

그런데 그건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그렇고. 반드시 그런 결과가 나오려면 그런 원인이 있다. 이건 이미 물리학에서도 나온 얘기에요. 어떤 물체가 속도가 변했다. 즉 가속도가 생겨났다 하면 반드시 뭐가 작용했다? 힘이 작용했다. 배우셨죠? 그래서 그걸 공식으로 뉴튼이 만든 게 뭐요? F=ma 이렇게 공식으로 만들었단 말이오. 옛날에는 모르면 하느님이 하나봐. 기적이다. 이렇게 말했다 이거야. 원인을 모르니까. 그런데 그런 결과가 나려면 반드시 그런 결과가 날만한 원인이 있어서 그런 결과가 난다.

그럴대 불교인들은 억울하거나 분하게 생각하지 마라.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억울하고 분하지만 참아라. 이런 얘기가 아니고 억울하고 분하다는 것은 그러한 지은 인연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거야. 그러니까 심리적으로 어떤 생각이 난다?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일어난다. 만약에 그러한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지은 원인을 알게 되면 억울하고 분한 생각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억울하고 분하다는 것은 어디서부터 일어난다? 모르는데서 무지로부터 일어난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우리가 뭐가 안 될 때는 안 되는 뭐가 있다? 원인이 있다 이거야. 그러니까 노력도 안 해놓고 결과가 되기를 원하는데 안됐다. 그럼 이 사람 노력을 안했다 이거야. 그리고 노력을 해야지 열등감에 젖는다고 해결이 될 일이 아니다. 즉 열등감에 젖는다는 것은 무지의 소치거나 또는 욕심이다. 이런 얘기요. 열을 해야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데 둘만 해놓고 그런 결과가 나타나길 쳐다보니까, 안 나타나니까, 이이고 난 해도 안 되나 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욕심이다. 이거요.

그러면 왜 법문을 들을 때는 알겠는데 실천하면 안 되는데 스님은 그걸 정상이라고 그러느냐? 우리가 자전거를 탈 때 제일 처음에는 자전거 가져와서 탄다. 그러면 가르쳐주죠. 어떻게 탄다고? 일단 올라타고 페달을 밟는 거 가르쳐 주는데. 제일 자전거 탈 때 중요한건 뭐냐? 넘어지는 거요. 넘어지는 거. 어떻게 하면 안 넘어 지느냐? 딱 타면 처음에 뒤에서 잡아주죠. 넘어 지는 거 뒤에서 잡아 준단 말이오. 손 놓는다 하고 탁 놓으면 탁 넘어지잖아. 그죠? 그럴 때 뭐라고 가르치느냐? 이게 왼쪽으로 기울면 핸들을 왼쪽으로 틀고, 오른쪽으로 기울면 오른쪽으로 틀어라. 이렇게 가르쳐 준단 말이오.

그러니까 왼쪽으로 이게 넘어지려면 핸들을 왼쪽으로 틀어야 균형을 잡아주고, 오른쪽으로 넘어가려면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어야 이게 이렇게 해가지고 균형을 잡아 준단 말이오. 그래서 왼쪽으로 넘어질 때는 왼쪽으로 튼다. 오른쪽으로 넘어질 때는 오른쪽으로 핸들을 튼다. 이렇게 배웠다 이거야. 안다 이거야. 그런데 타보면 100명의 1명이나 처음부터 그렇게 되지 100명의 99명은 왼쪽으로 넘어지면 무의식중으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어서 타탁~ 해가지고 좀 사투리로 말하면 때기장을 친다. 팍 넘어져버린다 이 말이야. 살 넘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에 오른쪽으로 넘어지려고 기울 때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왼쪽으로 탁 꺽어 가지고는 오른쪽을 팍 넘어진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이 바퀴가 이렇게 있는데, 오른쪽으로 넘어지면 핸들을 오른쪽을 꺾어 줘야 이게 넘어가는 걸 막고, 왼쪽으로 넘어지려면 왼쪽으로 꺾어야 이게 넘어지는 걸 막는데. 사람이 우리들의 이 무의식적인 행동이 어떠냐 하면 오른쪽으로 넘어가려면 핸들이 왼쪽으로 꺾어진다. 이 말이야. 나도 모르게 왼쪽으로 탁~ 꺾어져가지고 그냥 넘어 져버린다 이거야.

그러니까 가르쳐 주는 대로 행이 안 되더라. 가르쳐주는 데로 해보니 안 되더라가 아니라. 가르쳐준 데로 안 된다 이거야. 알기는 알겠는데 이게 안 되는데요. 그런데 이럴 때는 몇 번 해 봐야 된다. 다른 수가 없어. 그러니까 넘어지면 아이고 난 자전거 못 타겠다 하는 사람은 아직도 못타는 거요. 그러니까 아이고 다시 한 번 해 봐야지. 이 탁 오른쪽으로 꺾어야 되는데 왜 이게 왼쪽으로 꺾어져서 넘어질까? 에이 다시 한 번 해 봐야지. 벌떡 일어나 다시 하는데 똑같이 또 탁 반대로 꺾어 딱 넘어진단 말이오.

그러면 세 번까지 해보고 아이고 난 자전거 하고 인연이 없나봐. 이렇게 하는 거는 중도에 포기하는 거요. 그러니까 그 자꾸 시도를 해봐야 되. 넘어질 때 마다 어떤 오기가 생겨야 된다? 으음. 이게 정말 뭐 이런 게 다 있어 이게. 이렇게 오기라는 게 뭐라면 원력이다 이거야. 그때는. 될 때까지 해 보겠다. 이게 원력이다 이 말이오. 하다가 하이고 다섯 번이나 해도 안 되니까 나는 인연이 없나봐. 이거는 퇴굴심. 물러나는 마음. 그럼 이 퇴굴심은 왜 생길까? 욕심 때문에 생긴다.

저 사람은 잘 타고 이미 그 수도 없이 넘어져서 그 딛고 일어나서 타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잘 타는데 나는 왜 안 될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렇게 지어진 인연의 그런 거를 자기는 생각안하고 그 사람처럼 나도 한번만 탁 하면 되기를, 두 번만 탁 하면 되기를, 이렇게 바라는 마음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지는 생각을 안 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중도에 포기하게 된다. 그러니까 중도에 포기하면 안 돼.

그러니까 수행이라는 것은 넘어지기 때문에 다시 하는 게 있다. 수행은 이치를 알고 나서부터 수행이라 그래. 그래 자전거를 손을 안 되는 사람은 그 자전거 타는 연습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거는 축에도 안 들어간다. 그러니까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이 이치도 모르고 수행한다고 덤비는 것은 그것은 수행 축에도 안 들어간다. 그건 혼자서 망상 피우는 거다. 이치를 딱 알고부터 수행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수행한다 이 말은 된다는 얘기요? 안 된다는 얘기요? 안 된다는 얘기요.

자전거 타기 연습한다 이 말은 자전거가 잘 타진다는 거요? 안타진다는 얘기요? 안타진다는 얘기요. 자전거를 잘 타면 사람들이 자전거 타는 연습한다는 소리를 안 한다니까. 수행이라는 거는 연습한다. 이 얘기란 말이오. 그러니 넘어지면 또 하고, 넘어지면 또 하고, 넘어지면 또 하고, 넘어지면 또 하는데. 막연히 그냥 넘어지면 또 일어나 타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 타고. 이러면 안 된다. 넘어 질 때마다 아~ 또 안됐구나. 요래야지. 다시 해봐야. 요번엔 왼쪽으로 넘어질 때 왼쪽을 팍 한 번 꺾어봐야지.

자꾸 이렇게 안 되는 시도에 대해서 넘어질 때일수록 더욱더 두 번 넘어지면 세 번은 더 세고, 네 번 넘어지면 다섯 번째는 더 세고, 열 번 넘어지면 열한 번째는 더 세야 되는데 우리는 두 번 세 번 넘어지면 약해진다. 그래서 보살은 이게 실수를 할 때마다 원이 더 커진다 이 말이오. 그렇게 해서 열 번시도해서 한 번에 팍~ 되. 열 번 넘어지고는 무르팍 깨고 나서는 무르팍 깨면 포기하는 게 아니라 반창고 붙이고 또 한다 이거야. 피 줄줄 흘리면서 또 해. 열 번만 한 번에 탁 되면 기분이 억수로 좋다. 야~ 됐다 이런단 말이오. 됐다 하고 고다음에 딱 하면 또 팍 넘어져. 아시겠어요?

우리는 됐다 하면 그게 아무렇지도 않아야 된다 이렇게 생각해. 그렇지 않아. 됐다 하고 그 다음에 팍 넘어져서 ‘에이 또 안되네.’ 또 하면서 그 다음에 열 번해서 한 번 됐으면 그 다음에는 두 번해서 한 번 되고, 그래 그 다음에는 비틀비틀 왼쪽으로 넘어지려면 탁 틀어막고, 오른쪽으로 넘어지려면 틀어막으니까 이게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전거가 이리비틀 저리비틀, 이리비틀 저리비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간단 말이오. 그러다 탁 넘어져. 그건 무슨 얘기다? 열 번 됐는데 한번 뭐다? 안돼서 넘어진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열 번 안 되가지고 한번 된다는 거는 아예 못 타다가 딱 타졌다 이 말이오. 그런데 조금 더 지나면 어떠냐? 열 번 되는 중에 한 번이 안 되서 타다가 넘어지고 타다가 넘어진다 이 말이오. 처음엔 아예 못타고 그 다음에는 타다가 넘어지고 타다가 넘어질 때, 열 번 되다가 한 번 안 되고, 스무 번 하다가 한 번 안 되고, 10m가다 한 번 넘어지고, 50m가다 한 번 넘어지고. 그럴 때 ‘아이고 난 넘어지니까 자전거 안 된다.’ 이렇게 아니잖아. 이게 지금 되가는 과정이잖아.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공부를 할 때는 중심을 딱 잡아야 된다 이거야. 내가 기도문이 남편에게 숙이겠습니다. 이런 기도문을 받았다 이거야. 그러면 숙여지나? 안 숙여지나? 안 숙여지지. 숙여지는 사람 여기 어디 있노? 손들어 봐라. 나도 안 돼. 그런데 이 기도문이 없을 때는 어떠냐? 자기가 안 숙여지는지도 모른다 이거요. 내가 왜 숙여야 되느냐? 숙일 필요도 없고 나는 어떤 사람은 숙이고 있다 이리 생각해. 그런데 기도문을 딱 받아가지고 숙이겠습니다. 하는데 안숙이면서도 안 숙이는 줄도 몰라.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절을 하면서 숙이겠습니다. 숙이겠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까. ‘어~ 어제 안 숙였잖아.’ ‘어~ 그때도 안 숙였잖아.’ ‘어~ 그때도 안 숙였잖아.’ 그것 때문에 안숙인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이거야. ‘캬~ 안 숙였으니까 나는 안 돼는 거야.’ 이게 아니라. ‘어~ 정말 내가 안 숙였네.’ 자전거를 타니까 넘어지는 것처럼 ‘숙이겠습니다’ 하는 기도문이 있으니까 안 숙여지는 자기를 안다 이거야. ‘자전거 안타지는데요’ 이 말은 이 사람 자전거 타려고 시도 하고 있다는 거요? 안하고 있다는 거요? 하고 있다는 얘기야. 자전거 안타고 있는 사람은 안타진다는 얘기도 안 해. 1656

‘아~ 저 안 되는요’ 이 말은 지금 하고 있는 중이다 이 말이오. 그런데 처음에는 내가 왜 숙여야 되는지 내가 뭣 때문에 숙여야 되는지. ‘지가 나한테 숙여야지 내가 왜 지한테 숙이냐?’ 이런 식으로 그저 기도는 해도 반감만 생긴다 이거야. 입으로는 ‘숙이겠습니다’ 해 놓고는 속으로는 ‘내가 뭣 때문에 숙여. 기도문이 내꺼 아니야. 남편거야.’ 이러면서 내 반감만 생기다가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어쨌든 안 숙여 지는 자기를 보게 된다. 숙이는 거는 고사하고 안 숙이는 자기도 모르다가 한참 지나야 ‘야~ 난 진짜 하루에 한 번도 안숙이네.’ 그럼 자기도 문제의식이 좀 있잖아. 어떻게 자기가 백번이면 백번 다 잘할 수가 있어.

그런데 한 번도 안 숙이는 자기를 보게 된다. 이거야. 그러면 조금 나도 좀 문제가 있는 거 같다. 이렇게 자각이 되는 거요. 그러면 한번만 숙여. 하루에 한번이라도 숙여 봐야지. 그런데 우리는 어떠냐? 평소에 남편이 아내한테 좋을 때 잘 숙여지죠. 좋을 땐 나도 잘 숙여. 그런데 숙이겠습니다. 이건 안 좋을 때를 말하는 거요. 안 좋으면 숙이나? 안순이나? 안숙이지. 좋으면 기도문 없어도 수행 안 해도 다 숙여. 나도 기분이 좋으면 조그마한 애한테도 숙인다니까. 나도 기분이 좋으면 여러분들 와도 다 인사해.

그런데 기분이 딱 나쁘면 오든지 가든지 인사해도 안쳐다 보고 그냥 가버린다니까. 그러면 기도문은 안될 때를 기도문이라는 게 필요로 하지 되는 거는 기도가 아니오. 수행도 아니고. 그건 저절로 되는 거요. 좋으면 다 저절로 되는 거다. 그런데 여러분이 기분이 좋아가지고 스님 오늘 기분이 좋아 108배 하라는데 300배 했습니다. 그건 수행이 아니야. 기분이 좋으면 누구나 다 하는 거요. 그건 뭐같냐? ‘스님 오늘 술 한 잔 먹고 아가씨가 하도 잘해서 팁을 십만원 팍 줬습니다.’ 이거나 똑같은 얘기요.

그건 보시가 아니오. 아시겠어요? 보시가 아니라니까. 그 기분이 좋아서 자기 기분풀이 한 거에 속한다 이거요. 기분이 나빠서 줄려고 가져갔던 돈도 호주머니에 팍 집어넣어 와 버렸어. 이런 식으로 안 될 때 기도문이 생각이 나가지도 배 풀겠습니다. 하는 기도문이 생각이 나가지고 ‘오 베풀어야지.’ 안될 때 기도문이 작용을 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안 될때는 생각이 나나? 안나나? 안나. 안될 때는 생각이 안나. 그런데 여러분은 기도할 때 ‘숙이겠습니다.’ 하면 자기가 기분이 좋아 남편한테 숙인 거. 그걸 뭐라고 한다? ‘아 어제는 두 번 숙였다.’ 이러면 그건 공부가 아니야. 기분이 나빴을 때도 숙였느냐? 이 문제란 말이오. 왜? 기분이 나쁜 게 안숙이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 이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