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0)

즉문즉설_법륜스님(제372) 정신장애가 있는 아들을 위한 기도

Buddhastudy 2010. 9. 30.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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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정신적인 장애든 육체적인 장애든 장애가 생기면 부모로선 다 마음이 아프죠.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 이런 장애아를 낳게 되거나 갖게 되면 부모도 자식을 돌보지 않고 외면하거나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 말이오. 그러면 우리사회에서는 부모도 버리니까 사회가 다 버려버렸어요. 그런데 요즘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는 어떠냐? 이 부모도 버린 사람들을 모아가지고 부모가 아닌 사람이 그들을 돌봤다 이거요. 그래서 지체부자유아라든지 장애아라든지 이런 사람들을 돌봤습니다. 또 부모가 없어서 버려졌거나 부모가 돌 볼 능력이 없어서 버렸거나 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또 돌보기도 하고. 그런데 요즘은 점점점점 더 사회가 발전해서 남의 아이인데도 그냥 모아서 돌보는 그런 특별한 고아원 원장이 아니라. 한 아이들을 다 집에 데려가서 자기 아이로 삼아서 돌봤다. 소위 입양이라는 거죠.

 

이렇게 돌보게 되니까 고아원이 이제 필요가 없어요. 옛날에는 고아원이 없었어. 이런 아이들은 버려졌어요. 그러다가 고아원이 생겨서 이런 아이를 돌봤는데. 이제는 이런 아이를 개별적으로 집에서 돌보기 때문에 다시 고아원이 필요 없어졌다. 장애자도 옛날에는 버려졌다가. 그 동안에는 모아서 돌보다가. 지금은 장애자도 어지간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교통신호등도 시각장애자를 위해서 소리를 낸다든지. 그 다음에 계단도 없애고 휠체어 탄 사람을 위해서 다니게 한다든지. 여러 이런 방법을 통해서 장애자들도 일반 생활인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런 상태다 이런 얘기요. 그러나 여기에서 그렇게 도저히 될 수 없는 지체부자유아라든지 정신적인 장애 같은 경우는 시설에서 그가 생명이 있을 때까지 이렇게 돌봐내고 있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 우리가 못 먹고 살아서 도저히 나도 생존할 수가 없어서 이런 아이를 내 자식이지만 돌보지 못한다면 이런 시설에서 돌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제가 밥 먹고 산다면 남도 돌보는데 왜 내가 내 아이를 돌보려고 하지 않느냐? 이건 욕심 때문에 그렇다. 두 번째, 내가 아무리 재산 있고. 돌 볼 능력도 있고. 돌 볼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어떤 정신적인 장애 같은 거는 기술적으로 내가 돌 볼 수가 없다. 내가 돌 보는 것 보다는 그것은 그것을 전문적으로 돌보는 사람들이 돌보는 게 더 효과적이다. 이럴 때는 내 자식들이라도 병원에 입원을 시켜야 된다. 시설에 넣어야 된다 이 말이오. 내가 귀찮아서 보내는 게 아니라. 내가 돌보는 것보다 그들이 더 잘 돌보기 때문이다.

 

만약에 남편이 병이 났다 하면 내가 집에서 간호하면 되는데 왜 병원에 보냅니까? 내가 집에서 하는 것보다 그것은 전문적인 기술이 있는 의사나 간호사가 돌봐야 더 잘 돌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일정한 경비를 지불하고 그들이 돌보도록 맡기는 거다 이런 얘기요. 이런 아들을 둔 것을 자꾸 신세 타령 식으로 가면 안 된다. 그러면 내 정신 건강도 나빠지고 아이도 나빠진다. 부모가 자식을 원망하거나. 저런 아이를 낳아서 내가 인생이 힘들다. 이렇게 생각하면 부모가 자식을 원망하는게 된다 이거요. 그러니까 자식을 부정적으로 부모가 본다는 거요. 부정적으로 보니까 힘들다 원망하는 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래도 그 자식을 긍정적으로 보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야 되는데. 오늘 우리는 부모도 자식이, 남편이든. 제 맘에 안 들면 다 부정적으로 봐 버린다. 제 맘에 안 들면.

 

그래서 여러분들이 힘들어 하는 거요. 첫째 자식을 환자를 긍정적으로 봐야 된다. 하나의 병이면 병으로 보고. 치료가 필요하면 치료를 하면 되는 거고. 돈이 필요하면 내가 돈을 벌어서 대면 되는 거고. 내가 돈을 벌 능력이 없으면 정부에 부탁을 해서 정부가 보살피도록 해야 된다. 정부는 개인이 보살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는 사람은 정부가 보살피지만은. 개인이 보살필 수 있는 수준에서는 정부가 지원을 하지 않는 거 아니냐? 그러면 정부 지원을 못 받는 게 힘든 게 아니라. 그건 내가 그 만큼 능력이 있다는 얘기란 말이오. 그러니까 내가 밥을 먹고 산다면 내 자식은 내가 돌봐야 된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돌보면 되는 거니까 울 일이 아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크다가 이런 장애가 발생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발생하든. 크다가 발생했다.

 

의사선생님한테 얘기 들어보니 어때요? 어릴 때 어떤 심리적인 억압이 있었다. 그러면 여긴 두 가지에요. 엄마가 심리적인 억압이 있어서 아이가 전이돼서 아이가 심리적인 억압이 있든지. 그러면 엄마가 심리적인 억압이 있었다는 것은 뭔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얘기 아니오. 반대로 엄마가 자기 성격이 강해서 아이가 할 말을 하도록 안하고. 어머니 성격이 강해서 아이가 심리적인 억압을 받았든. 그러니까 엄마의 상처가 아이에게 전이가 됐든, 엄마가 아이에게 상처를 줬든. 두 가지란 말이오. 둘 다 엄마 책임이라는 거요. 그 엄마가 심리적인 상처를 받았다 하면 누구한테 받았겠냐? 남편한테 받았다 그러면 남편한테 참회해야 되고. 시어머니한테 받았다 하면 시어머니한테 참회를 해야 이게 상처가 없어진다 이 말이오.

 

왜냐하면 그로부터 왔다는 것은 전도몽상이다 이거요. 내가 받은 거지 그가 준거는 아니다 이거요. 준 바가 없는데 받은 건 있다 이거요. 그러니까 이것은 나로부터 왔다. 그의 문제가 아니다. 그에게 참회기도 할 때 누구 상처가 없어진다? 내 상처가 없어진다. 그가 잘못했다 하니까 나한테 상처가 되는데. 그가 아무 잘못이 없다면 나도 상처 받을 일이 없다 이 말이오. 그래서 치유를 해야 된다. 그리고 아이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내야 된다 이거야. 나로 인해서 네가 이렇게 힘들어졌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마음, 그 책임이 나한테 있다는 마음을 내게 되면 그 아이의 행동을 가지고 시비를 안 하게 된다 이거요. 이해하게 되면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어떤 것을 하든 아이고 내가 잘못해서 애가 이렇게 힘들었구나. 죄의식을 갖는다는 게 아니라. 아이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게 된다.

 

그러면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든 내가 힘들어 하고 내치고 이런 마음이 없단 말이오. 힘들어 죽겠는데 엄마 마저도 막 내 치니까 얼마나 상처를 입겠어. 그래서 엎드려서 절을 해야 되는데. 지금 보살님은 스님이 얘기하기 좀 어려운게. 이게 자기를 돌이키는 힘이 별로 없다 이 말이오. 자기 생각이 꽉 차 있기 때문에. 그래서 먼저 절부터 좀 하셔야 되 사실은. 허리 아프다고 딱 벌써 뭐 나한테 절하라 소리 하지 마라. 탁 내미니까 내가 할 말이 없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마음으로 나를 돌아보는 힘이 있어야 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