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윤홍식_깨어있음

[홍익학당] 거경과 궁리로 성인에 이르는 길

Buddhastudy 2018. 6. 26. 21:16



자꾸 정신을 차리고 있는 상태죠. 정신을 자꾸 차려야 됩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차려야 되요. 이게 점 하나 찍는 거예요. 시간은 흐르는데, 순간순간 요기서 점찍었다고. 과거 점이죠. 지금 또 찍어야 되요. 또 과거가 됐죠. 여기 또 찍어야 되요. 매 순간 순간 여기에 점을 찍고 사는 게 우리 인생이죠.

 

그런데 그 순간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있겠다는 겁니다. ‘몰라 괜찮아는 잡념에 휘둘리지 말고 순간순간 내 정신을 지금 여기서 잡고 있겠다. 잡아야 전후좌우가 중을 잡을 수 있거든요. 정신을 차려야 전후좌우의 중심을 잡지, 여기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면 중심을 못 잡습니다. 그렇게 또 시간 흘려보내고 흘려보내고 하면서 우리가 계속 잘못된 선택을 자꾸 하게 되죠.

 

후회할 만한 선택을 하게 되니까, 인생이라는 건 선택의 연속인데, 순간순간 돌아봐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 가는 것. 정신 찾고. 정신 차리고 그 자리에서 가장 양심적으로 자명한 것, 덜 찜찜한 것, 택하고, 정신 차리고 택하고, 그게 몰라와 자명, 몰라와 양심. 다해서 양심인데요, 양심 잘하자는 거죠.

 

이게 지금 우리 동양고전에서 중용 내용입니다. 중용이라는 게 이겁니다. 순간순간 시공을 초월한 중, 이 중은 다 똑같은 자리입니다. 그래서 여기 시공이 없다는 거예요. 언제든지 정신 차려보면 그 자리에요.

 

그런데 이 주변 상황은 늘 다르죠. 내가 처한 상황들. 그래서 그 처한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중심. 가장 적절한 모습을 취하는 거랑, 거죽으로 가장 적절한 모습 취하는 거, 속 알맹이에서 시공 없는 우주적인 중심 잘 잡는 거. 이게 다입니다. 사는 얘기에요. 죽으면 죽은 대로 살면 산대로.

 

내가 어디 가 있건, 우리도 어디가 있을지 모르죠.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 또 다른 세계 가 있겠죠. 거기서 정신이 있으면 정신 차리고, 전후좌우 돌아보고 중심잡자. 이게 그러니까 생사를 통해서 중용하면 인간이 할 일은 다 얘기해 놓은 겁니다. 인간이 뭐하고 살아야 되는지. 동서양 모든 경전이 여기서 떠나지 않고요.

 

유교건 불교건 기독교건. 제가 주로 얘기하는 대승적인 사상들. 제가 좋아하는 유교. 기독교. 불교 중에서도 대승불교. 제가 요걸 강조합니다만, 요 내용들은요 다 똑같은 걸 담고 있어서 그래요. 시공초월한 자리, 성령, 불성, 고자리. 우리 민족 철학에는 동학이나 대종교 철학 있죠.

 

내 안에 하느님 늘 모시자, 하느님 모시고 살면서 동학의 시천주가 그거죠. 하느님들 모시고 살면서 늘 그때그때 좋아해 최선을 다해서 참가하자. 최선을 다해서 참가하자. 그럽니다. 최시원 선생이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풀 때 하늘님을 모시고 그 조화에 참가해서 참여하자. 나도 꼭 참여하자.

 

지금 여기 여러분 사는 게 그냥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우주의 한 모습이잖아요. 우리도 우주의 한 분자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하고 이게 우주의 한 사건이죠. 우주의 사건이 계속 펼쳐지는데, 그 사건을 펼쳐내는 주체가 정신이 없으면 사실은 무슨 작품이 나올지 모르는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는 건데.

 

그 순간 시공을 초월한 그 정신을 차려서 요 자리에서 자명한 거, 자명한 거, 계속 만들어가는 거. 요게 제 작품이고. 그렇다고 너무 빡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우리 인간이 한계가 있으니까, 제가 어렸을 때 희망이 되는 말씀이 이거였어요. 봉우선생이 써놓은 족자에 이런 글이 있더라고요.

 

然然勿勿연연물물

이 첫 부분이 탁 마음이 들었어요. 그럭저럭 살자. 그렇게 그렇게 살자. 세상 사는데 너무 내 뜻대로 되지도 않고, 내가 아등바등해도 또 안 될 일은 안 되니까, 그럭저럭,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말거는 꼭 말자. 하지 말아야 할 건 꼭 하지 말자.

 

그럭저럭 이 세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통 크게 수용하면서, 또 내가 내 마음대로 안 움직인다고 해도 또 나의 한계가 있는 거니까, 수용해가면서 시대의 한계가 있고, 또 내가 잘할 것 같아도 이 시대가 원하지 않으면 안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늘 이런 제약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되, 통제할 수 없는 게 많죠. 그래서 그걸 수용해가면서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되, 내가 통제할 수 있고 내가 꼭 해야만 되고, 내 양심에 이건 꼭 해야 내가 살겠는 거, 그것은 꼭 하고 갑시다! 하는 요게 써 놓으신 거예요.

 

이거 보면서 제가 약간 힘이 빠지더라고요. 좀 힘이 쓸데없는 힘이 좀 빠졌달까요. 그렇게 살아오시고 도 닦으신 분 말씀이 그럭저럭 살아가라.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라.

 

마음 너무 조바심 내지 마라.

마음만 바쁘지 그렇게 되는 거 아니다.

 

? 이 우주는요, 저만 수를 놓나요? 여러분도 수를 놓죠. 우주의 구성원들이 다 수를 놓아서 만들어가잖아요. 나 혼자 아무리 우주를 잘 경영할 것 같아도, 다른 사람들이 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안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모두가 같이 수를 놓는 이게, 나랑 동등한 또 다른 나들이 다 동등하게 수를 놓고 있고, 한 나라로 치면 동등한 주권자들이 있거든요.

 

지금 5천만의 주권자들이 이 나라를 같이 경영해 가는데, 내 마음같이 안 된다고 일희일비하고 있으면 그거는 못할 노릇이죠. 그래서 더더구나 도를 닦고 시공을 초월한 자리에 뿌리를 두고 살아간다는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 되니까,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양심에 어긋나는 짓만 하지 마라. 요런 가르침으로 저는 받아들였어요. 그 말씀도 하나 전해드리고.

 

지금 몰라 하시고 괜찮다 하시고 잡념에 휘둘리지 않게 정신만 잘 모으고 계시면 잘하시는 거예요. 우리 조선 500년간 선비들이요, 공부 제일 잘한 선비들이 제일 잘하신 게 그거에요. 정신 차리기. 이게 유교에서 경이라고 하죠. 정신 차리기. 경이 정신 차리기 하는 겁니다.

 

원래 경이 경천할 때 쓰죠? 하늘님 앞에 있는 마음이에요. 여러분 지금 앞에 하느님 계시다고그러면 감히 우리가 딴 생각 하겠습니까? 사실 직장 상사 앞에만 불려가도 정신이 하얘지는데, 임금 앞에 가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 앞에 가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마음으로 항상 선비들이 추슬러요.

 

혼자 있어도 화서 이항로 선생 문집에 화서아언華西雅言 이라는 글에 제가 최근에 페북에 올려드렸는데, 이 말이 있어요. 남이랑 있을 때는 대게 깨어 있다가 혼자 있을 때 탁 풀어지잖아요. 당연한데, 그렇게 풀어지는 것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하느님 공경함보다 더 한 거다.

 

남들 있을 때 깨어 있다가

근엄한 모습 취하다

아무도 안 보면 풀어진다.

 

사실 아무도 안 볼 수는 없거든요.

하느님이 보고 있거든요.

 

하느님 볼 때는 풀어지고

사람이 볼 때는 깨어있으면

경천보다 경인이 더 한 거다.

 

요런 말씀 하신 게 있어요. 맞죠. 남을 더 공경하죠. 사람이 더 무섭지 하느님은 안 무서운 겁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선비들은 늘 깨어 있으려고 했어요. 왜 깨어 있느냐? 자기 마음 안에서 욕심과 양심이 계속 싸우고 있으니까, 내가 깨어있어야 양심 편을 들어주니까, 깨어있어야죠.

 

화서선생이 하신 말씀이 화서아언이라는 글이 있는데, 좋아요. 그래서 제가 군대있을 때도 훈련받는 중에도 제 친구한테 보내달라고 해서 몰래 우편봉투로 받아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거기 있던 구절들이에요. 방금 이런 말씀하고 또 이런 말씀도 있어요.

 

깨어있으면 모든 선이 발생하고

경하지 못하면 모든 악이 발생한다.

 

선비들이 얼마나 경을 중시했는지 아시겠죠. 또 이런 얘기도 있어요.

 

내가 깨어있으면

내 마음 안에 인의예지의 위치랑 이 이치가 밖으로 나오는데,

깨어 있지 못하면

이 이치랑 내 마음이 아무 상관이 없어진다.

 

그러니까 깨어있으면 인의예지의 원리랑 내가 접속이 되고

깨어있지 못하면 접속이 안 된다.

 

이런 얘기가 아주 재미없어 보이는 선비들 문집에 다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500년간 명상의 달인들이에요. 경은 명상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다 잊어버리고 갑자기 서양에서 어디서 유명한 명상법이 있다더라.’ 배우러 다니는 요 실정도 안타깝죠. 제가 봤을 때.

 

예전에 조선선비들에게 배우는 마음 챙김의 책 낼 때, 명상을 왜 자꾸 밖에서 배워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제일 잘하던 거예요. 우리나라가. 잊어버렸죠. 경 그러면 완전히 낯설죠. 그래서

 

선비들은 경하나 붙잡고 갑니다. ?

내가 깨어있으면

내 안에서 인의예지의 양심이 나와요.

깨어있지 못하면 안 나와요.

딱 이거에요. 간단하게.

 

내가 깨어있으면

나 이상의 힘이, 하나님의 힘이

그 지혜가 나를 통해 나오고

깨어있지 못하면

내 욕심에 막혀 버립니다.

 

내가 깨어있다는 것은 불교에서도 깨어있다는 것은 선정인데, 선정이 첫째로 갖춰져야 육바라밀이 터져 나옵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육바라밀 안 나옵니다. 아무리 좋은 내 안의 본성에 좋은 덕들이 있더라도 깨어있지 못하면 밖으로 안 나오기 때문에, 명상을 강조하고 선정을 강조하고, 깨어있으면 강조합니다.

 

초기불경에도 보시면 석가모니가 제일 강조한 게 깨어있음입니다. 다른 것들은요, 때에 알맞게 하면 그만이지만, 석가모니 말씀에 깨어있음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무리 깨어있다고 해도 이게 부족하지 않아요. 살아있는 동안 계속 정신을 몰라 괜찮아해서 내려놓는 거죠. 내려놓고 정신 차리고. 내려놓고 차리고.

 

그전에 쥐고 있는 게

별게 아니라는 것을 놔봐야 알아요.

쥐고 있을 땐 그게 보물 같아요.

놔보면 참 저걸 내가 왜 들고 있었지합니다.

 

순간순간 우리 마음이 잠깐 맑은 것 같아도

금세 또 뭔가 쥐고 있어요. 잔뜩.

그것도 몰라하고 내려놓고 나면,

그럼 또 몸이 가벼워지고 나면, 아까 무거웠다 하는 것을 알아요.

계속 이렇게 내려놔야 내 안에서 양심이 자동으로 활성화 됩니다.

 

그때 조금만 거들어주면 나오는 거예요. 인의적으로 인의예지를 끌어내시는 게 아니고, 깨어있으면 내 마음에서요, 인의예지의 원리가 활성화 되요. 나를 통해 드러나려고 그래요.

 

여러분, 당장 여기서 욕심 부리고 있다가 몰라하면요, 초연해지고 그 욕심나는 물건이 좀 덜 자극적으로 보입니다. 당장에. 기적이죠. 당장에 마음이 더 여유로워지고 사리판단이 더 자명해져요. 요게 깨어있기만 했는데 일어납니다. 이게 잘 갖추어지다가 깨어있기만 해도 양심이 육바라밀이 원만하게 나오는 경지가 되면요, 아주 제대로 보살이나 군자 입문했다 하는 거고, 그 전에는 찰나찰나라도 그런 맛을 자꾸 내어보려고 노력하시면 충부해요. 자꾸 하다가 터지는 거니까.

 

그런데 제가 그 희망가지시라는 게, 지금 여러분 그 참나나 그 양심이 성인의 양심, 성인의 참나랑 부처님의 참나랑 지금 우리 참나랑 똑같습니다. ? 거긴 시공을 초월한 자리라 변할 수 없는 자리거든요. 지금 똑같은 게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신만 차리고, 양심에 최선만 다하면 이 순간에 부처님처럼 성인처럼도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거예요. 지혜를 끌어다 쓸 수 있다는 거예요. 지금. 안 된다는 말을 하실 수가 없어요. 그건 자기 안에 있는 불성을 모독한 거예요. 불성은 전지전능 한 거예요. 다만 내가 막고 있어서 못나오는 거예요.

 

깨어있으면 막던 장애가 치워지니까 나오는 겁니다. 그래도 내 역량의 한계가 있다 보니까 분명히 제한된 모습으로 나오겠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부처님 안에 있는 그 능력과 지혜가 내 안에서 들썩하면서 나온다는 거예요. 그것을 나는 끌어다 쓰기만 하면, 내 이상의 작품들 공덕들을 지을 수 있다는 그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늘 깨어서 늘 정신 차리고 있으면서 전후좌우를 돌아보면서 깨어있으시되, 요거는 우리가 몰라로 대표하는 거지 꼭 몰라만 해야 된다는 게 아닙니다. 몰라라는 건 판단 중지를 상징하는 거예요. 판단 중지하고 깨어나시면 시공을 초월하고, 생각을 초월하면 시공을 초월하는 거예요.

 

?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은 생각의 세계에 있거든요. 여러분 판단 중지에 들어가시면 과거현재미래 판단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해요. 깨어계시면서 전후좌우 돌아볼 때는 생각을 써서 어떻게 쓰느냐? 자명하면 하고, 찜찜하면 하지 마시라는 거예요. 양심의 소리에 최선을 다해 귀를 기울이면 사리가 보이죠.

 

내 양심이 자명하다는 건, 내 양심이 뭘 좋아하는 지에요. 자명하다는 건 양심이 좋아하는 겁니다. 찜찜하다는 건 양심이 꺼려하는 거예요. 그런데 평소에 깨어있지 못하면 내 욕심이 좋아하는 거, 내 욕심이 싫어하는 것이 잘 보이죠. 깨어있으면 내안에서 양심이 작동을 하니까. 왜 양심이 전지전능하다고 전제해야 하냐면요, 여러분 욕심은 뭘 원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다 얘기합니다.

 

그런데 양심은요, 양심은 얘기하는 게 잘 안 들리시죠. 그런데 몰라하고 우리가 내려놓고 나면 우리 양심이 드러나요. 그때 이 야심이 뭐가 옳은지, 뭐가 그른지 다 얘기해줘요. 다 알고 있어야 되요. 양심은. 그러니 여러분이 양심만 따라가면 답을 찾을 수가 있는 겁니다. 양심이 원래 모자르다면 여러분 공부를 할 수 없어요.

 

양심이 답을 못 찾는다. 양심이 자명하다고 하는 거 해봤더니 다 엉터리더라. 그럼 이 공부는 불가능한데, 예전 어른들이 왜 가능하다고 주장했느냐? 우리 안의 양심은 답을 알고 있더라는 거예요. ? 거기는 시공을 초월한 우주의 근원자리라 우주의 모든 근원적인 정보를 다 갖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답을 알고 있더라. 뭐가 옳은지 그른지 다 알고 있더라. 이걸 믿어라. 제가 말씀드릴 수가 없고 체험을 해보시라. 실험을 해보시라.

 

진짜로 몰라하고 내 욕심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 내면에 있는 그런 순수한 의식이, 순수한 마음이 좋아하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가 봤더니 진짜 길이더라 하면, 내가 상상도 못했던 길이 열리더라 하면, 제 얘기가 입증이 되는 거고, 가봤더니 더 삶이 엉망진창이 됐다 그러면 이 실험의 결과가 안 좋게 나오는 거예요. 실험을 해보시라. 실험을 권해드리고.

 

역대 실험해서 성공하신 분들의 얘기를 드리는 거예요. 저는. 그런데 그 얘기들이 다 공통적이더라. 우리 안에 육바라밀이 있더라. 성공한 보살이 주장하는 겁니다. 성공한 군자가 주장합니다. 내 안에 인의예지 있더라. 성공한 사도들은 뭐라고 하나요? 내 안에 성령의 법이 다 들어있더라. ‘다 있더라.’ 하는 거예요.

 

그 분들도 해보고 하신 얘기니까, 우리도 해보면 되죠. 똑같은 조건으로 실험해 보면 아실 수 있죠. 그래서 정신 차리는 게 지금 중요합니다. 정신 차려야 여러분 이상이 되요. 정신 안 차리고 있으면 우리는 고정 관념 덩어리, 아집 덩어리들끼리 모여서 놀고 있는 거예요. 서로. 그럼 서로 대게 불편하겠죠.

 

고집덩어리 편견덩어리가 다 모여서 몰라하고 깨어나는 순간 이 모임이 아름다워집니다. 이게 성령이 강림한 거고, 깨어있는 거고, 우리 양심을 따르는 거죠.

 

양심의 인도를 받는 순간

우리는 우리 이상의 존재가 되요.

우주적인 존재가 되요.

그 안에서는 하나가 되요.

 

우리가 다 분열된 존재인데, 보세요. 물고기, 산호초, 생명체 온갖 것들이 바다 안에서 하나가 되죠. 진리의 바다 안에 들어오면요, 우린 다 하나가 됩니다. 양심의 바다 안에서. 그래서 우리가 몰라해주면 우리가 하나가 되고요,

 

몰라를 못한다. 내려놓지 못하겠다. 내 에고 너무 소중하다. 내가 가진 지식 너무 소중하다. 내가 성공해야 된다. 나는 나를 제일 사랑한다. 요 마음을 너무 갖고 있으면 우리는 분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가 될 수 없어요. 우리도 하나가 못 되었는데 우주랑 어떻게 하나가 되겠어요.

 

그런데 그 법이 있어요.

몰라하고 내려놓는 순간

내가 우주고, 우주가 나죠.

경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법을 꼭 챙겨 쓰시라.

 

제가 하나 도움 드리려고요, 요거 좀 읽어드릴게. 율곡선생이 젊었을 때 퇴계선생님 찾아가서 질문도 하고 그랬어요. 그 문하생에 이름이 있어요. 서원에 방문해서 머물면서 질문도 하고 그랬어요. 서로 공부에 대해서 토론하고 그랬어요. 공부를 도와줬어요.

 

그런데 보낸 편지글이에요. ‘이숙환한테 답하다.’ 율곡선생이 질문했는데 답한 내용인데, 제가 이거 너무 좋아해서 가끔씩 읽어드렸어요. 오늘 생각이 나서 좀 뽑아왔습니다. 또 한 번 읽어드리려고. 지금 여러분들 들으시면 좋을 거 같아서 늘 깨어서 늘 자명한 생각. 몰라하시고 몰라에서 그냥 나오지 마시고, 그렇게 정신이 깨어있을 때 자명한 생각 하나라도 하고 나오시는 게 무조건 남는 장사입니다.

 

몰라에 들어갔다 그대로 다시 나오면 별로 생각이 안 바뀌어요. 업장이 안 털려요. 그런데 몰라라는 상태라는 건, 깨어있는 상태라는 건 업장 털기 제일 좋은 상태인데, 이때 그냥 나오지 마시고, 그 깨어있음에 여운이 가시기 전에 그때 자명한 생각하기가 좋아요. 양심에 자명 찜찜의 소리가 그때 잘 들려요. 그때 평소에 묵은 선입견이나 답답했던 고민 꺼내서 한번 검토해보시는 게 좋아요. 이게 자명한 말인가 찜찜한 말인가.

 

그러면 평소에 내 선입견으로는 당연히 맞다고 할 일을요, ‘몰라해서 한번 선입견의 옷을 벗고 있는 거거든요. 선입견의 옷을 벗고 내 손에 쥔 거 다 내려놓은 상태에서는요, 다른 판단이 납니다. “요거 조금 이상한데?” 이런 게 보여요.

 

평소에 거부했던 생각이 저게 더 자명한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나요.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생각을 못하세요. ? 뇌가 자동으로 이건 옳다. 자동으로 이건 찜찜하다고 해버려요. 욕심이 주장해서. 양심의 소리 들을 새가 없어요. 그런데 내려놓고 나면 들립니다.

 

이 공부가 더 큰 공부에요.

절에 가서 화두 하다가 깨쳤다. 견성했다.

이런 거 원하시죠.

한방에 부처되는 거.

 

제가 어제도 성철스님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 한방에 부처된다는 얘기를 자꾸 하시니까.

그런 건 없어요.

 

그걸 증거하시는 게 본인이에요. 성철스님이 부처님입니까? 그분의 언행이 육바라밀에 다 맞았나요? 인간이 그건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꾸 닦여갈 뿐이에요.

그러니까 한다 안한다는 말도 그것도 부질없는 소리에요.

 

나날이 나아지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인간은 그게 최선이에요.

어떤 인간이 나날이 나날이 나아지고 있다.

그분 장난 아닌 거예요. 큰 도인이에요.

 

일반적으로는 나날이 안 나아져요.

나날이 보통 더 안 좋아져요.

 

본인은 나날이 나아진다고 믿겠지만,

주변 반응을 보면 나날이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현상유지라도 하고 있다면 되게 열심히 노력하고 계시는 거예요.

 

냉정해요. 그게 형이하의 세계에서, 세간의 세계에서 보여줄 수 있는 덕이에요. 출세간의 도는 영원불멸이지만, 세간의 도에서 보여주면 꺼내놓으면 덕이 되요.

 

출세간의 인의예지를 밖에 꺼내놓으면

덕이 되요.

출세간의 인이라는 우주적 추상적 정보를

밖으로 내가 사랑이라는 것으로 구현하려면

생각, 감정, 언행, 다 총동원해서 만들어내야 되요. 그 작품을.

물현시키는 거예요. 사랑을.

 

그걸 여러분도 보고 저도 알게 사랑을 구현해 보는 거예요. 정의를 구현해 보는 것. 보시를 구현해 봐요. 지계를 구현해 봐요. 인욕을 구현해 봐요. 반야를 구현하려면요, 경전 놓고 다 풀어낼 수 있어야 되요. 반야를 구현한다면. 속에서만 너무 자명해요. 참나만. 물어보면 하나도 몰라요. 그러니까 뭘 해요 결국? ‘모른다만 하고 있는 거예요. 물어보면 자기도 답답해지니까. “묻지 말라.”

 

반야바라밀을 구현해 내려면 속에 진짜 지혜가 있다면 꺼내 쓸 수 있어야 되고 지금 여기서 풀어놔야 되요. 어렵다는 경전 다 시원하게 만들어놓지 못하면 반야가 없는 겁니다. 참나한테는 있겠죠. 도의 세계에선 있겠죠. 덕의 세계에서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나를 통해 덕으로 구현 안 된다.

그러면 나한테 없는 거예요.

 

구현이 되지 않는 거는요, 말할 수가 없어요. 참나 안에는 무량공덕이 있겠죠. 문제는 나를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지. 그게 내가 닦은 만큼만 드러나요.

 

내 안에 전지전능한 부처가 있어도

내가 닦은 만큼만 드러납니다. 덕으로.

그래서 그 사람 덕 수준이 그 사람 영성수준이에요.

 

그 사람이 어디까지 인의예지를 소화하고 있나?

육바라밀을 어느 정도로 소화하고 있나가 그 사람의 영성이에요.

 

그런데 저는 그 차이가 있건 말건 신경 쓰지 말고, 매 순간 깨어서 드러내려고 노력만 하다보면 그 순간만큼은 부처님 안 부럽게 우리가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 매일

매 순간 깨어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게

최고의 공부이지

 

어느 한 순간에 도통해서 부처가 된다.’ 이런 소리를 하시는 한에는

그 분은 제대로 깨달으신 게 아니에요.

깨달음을 자꾸 왜곡 시키시는 거예요.

 

제가 선비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유가 선비들한테는 견성이니 하는 그런 황홀한 체험 얘기가 없습니다.

? 죽을 때까지 그냥 하는 거예요.

 

깨어서 중 잡고, 깨어서 중 잡고, 언제까지요?

마지막 까지요.

죽을 때까지 깨어있어야 되요.

죽을 때까지 깨어서 자명하게 살다 가는 게 다에요.

 

그 과정에서 무한한 진보를 하죠. 그래도 어제까지 최선을 다해서 내가 남들이 볼 때 완벽한 경지 같다고 불려도 본인 입장에서는

 

오늘도 여기서 최선을 다할 생각만 하는 겁니다.

내가 뭘 이뤘네 하는 것도 없어요.

이게 진짜 공부입니다.

 

그래서 제가 선비들을 좋아하고, 예전에 아무리 봐도 유교선비들 공부법이, 선비들 자체가 대단하다보다 유교선비들이 공부법이 제가 볼 때는 옳다. 나중에 보니까 그게 대승보살의 길이었던 거예요. 그때는 유교 선비의 길이 분명히 옳다. ? 불교에 가서 들어보면 다 한방에 견성하는 얘기만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봐선 아무리 봐도 유교선비의 길이 맞아요. 중용의 길이. 이 얘기는 일찍이 제가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대승보살의 길이 이거였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가르쳐줬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그때만 해도 저 길은 유교에만 있나보다라고 생각했어요. 얘기를 안 해주니까. ? 다 한방에 부처되는 얘기만 하니까. 요 생각 하고 있을 때쯤에 아무리 봐도 유교의 저 길에 진짜 뭐가 있는데.’ 같이 공부하는 분들에게 놔눠 봤더니

유불선이 다 똑같지. 유교가 더 특별히 나을 리가 있나.” 하는데, 당시 선비들 문집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이 길이 중용의 길을 얘기하는 게 제일 대승적인 거 같은데.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하고 제일 맞는데.’

 

세상을 초월하지도 그렇다고 세상에 빠지지도 않고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서 경영하는 이 모습,

이게 뭐 있는데 해서 제가 궁금해 하던 차에

어떤 같이 공부하던 도반이랑

나는 분명히 유교의 선비들의 길에 뭐가 있다고 본다.” 이 얘기 하다가

93년도 스승의 날에 봉우선생님이 계룡산에 고향에서 병 치료하고 계실 때였어요.

 

내려갔는데, 스승의 날이라고 행사를 하는데, 2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1층에서 누워계시던 선생님이 몸 쓰기 불편하신데 겨우 올라오셨어요. 딱 올라오셔서 겨우 자리에 앉자마자 오래 계실 그런 상황도 아니었고, 갑자기 이 얘기만 하시는 거예요.

 

우리 선조들이 유교를 중시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쨌거든 유교를 많이 공부하십시오.” 그 얘기만 하고 내려가셨어요. 제가 그때

, 이게 맞다. 뭔가 분명히 이 감이 맞다.”

 

그랬는데도 저도 또 헤맸죠. 맞는데 저도 제가 그걸 구현한 게 아니니까. 감으로는 분명히 이 길이 맞는 길 같다. 그런데 그 게 저도 견성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이 그 감만 가지고 얘기할 수 없으니까, 그 뒤로 견성이라는 것도 해보고, 제가 하나하나 해보고 나서 나중에야 진짜 맞았구나하는 것은 그러고 한 10년 뒤에요. 그때 분명히 그 감이 맞았구나하는 기억은 지금도 생생해요.

 

왜 그랬냐? 선비들 글을 읽다보니까 느낌이 자꾸 오는 거예요. 이 길이 진짜인데, 왜냐하면 진짜 양심의 순수한 거예요. 그냥 제가 봤을 때. 벌써 정토 나오고 천국 뜨고 하면요, 욕심이 벌써 요동합니다. 천국도 이왕이면 노른자 로얄석에 가야 될 거 같고, 이런 마음들이 요동을 해요. 뭔가 불순물이 자꾸 껴요. 얘기 중에. 열반도 그래요. 열반에 들어서 사라지자. , 나는 뭔가 우리 양심이라는 게 그런 물건이 아니라 더 엄청난 답을 갖고 있는 거 같거든요.

 

그런데 어느 정도 닦다가 이 우주에서 사라져야 된다.’ 이것도 양이 안 차구요. 욕심 적으로 우주에서 사라지기 싫어서도 있겠지만, 뭔가 우리 양심이라는 게 진리의 보고인데, 우주를 다 경영하고 구원할 수 있는 답을 가진 그 양심을 얻었는데, 나는 그 열반에 들겠다. 이것도 안 맞는 소리 같고.

 

그래서 선비들 글을 좋아했습니다. 하나 읽어드릴게요. 잘 아시는 걸 거예요. 조선선비들에게 배우는 마음 챙김의 지혜그 책에도 제가 실어 놨었구요, 그 책이 지금 절판됐죠. 제가 올해 안에 꼭 내드릴게요. 조선선비들에게 배우는 제목은 철학의 지혜나 바꿀 거예요. 왜냐하면 그때는 조선선비들도 명상 잘했다.’ 이 얘기를 전하려고 책을 썼고, 이번에 전면개정을 해서 조선선비들한테 배워야할 양심철학에 포인트를 두고 다시 써서 제가 지금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내 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리시고. 왜 내달라는 말씀을 아무도 안 하세요? 하하하. 좀 해주시면 더 분발하겠습니다.

 

아무튼 퇴계선생님 글 한번 읽어드릴게요.

공부에 제일 요결이 어느 종교나 똑같습니다. 기독교는요, 기도와 지혜에요. 기도하면서 말씀을. 결국 기도와 말씀이죠. 기도를 통해 성령을 만나고 성령 속에서 말씀을 이해해야 되요. 그래야 우리가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거든요. 기도를 통해야 성령을 만나고, 이 공식이 똑같습니다.

 

대승불교. 대승불교는 뭐라고 하죠? 선정과 지혜, 정혜쌍수라고 하죠. 늘 깨어있고 늘 우주의 진리를 꿰뚫어볼 수 있으면 보살입니다. 그냥. 이게 됐는데 실천이 안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것만 얘기하는 거예요. 실천이 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결국은 실천이 되어야만 덕이죠. 덕을 구현하려면 반드시 깨어있으면서 지혜를 알고 있어야 되요.

 

덕이 운전을 잘하는 거라면 운전을 잘하려면 필수로 운전자가 깨어있고 네비가 켜져 있어요. 그래야 굴러가거든요. 그러면 굴러가는 거예요.

 

, 그런데 유교는 뭐라고 하냐? 거처할 거, 경에 아예 들어가 살아라_거경. 그리고 궁리_공부해라. 연구할 궁, 원리 리. 진리. 뭐가 더 자명한지, 뭐가 찜찜한 건지, 뭐가 선인지 뭐가 악인지 분명히 알아내라. 두 개입니다. 지혜와 깨어있음.

 

몰라를 통해 늘 깨어계시면서 이 양심노트를 통해 뭐가 자명한지 찜찜한지 계속 분석하시면,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이미 보살이고, 군자고, 사도에요. 사도가 되는 법이고, 보살이 되는 법이고, 군자가 되는 법입니다.

 

실제로 예전 유물 중에 박물관에 가보시면 사도들을 조각해 놓은 게 있는데 사도 두 개의 조각상이 있어요. 외국에. 하나는 기도하고 있어요. 기도. 하나는 성경 보고 있어요. 말씀. 기도와 진리. 기도와 말씀.

 

, 선비들은 궁리와 거경이 핵입니다. 똑같아요.

정혜쌍수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불교신자들은.

 

퇴계선생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 차이는 뭐냐? 한방에 부처되는 걸 구하지 않아요. 그래서 실제로 스님들이 공부하다가 , 깨달았다.” 하는 것을 유교선비들이 볼 때는요, ‘잠깐 헛것 봤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실제 그 말이 맞아요. 왜냐하면 대승기신론에서도 정확이 얘기해요. 공부하다가 참나를 만나요. 깨어있는 상태가 참나거든요. 그럼 이게 공적영지 그러죠. 텅 비어서 신령한 알아차림. 유교에서는 똑같이 허령지각이라고 그래요. 허령지각이 내 안에 선명이 있다는 거 알아냈다고 해서 견성했다고 유교는 생각을 안 해요.

 

유교는 내 안에 인의예지 있다는 걸 알아내야지 궁리에요. 거경하면 우리 안에 있는 허령지각이 드러나요. 그 다음에 궁리를 통해 내 안에 인의예지의 진리를 선명히 있다는 것을 알아내어서 어떤 일이 닥치건 선악을 판단할 수 있어야지, 지혜에요. 그런데 이게 내 안에 본성을 안 거에요.

 

그런데 텅 빈 본성, 순수의식만 알았다고 견성이라고 생각을 안 해요. 그러니까 스님들이 보통, 요거 보고는 오도송을 읊거든요. “내 안에 참나가 있더라.” 이게 대승불교식으로 말하면 이 안에 육바라밀이 있어야 되요. “육바라밀이 있더냐?” 하면 육바라밀, 아 있더라.” 있다고만 하지 하지는 못하죠. 그것을 헛것 본 상태, 그림자 본 상태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대승기신론에서 요거 본 상태, 선정과 지혜 닦다가 공적영지 알아냈다고 그러면 1주보살이라고 그러고, 법신을 조금만 봤다고 그래요. 그리고 내 안에 육바라밀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했을 때, 진여법성을 정확히 알았다고 이때부터 1지보살 그럽니다. 1지부터는 법신보살이라고 불러져요. 1주는 법신을 조금밖에 못 봤다 그래요.

 

그런데 유교는 이것을 그림자 봤다고 그러고, 인의예지를 알았을 때 견성이라는 말 대신 유교에서는 맹장의 지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성을 알았다 그래요. 그런데 유교는 본성을 아는 게 별게 아니에요. 당연히 알아야 되는 거고, 본성 안 뒤에 뭐가 중요하냐? 솔성이라고 본성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해요.

 

그러니까 본성 알았다고 환호하고 이런 게 없어요. 유교선비들은. 그냥 기쁘죠. 퇴계선생도 오도송 써 놓은 게 있어요. “, 내 안에 태허가 있구나. 이치가 있구나. 도리가 있구나.” 그런데 죽을 때까지 조금도 방만해지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날마다 점을 찍고 살아야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이게 뭐 자랑하는 것도 그 순간이지 오도송 쓰고 그때 기분 좋지, 다시 현장으로 바로 투입인 거예요. 벌써 바로 와이프랑 서로 한번 말싸움 하고 나면 황망해지죠. 깨어있는 것도 황망하고. 다시 정신 차리고, 인의예지 분석해서 어떻게 사과할 건지, 이 과정을 어떻게 끌고 갈 건지 다시 답을 내야 되고, 순간순간 도를 써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다보면 자꾸 지혜가 깊어져서 우주가 선명하게 인의예지 이치로 보입니다. 유교선비들도 인의예지라는 십자가로 우주를 꿰뜷어봐요. 그 얘기를 담은 거예요. 제가 사전 설명이 너무 길었습니다. 바로 원문 볼게요.

 

/궁리, 사물의 원리를 연구함과 거경 깨어있음에 거함./ 깨어있음에 안주함은, 2가지 공부는 서로 머리와 꼬리가 된다. 이게 불교로 봐도 똑같아요. 선정이 지혜를 낳고, 알면 안정이 오고, 안정되면 진리가 알아져요. 이게 함께입니다. 깨어있으면 진리가 보이고, 진리를 알면 깨어있게 되요.

 

반대로 진리를 모르면 의식이 흐려집니다. 제 강의 중에 제일 어려운 강의 틀어놓고 한 5분 들으시면 의식이 아마 혼절하실 거예요. ? 정보가 하나도 안 오거든요. 그런데 들을수록 자명한 말을 듣잖아요. 되게 깨어나요. ? 할 말이 없거든요.

 

옛날 선사들이 부처가 뭡니까?” “339” 자명하죠. 할 말 없으시죠. “224” 이거 몇 번 하면 머리 엄청 맑아집니다. 할 말이 없거든요.

 

할 말이 없는 지당한 말을 만나면

깨어나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깨어있으면 선명하게 진리가 보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의식은 이렇게 만들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거경과 궁리가 서로 머리와 꼬리가 되기는 하지만, 사실은 두 공부다./ 깨어있는 공부랑 진리 공부는 두 개로 봐라. 원래 하나지만. 왜냐? 깨어있기만 하고 사람들이 이치 탐구 공부를 안 할까 봐요. ‘자명 하냐, 찜찜 하냐분석은 안하고 깨어있기만 하면요, 이게 소승성자가 나오지 대승성자는 못 나와요. 명상만 잘하고 지혜는 부족한 성자가 나와요. 그러니까 군자도 마찬가지에요. 그럼 군자가 안 나오니까.

 

반드시 이 2가지 공부가 함께 가야 합니다. 이율곡 한테 하는 말입니다. 퇴계선생이.

/뒤로 미루지 마시고. 지금 이 순간부터 공부를 시작하십시오./ 지금 여기서 바로 하세요.

/이럴까 저럴까 머뭇거리지 말고 언제어디서든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힘을 써야 합니다./

 

마음이 이럴까 저럴까 따지고 계실 시간에 몰라일단 하세요.

머릿속 잡념으로 복잡해질 시간에 딱 몰라해서 정신 차리고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자명하면 하고, 찜찜하면 안하고

이렇게 거경과 궁리가 하나로 돌아가는 그런 삶을 살아라.

 

/마음을 비우고/가 깨어있고죠.

/마음을 비우고 시공을 초월한 그런 의식상태를 이루면서 내 마음에 사물의 원리를 관찰할 뿐입니다./ 이게 자명하냐? 찜찜하냐? 선이냐? 악이냐?

/절대로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됩니다./ 선입견을 몰라해버리셔야 되요. 몰라하고 있는 그대로 사물의 원리만 들여다보고 내 양심의 소리만 들어보시면 되요. 그게 하나입니다.

 

양심이 자명하다고 하면 선인 거고, 이치에 맞는 거고.

양심에 찜찜하다면 이치에 안 맞는 거예요.

사물의 원리를 들여다본다. 어떻게 들여다봅니까? 내심의 소리를 들으면서 들여다봐요.

 

실제로 여러분이 이런 책을 하나 보시죠. 맞다 틀리다 하시죠. 보면서.

으흠, 이건 이치에 맞군, 이건 이치에 안 맞군.” 결국 가만히 들여다보시면 이게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뿐이에요. 양심에서 뭐라고 그래요? 자명이라고 하면 맞다고 생각합니다. 찜찜 그러면 아니라고 생각해요.

 

결국 진리 판정을 누가 해주냐 하면

양심이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지금 말이 맞는 거 같고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라도 내가 찜찜 그러면 혼란스럽습니다. 왜 찜찜하지? 자기 설득이 안 돼요. “이 사람 유명한 사람이야.” 해도 찜찜한 걸 어떻게 해요? 찜찜 찜찜 내면에서.

 

자기 내면 설득 못하면

끝이에요.

 

그러니까 결국 여러분 양심이 자명하다고 하고 찜찜하다고 하는 그 소리를 듣고 결정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결

 

국 사물의 원리를 탐구한다는 건

내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는 겁니다.

그게 맞다고 하느냐. 찜찜하다고 하느냐.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 찾아냈을 때 어떻게 찾아냈냐, 직감으로 찾아냈다고 그랬어요. 그 직감, 직관을 양심이라고 그랬어요. 내 안에 우주의 창조성의 원리가 있는데, 그게 사람한테 있는 양심인 것 같아. 그 양심이 맞다고 하는 게 우주가 맞다고 인정해 줬다는 거죠.

그런 식으로 나는 찾았어. 추론을 통해서 찾아낸 게 아니야, 직관으로 찾았어.” 요 얘기를 하는데, 그 직관을 양심으로 연결 지어요. 아인슈타인도 철학자 다 되신 거죠.

 

그래서 그 이치를 아는 분들은 분명히 이걸 실감나게 느끼실 수 있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비워야 되는 게,

내가 욕심에 꽉 차 있으면 사물의 원리도 알아낼 수가 없는 거예요. ?

내가 마음을 비우고 내가 마음을 비우고 자명한 걸 수용할 수 있는 상태라야 사물의 원리를, 사물을 갖다 댔을 때, 사물을 갖다는 대는 거죠. 이 안에 원리가 내재되어있지만, 사물을 갖다 대는 거죠.

 

그러면 결국은 내가 알아내는 것은 이 사물의 원리라기 보다는, 이 사물에도 원리가 있겠지만, 내 마음 안에 있는 원리를 알아내는 거예요.

저거는 저거겠군.”하고 내 마음에서 답이 나와요.

 

그래서 주자의 주장은 사물을 연구해서 내 마음 안에 있는 원리를 알아낸다는 사실이에요.

우주 만물의 원리는 내 마음 안에 다 있고, 시공을 초월한 내 본성에 다 새겨져 있고, 그런데 우리는 모르고 있고, 그런데 이걸 연구해야 결국은 내 안에 있는 우주를 조금씩 이해하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본성에 어떤 진리가 들어있는지는 내가 격어 봐야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깥 사물을 빌려다가

결국은 내 안에 있는 진리를 알아내요.

이게 주자학의 기본입니다.

? 내 안에 우주의 진리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 내 안에 신성이 있기 때문에.

 

그 신성이 우주의 근원이고, 내 안에도 우주랑 똑같은 태극, 신성이 있기 때문에 진리는 내가 품고 있는데, 품고 다니면서 나는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연구를 해야 알아내는 거예요. 연구를 해서 저쪽에 있는 걸 알아낸 게 아니라, 저쪽하고 나랑 똑같은 그 태극이 이미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내 안에 내면의 양심의 소리를 통해 진리를 알아내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되는군.’

 

, 내가 경험하는 것은 수많은 인간 군상들뿐이죠. 그런데 그걸 경험하다가 알아내요. 내 안에서 원리가 나와요. 격물을 했더니 지혜가 얻어져요. 어떻게 얻어져요? 사람은 인의예지 해야 되는군. 안에서 나온 거예요. 내 안에서 자명하대요. 자기한테 인가받아야 되요. 자기 양심한테. 이 말이 맞습니까? 자명자명자명. 사랑 안해도 되지 않을까요? 찜찜찜찜. 다시 살랑. 자기가 자기랑 대화해서 알아내는.

 

여러분 책보면 이 책에서 다 지혜 얻는 것 같죠.

이것은 여러분 앞에 있는 사물일 뿐이고,

이걸 보시다가 이건 이거군하고 알아낸 것만 여러분 겁니다.

여러분 안에서 답을 찾아내는 거예요.

 

남의 것은 다 부질없어요. 자기계발서 어쩌구~

책 덮으면서 살라져요. 정보가 싹~

좋았다는 기분만 나와요. 힘 얻었어. 뭔가, 해 볼 의지가 됐어.

진리는 안 남아 있어요.

그 사람의 진리이지 내 진리는 아니기 때문에.

 

내 안에서 꺼내어야 되요.

책을 보시더라도 그럼 모든 책이 그러냐?

대충 보면 이러구요, 이 책을 보다가 이 책을 계기로 해서 내 안에 진리를 내가 끄집어내면 그건 내 꺼에요. 책을 덮어도 그건 남아있어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되는 군

 

예전 어른들이 경전 공부 안하고 도인된다는 건 불가능한 소리입니다. 명상하다 도인 된다구요? 아니오. 딱 자기 수준밖에 생각 못해요. 명상 아무리 잘해도.

 

사람은 밖에서 뭘 경험하고 부딪혀야

간접 경험으로 책을 보시던가

직접 경험을 하셔야만

속에 있는 진리가 부처가 됩니다.

 

사랑이 물현이 되고

정의가 물현이 되어야 되듯이

진리들도 부처가 되어야 되요.

 

내 마음에서 부처가 되지 않은 건 써 먹을 수가 없고

어차피 도움이 안 돼요.

결국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다 날아가 버려요, 그 지식들은.

지식들은 다 날아가 버려요.

지혜만 남아 있는데, 그 지혜는 내 안에서 내가 꺼낸 것들이에요.

 

바깥 사물을 계기로 해서 간접 경험이건 직접 경험이건 그것들을 계기로 해서

내 안에서 꺼낸 것들이 내겁니다.

 

그러니까 마음 비우고 사물 원리를 연구하라는 건요,

마음을 비우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다 인간관계죠.

나랑 잘 지내기도 인간관계요. 나랑 잘 못 지내요. 보통. 자기가 자기랑 못 지내서 남하고 노는 거예요.

 

나랑 있으면 돌아버릴 거 같아.” 그래서 남이랑 대화를 하고 있어야, 내가 나랑 있으면 돌아버리겠는 상황인 거죠. 실제로는.

 

쓰레기 같은 말만 해 내가. 못 듣겠어 내가.” 그렇지 않나요? 남이랑 있으면 좀 조용하거든요. 남이랑 재미있는 얘기 하는 게 좀 낫죠. 그때 내가 이상한 소리 덜 하거든요. 혼자 있으면 이상한소리를 자꾸 해요. “그런데 아까게 이상하지 않아?” 듣다보면 내가 오염되는 거 같은. 그러니까 남하고 대화하고, 남하고 놀고.

 

우리는 결국 다 관계 속에서

나랑도 소통해야 되고,

남이랑도 소통해야 되고,

이 우주랑도 소통해야 되고,

소통 못하면요,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나와 남, 우주의 모든 우주의 근원인 참나 자리랑 먼저 소통을 해야 되고,

그 소통을 밑천으로 삼아서 현상계 안에서 나, 나와 다른 타자들,

하나씩 하나씩 이해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마음을 비우고 사물의 원리를 연구하는 거구요,

/절대로 선입견 갖지 말고, 조금씩 공부를 쌓아가는 중에 순수해지고 익어가는 것이지, 단 기간에 효과를 바라지 마라./

사실은 죽을 때까지 하라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살아가면서 체험한 경험들을 가지고. 그 체험에다가 올바른 개념만 만나게 해주면 자명한 진리가 드러나요. 체험한 거랑, 올바른 개념.

 

사기를 계속 당해요.

체험은 계속 하는데,

개념을 못 세우면

사기를 계속 당하는 겁니다.

 

내가 어쩌다 사기 당했는지 원리를 모르면,

사람들이 나한테 어떻게 사기를 쳤는지 모르면,

또 당하고 또 당하는 거예요.

체험만 있어도 안 돼요.

개념만 있어도 안 돼요.

 

개념만 있으면 체험을 안 해봤기 때문에 지식으로만 학습된 게 있지 인터넷 보고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글로 배운 거죠. 인생을 글로 배워서는 말이 안 되죠. 그러니까 실전에 못 써먹죠. 현장에서.

 

딱 두 개가 결합되면 됩니다. 진짜 별거 아닌 거예요.

해본 것을 자명하게 설명할 수 있으면 되요.

체험과 개념, 체험과 개념,

요것만 맞추어주면 양심이 자명하다고 그래요.

 

여러분 양심은 제 양심이랑 똑같을 겁니다. 프로그램이 그렇게 되어있어요. 체험과 개념 만나면 오케이 사인을 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직장 상사가 언제 오케이 하는지만 아시면 답 나온 거죠. 고것만 맞춰주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요걸 안 맞춰주고 긍정적인 답을 끌어내려면 절대 안 나옵니다. 글로만 공부하고, 여러분, 아무리 해본 것처럼 굴어도 속에서 찜찜찜찜이 올라와요. 신호가. 체험을 했는데 말로 설명을 못한다. 그러면 진짜 아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저 속에서 모른다는 것을 자기가 알기 때문에 찜찜찜찜. 남한테 막 충고하면 속에서 찜찜함이 더 크게 올라와요. “네가 그렇게 말할 처지가 되냐?” 하는 게 올라와요. 그래서 많은 강사들이 막 말로 하다가 사라지는 분들이 있어요. 안에서 올라오는 이걸 도저히 못 견뎌서.

 

밖에 멋진 말 하고 다니잖아요. 혼자 있으면 자기가 자기한테 막 뭐라고 합니다. “네가 지금 그렇게 말할 처지냐? 너 해 봤어?” 이런 게 올라오면 힘들어져요.

 

당당해 지려면요,

자기랑 있을 때도 당당하고, 남하고 있을 때도 당당하려면

무조건 이 공식을 맞춰줘야 되요.

이게 반야바라밀 닦는 법입니다.

체험하고 개념, 일치시켜 주기

 

그럼 게임 끝나요. 그럼 혼자 있어도 발 뻗고 당당하게 있을 수 있습니다. 뭐 어쩌라고. 이런 마음이 되요. 자명한 얘기만 했는데 어쩌라고. 이게 다 공식, 이게 진리이고 공식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우린 경험을 할 거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진리를 탐구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퇴계선생 같은 분 말씀은 조금씩 계속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거예요. 한방에 뭐 하려고 하지 마라. 율곡선생이 젊어서 좀 의욕이 넘치셨나보죠. 그런데 좀 더 살아보신 분 입장에서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인의예지 이치가 그렇게 한 번에 확 알아지고 갑자기 성인의 인격이 나오고 그러지 않아. 안만큼 나아지고, 안 만큼 나아지고 이래.”

 

그러니까 또 체험을 해봐야 이해가 되고. 인생에서 체험을 해봐야 인의예지가 더 깊게 이해가 되고. “, 사랑이라는 게 이런 것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이것도 사랑이구나.” 우리 젊었을 때 정의라는 건 빨리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을 정의로 아는 분들 많았어요. 저희 대학 다닐 때. 운동권들 구호는 다 국가 전복이에요. 대통령을 당장 거의 빨리 끌어내리자는 거였어요.

 

그러면 세상이 좋아질 줄 알았던 거죠. 빨리. 지금 체계만. 자본주의만 무너뜨리면 천국 올 거다. 그게 공산주의 주장이었죠. 그게 먹혔었죠. 그게 정의인 줄 알았더니 살아보니 아닌 거예요. 그러다가 보통 타협합니다. 선악이 어디 있어? 이것도 안 돼요. 선악은 있습니다. 그런데 다양한 정의를 체험하면서 정의가 노련해져야 되요. 그러니까 퇴계선생이 말씀하신 것은 많은 경험을 통해 인의예지에 대해 대게 노련해져야 된다는 거예요.

 

더 정밀하게, 상황상황별로 자명한 거로 찾아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씩 공부하면서 순수해지고 익어가는 것이다. 점점 불순물이 떨어져요. 1년 지나고 나면 찜찜했던 게 또 떨어져요.

 

10년 공부하고 또 보니까 , 10년 동안 내가 그때 많이 아는 거 같아도 양심에 대해서 또 찜찜했구나하면 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이렇게 공부해 가는 거지, 단기간 효과 바라지 마라.

 

/완전히 체득하기 전에는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절대 포기해서도 안 된다. 꾸준히 그렇게 갈 뿐이다. 이런 얘기 들으시면요,

, 저렇게 하느니 화두 잡고 한방에 가겠다.” 이렇게 이해하실 만한 내용이에요.

 

/이것을 즉, 거경 궁리를 죽는 날까지 평생 사업으로 알아라./

그런데 이게 대승보살도도 이래요. 선불교가 한방에 가자고 주장하지 대승보살도도 죽을 때까지 또 닦고 닦고 닦아서 육바라밀을 닦는 중에 노련해져서 높은 보살이 십지 보살도 되고 하는 겁니다. 십지 보살도 여전히 닦고 있다고 나와요. 화엄경에.

 

그러니까 이게 대승 사상들끼리는 통한다니까요. 한방에 가자는 사상하고는 안 맞지만. 마지막 단락입니다.

/그 사물의 원리가 남김없이 이해되고/

인생사에서 어떤 게 자명하고 찜찜한지 선명히 보인다는 거예요. 인의예지의 추상적인 원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가 다 보인다는 거예요.

 

/그리고 깨어있음이 전일하게 된 거/

그리고 늘 한결같이 정신이 깨어있어요. 2가지입니다. 거경궁리가 잘 되면 사물의 원리가 남김없이 자명하게 보이고, 깨어있음이 한결같아져요. 늘 깨어있게 되요.

 

/이렇게 되는 것은 모두 공부가 깊이 나아간 뒤에 자연히 얻어지는 거지 이걸 목표로 하는 건 좋은데, 단박에 이거 하려고 하지 마라./

단박에 늘게 있고, 단박에 모든 사물의 원리가 인의예지의 원리로 비추어 봤을 때 모든 게 선명하게 보이기를 바라지는 마라.

 

/어찌 한순간에 문뜩 깨달아 이내 성불했다고 하는 불교승려들처럼 황홀하고 아득한 중에 그림자만 보고 얼핏 보고는/

공적영지 보고는 이게 그림자라는 거예요. 인의예지를 못 봤으니까 그림자에요.

 

/얼핏 보고는 모든 큰 일이 제일 큰 일이 끝났다면서 그렇게 외치는 거랑 같겠느냐. 우리 유가 공부는 선가 공부랑 다르다. 그러므로 사물의 원리를 연구해서 이를 실천해서 입증해야 된다./

반드시 육바라밀로 구현해 보여야 되듯이 보살이 인의예지를 더불어 펼칠 수 있어야 되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통해 보여줄 수 있어야 되요.

 

/그래야만 비로소 참된 지혜다./

인의예지 원리만 알고 있어도 안 된다. 글로 배워도 안 되고, 체험만 해도 안 되고, 두 개를 딱 맞춰서 원리도 정확히 알고 현실에서 입증도 할 수 있어야 되고, 그래야 지혜고.

 

/항상 깨어있음을 주로 하여 마음이 둘 셋으로 안 갈라져야 비로소 참된 그런 깨어있음의 증득이다./

정신이 분산되지 않게 늘 하나로 몰라 해버리고 또 하나로 돌아오고. 하나로 돌아오고. 요동할 때 다시 또 하나로 빨리 빨리. 시공을 초월한 그 깨어있음을 계속 자기 삶에 끌어다 쓸 수 있어야 참된 증득이고. 원리만 알게 아니라 인의예지를 구현할 줄 알아야 되요.

 

제가 오늘 인의예지 설명하면 오늘 들으시고 저게 다야? 우주의 진리가 저렇게 쉬웠어? 사랑, 정의, 예절, 지혜, 성실, 몰입이면 다 되는 거야?” 집에 가서 가족한테도 잘 못해요. 사랑 다 못해요. 정의? 못해요. 헷갈려요. 그러니까 적용하려고 보면 헷갈린다니까요.

 

자녀가 거짓말 하다 걸렸는데, 정의를 구현할 것인가?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어느 정도 수준의 질책을 할 것인가, 어느 정도 수준으로 진상조사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 가족 간에 어디까지 파 해쳐야 옳은가? 이거 다 어렵습니다. 정의. 좀 더 파 해치다가는 사랑이 깨지는 지경이 와요.

 

그럼 사랑과 정의의 조화. 거기에 무례하지 않아야 되요. 예절, 지혜, 그리고 진리에 근거해야 되요. 내가 어떤 선입견과 편견에 근거해서 이 일을 추진하면 안 돼요. 그리고 성실해야 되요. 오늘 한번 인의예지 주장하고 내일은 또 신나게 놀자, 이러면 안 돼요. 일관성이 없잖아요.

 

, 인의예지를 가정에서 구현할 수 있는 분은 성인이에요. 가정에서만 구현해도 성인이에요. 사실은. ? 똑같거든요. 나라에 구현하나 가정에 구현하나. 똑같아요. 인의예지를 다루는 솜씨를 보고 우리가 성인이냐 군인이냐를 보는 거지, 반드시 나라를 경영해야 성인이 아닙니다.

 

나라 경영했던 성인들 없죠. 실제로. 다 사약 먹고 가시고, 십자가 처형당하시고. 예수님 결국 그 동네 청년들 한 12명 끌고 다닌 거잖아요. 그래도 세계적인 성인이 되요. , 뭘 보고 해요? 솜씨를 보고 하는 거지, 반드시 큰 사업 벌려서 위대하다 아는 거 아니에요. 작은 거 하나 생선 다뤄도 성실을 보고 이 사람이 일류다 아니다를 보는 거잖아요. 아시겠죠.

 

사람 한명하고 노는 것만 봐도

그 사람이 성인인지 아닌지가 나옵니다.

 

아무튼 아시겠죠. 우리가 무인도에선 성인 못되나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못하는데.” 자기가 자기만 잘 다뤄도 성인이에요. 자기가 망상부릴 때마다 어허자기가 이상한 소리 안한 말이에요. 자기가.

 

예전 서암스님은 자기를 깨어나게 할 때 주인공그랬잖아요. 자기가 자기한테 얘기해요. “주인공이러고 놀아요. 주자도 칭찬했어요. 서암스님처럼 우리 선비들도 좀 깨어있어라. . “주인공하고 서암스님은 늘 깨어있었다. 주자어료에 보면 승려들에게 좀 배워라.” 이런 말도 해요. 선비들한테, 좀 깨어있어라.

 

다만, 유교가 중시했던 것은 깨어있기만 하면 뭐하냐는 거예요. 그 깨어있음으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할 수 있는, 중용을 실천할 수 있는 양심을 배양하는 힘, 그리고 양심인지 아닌지 꿰뚫어볼 수 있는 그 지혜를 길러내야 된다.

 

그런데 저는 나중에 이것을 연구하다보니까, 대승보살도 똑같더라는 거예요. 육바라밀을 평생 닦아 가는 거예요. 제가 그래서 얼마나 원망했을까요. 대승보살도에 이렇게 귀한 게 있었는데. 저는 유교 선비들만 이러는 줄 알았는데, 똑같이 있더라는 거예요. 대승보살도에.

 

그런데 한방에 부처되겠다고 화두를 잡네, 화두가 꿈에 있네 없네. 이러고만 신경 쓰고 있으니까 제가 성철스님 비판을 간간이 하는 이유가 답답해서 그러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육바라밀 하자는 정신이 뭐가 달라요. 똑같아요. 선비들이랑. 죽을 때까지 하느님을 구현하겠다는 사도들이나 군자들이나 보살이 똑같다.

 

그래서 대승불교, 유교, 기독교는 하나다.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 철학도 하나다. 그래서 이 땅을 진짜로 바꿀 수 있는, 진짜 깨어있는 그런 철인들, 보살, 군자, 사도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이런 말씀 드렸습니다.

 

먼저 자기가 자기만 경영해도 성인될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 있어요.

저 혼자 지내서 양심 노트를 쓸게 없어요.” 아닐 거예요. 많을 거예요. 많을 겁니다. 자기랑 자기 생각만 바르게 경영해도 성인이에요. 아시겠죠. .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