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72. 네가 행복할 때, 내가 행복하다

Buddhastudy 2019. 7. 29. 20:26



 

안녕하세요.

오늘 아침에도 부처님의 전생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겠느냐, 이런데서 자카타(본생담)에 나오는 얘기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의 과거생의 얘기죠.

과거생에 한 나라의 왕으로 계실 때의 얘기입니다.

그런데 왕으로 있으면서도 왕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시고, 왕위를 버리시고 출가를 하셔서 숲속에서 깊은 정진을 하고 있을 때의 얘기입니다.

 

이렇게 정진을 하고 있는데, 마침 한 마리의 비둘기가 급하게 날아와서

저를 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하는 거요.

그래서 그 비둘기를 품속에 숨겨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까 매가 한 마리가 날아왔어요.

비둘기가 매에게 쫓겨서 수행자의 품속에 숨은 거죠.

 

그때 매가 와서 비둘기가 수행자의 품속에 숨어 있는 것을 보고는

수행자여, 그 비둘기를 나에게 내놓으시오. 그 비둘기는 나의 요깃거리입니다.”

 

그러니까 수행자가

안 되오. 이 비둘기의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니 당신은 이 비둘기의 목숨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해치지 마십시오.”

이렇게 완강하게 거절을 했던 거요.

 

그러니까 매가 하는 말이

수행자여, 당신은 하나만 알고 하나는 모르는 것 같소.

이 비둘기의 목숨만 중요하고, 이 매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단 말이오?

당신이 비둘기의 목숨을 살린다고 그렇게 비둘기를 보호해주면 이 매는 먹을 것이 없어서 결국 죽게 되지 않소.

그러면 매는 죽어도 괜찮고 비둘기만 살아야 된단 말이오?”

이렇게 항의를 하는 거요.

 

그런데 수행자가 그 매의 얘기를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맞는 얘기요.

하나만 알고 하나는 모르는 거요.

비둘기만 살린다고 결국은 매를 죽게 만드는 것과 같다.

그래서 수행자가 그렇다고 비둘기를 내어준다는 것은 비둘기의 목숨을 버리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수행자가 말했어요.

 

매여. 그러면 당신의 목숨도 살고, 이 비둘기의 목숨도 살고 둘 다 사는 길은 없겠소?”

매가 살든지 비둘기가 살든지. 매가 죽든지 비둘기가 죽든지, 하여튼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은 이런 상태인데, 아무튼 난 잘 모르겠소.

하여튼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한 덩이의 고기일 뿐입니다.

나는 꼭 비둘기 목숨을 해쳐야 만이 내가 사는 건 아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한 덩이의 고기다. 나는 한 덩이의 고깃덩어리만 있으면 되오.”

 

이렇게 하니까 수행자가 생각해보니

그럼 매도 살리고 비둘기도 살릴 수 있는 길은 한 덩이의 고깃덩어리를 얻어서 매에게 주는 건데, 그런데 어디 가서 고깃덩어리를 얻느냐는 거요.

그래서 생각해보니,

그렇다 내 엉덩이 살을 베어서 저 매에게 줘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자기 엉덩이 살을 베어서 매에게 제공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매를 살리자면 비둘기가 죽고, 비둘기를 살리자면 매가 죽는,

이것이 바로 이 중생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이기자면 하나가 패배해야 되는 거요.

하나가 행복하자면 그에 따라 하나가 불행해지는 거요.

 

그러니까 불교에서 추구하는 것은

둘 다 행복해지는 길,

둘 다 사는 길이 뭐겠느냐.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요지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까 이 둘 다 사는 길,

매도 살고 비둘기도 사는 길은 바로 자신을 희생하는 거요.

누구를 대신 희생시키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을 희생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자신의 엉덩이 살을 베어서 매에게 던졌는데, 이 매가 요구하는 것은 비둘기의 몸무게만 한 고깃덩어리였어요.

그래서 저울대를 놔놓고는 한쪽에 비둘기를 올리고 자기 엉덩이 살을 베어서 얹어서 충분히 몸무게만큼 올렸는데 비둘기가 무거운 거요.

 

이상하다 싶어서 또 다른 엉덩이 살을 베어서 또 올렸는데, 그래도 비둘기가 더 무거운 거요.

그래서 두 다리를 잘라서 올렸는데도 더 비둘기가 무겁다.

그래서 또 팔을 잘라서 올렸는데도 그래도 비두리가 무겁다.

그래서 자신의 온 몸을 던졌을 때야 바로 저울대가 균형을 유지했다.

 

그럼 이게 뭐겠느냐 이거야.

나를 희생한다. 할 때,

우리는 비둘기의 생명과 다시 말하면 미물인 비둘기의 생명은 아주 작은 거니까,

바로 고귀한 생명인 보디사트바의 한쪽 엉덩이 살 정도면 저울대가 같이 균형을 이루지 않겠느냐.

이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죠.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생명의 가치에 있어서는 그 고귀한 보디사트바와 생명의 무게는 같다.

생명의 소중함에는 똑같다.

이런 것을 여기서 말한다.

 

그러니까 자신을 희생시켜서 중생의 고통을 구한다 하는 교훈 하나가 있고

두 번째는 엉덩이 살을 베어서 올렸는데도 비둘기 몸무게가 더 무거웠다. 이 말 속에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 소중함에 있어서 가치가 같다.

각자 자기가 볼 때, 자기는 소중하고 타인은 하찮은 것 같죠.

그러나 이것은 똑 같다.

 

비둘기와 보디사트바의 생명의 가치가 같다.

이 말은 모든 생명의 가치가 같다. 이런 얘기에요.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왕은 생명의 가치가 아주 고귀하죠.

그다음에 하인이나 노인은 생명의 가치가 아주 하찮죠.

그래서 왕을 위해서는 수백, 수천의 노예의 생명을 희생해도 왕 하나가 산다면 어때요?

그것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역사 속에서 보면 한 사람의 장수, 한 사람의 임금을 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이런 경우가 있죠.

지도자 한 사람, 또는 부자 한 사람, 이런 사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 희생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신체의 일부를 교체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을 해쳐서 그 장기를 판매하는 이런 일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다 생명의 가치가 돈으로 환산된다.

, 돈을 많이 갖냐, 적게 갖냐에 따라서 생명의 가치가 달리 계산되죠.

 

요즘은 교통사고가 나거나 무슨 사고가 나서 죽었을 때도 어떻습니까?

살아있을 때만 생명 가치가 아니라 죽어도 이 생명 가치가 달리 평가되죠, 돈을 환산할 때.

또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얼굴이 흰 사람들은 아주 고귀한 가치를 두고

얼굴이 피부가 검다는 한 가지 이유로 아주 하찮은 그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 어떤 종족이냐, 또 인물이 어떻게 잘났느냐, 계급이 높으냐, 남자냐, 이런 거에 따라서 여성은 가보치를 낮게 평가하고, 남성은 높이 평가한다든지.

또 신체가 건강하면 높이 평가하고, 뭔가 장애가 있으면 낮게 평가한다든지, 키가 크면 높게 평가하고 키가 작으면 낮게 평가한다든지,

 

이렇게 사람 가운데서도 인종과 민족, 계급, 성별, 신분에 따라서

사람의 가치가 다르게 평가 되었죠.

이 생명의 가치가 같다. 이게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철저한 계습 사회에서

부처님께서는 계급의 불평등을 부정하셨죠.

,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면서

모든 계급들의 평등을 지향하셨습니다.

 

또 남성중심적인 사회, 여성의 하나의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는

그런 소위 남녀불평등 사회에서

부처님께서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하나의 수행자가 되고 해탈 할 수 있다.

이런데서 여성의 출가, 즉 비구니 제도를 인정하셨죠.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에서 볼 때는 언제나 어떤 불평등도 그분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런데서 여기 전생의 모습으로 드러난 데는 바로 붓다에 이르기 직전인 보디사트바와 하잘것없는 미물인 이 비둘기마저도 그 생명의 소중함에 있어서는 가치가 같다.

이런 면에서 이 설화는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전생 얘기를 들을 때는

이것이 사실입니까?”

이런 어떤 사실적인 문제를 제기하기 보다는

바로 이러한 설화를 통해서

불교의 사상이 어떤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건가,

수행자가 어떤 태도, 어떤 사상,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되는가.

이런 것을 주는데 우리가 더 초점을 맞춰야 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늘 이 부처님의 전생얘기를 들으면서, 참 어떻게 그 시절에 이 보디사트바의 무게와 비둘기의 무게를 저울대에 올려서 같이 균형을 이루는 그럴 때, 보살의 몸이 다시 원상복귀 되는 이런 이야기를 설령 만들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생명의 가보치를 같게 볼 때만이 이런 얘기를 구성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이것이 참 불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았는가.

요즘 같으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2600년 전 당시에 이런 생각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 지혜의 눈이 없다면 이런 얘기는 일부러 꾸밀래도 꾸밀 수가 없다는 거죠.

 

오늘 우리 불자들은 어쩌면 불교라고 하는 전통의 울타리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서 오늘 불교라는 이름을 갖지 않고, 소위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접해 가는지도 모르겠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목숨, 사람의 평등, 이런 것들을 주장하는 게 소위 정의, 그렇지 않으면 민주, 뭐 이런 사회운동 아닙니까. 그죠.

이것은 다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과 비교할 때는 어떠냐, 거기에는 굉장한 불평등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다 인간이 잡아먹기 위해서, 인간이 살기 위해서, 그저 희생될 수밖에 없는 그런 산물로 인식하고 있죠.

 

우리가 지금까지 인류사에 있었던 많은 사상들이 다 그렇습니다.

다 인간 중심으로만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환경운동이 제기 되면서 아주 작은, 보이지 않는 그 미생물, 미물, 땅속에 있는 지렁이, 이런 생명들이 없다면

오늘 우리들의 생명도 존재할 수가 없다는 거죠.

 

우리가 길거리에서 비온 뒤에 많이 나타나는 지렁이를 보면 누구나 다 인상을 쓰고 징그러워합니다.

아이고, 저런 것 좀 없으면 어떨까.”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지렁이가 없다면 바로 우리들의 생명도 존재할 수가 없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지렁이들이 땅속에서 구멍을 내고, 그 구멍을 따라서 공기가 들어가고, 그래서 땅속의 수많은 미생물들이 생활 할 수 있고, 그것이 갖가지 분해작용을 일으켜서 바로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도록 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또 소위 말하면 쓰레기를 분해시켜서 마치 고무를 녹여서 새로운 철판을 만들 듯이 바로 이 쓰레기를 분해시켜서 새로운 영양공급원으로 만드는 역할도 한다.

이런 지렁이가 있음으로 해서 오늘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이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므로 해서 짐승들이 자라고 사람들이 자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지렁이가 없다면 오늘 우리도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렁이의 숨은 공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지렁이는 그저 내가 보기 싫으니까, 없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요.

이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런데서 오늘 우리들의 존재는 우리 스스로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네가 있어야 존재합니다.

너가 없다면 나도 존재할 수가 없다.

이것이 연기법이죠.

 

그러면 너와 나는 어떠냐?

바로 다른 사람들의 공로와 은혜의 희생위에 존재한다.

그러면 사람은 어떠냐?

다른 뭇생명들의 은혜 위에서 존재하는 거요.

 

저 태양빛이 있고, 공기가 있고, 비가 오고, 물이 있고, 이런 어떤 우주의 은혜, 이런 속에서 뭇생명들이 있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하나가 없어지면 바로 나또한 없어지는 거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연기적 세계관에서 볼 때는

하나가 이기고 하나가 지는 이런 승패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런 연기적 세계관에서 볼 때는

이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 말은 너가 죽으면 내가 죽고, 너가 살면 내가 산다.

이것이 바로 공생의 원리, 상생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런 공생의 원리에 있어서는 경쟁의 원리가 아닙니다.

바로 조화와 균형이다.

어떻게 서로가 조화를 이룰 것인가.

어떻게 균형을 이룰 것인가, 이것이 최고의 이상이 된다.

 

그러나 경쟁사회에서는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이것이 최종 목표가 되죠.

그래서 우리가 경쟁, 투쟁, 승리, 패배, 이것이 중생의 세계라면

바로 이 세계의 참모습, 불국토의 이상은 어떤 것인가.

거기에는 정복이라든지, 경쟁이라든지, 이런 세계가 아니라, 바로 서로 연관된 존재, 그래서 조화와 균형이 가장 이상적인 그런 세계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 행복과 나의 행복이 상충되는 게 아니다.

네가 행복할 때 바로 내가 행복하다.

너가 불행해지면 나도 불행진다.

바로 이러한 가치관에 서 있다는 거죠.

 

이런 불교의 사상이 이런 하나의 설화 속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러한 소위 비둘기와 매라고 하는 상호 모순적인 그런 데서

보살은 그 둘을 살리는 행위를 하는 것이 바로 보살이다.

, 불교의 가르침이다. 이런 얘기죠.

 

이것은 부처님께서 출가한 동기도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평범한 소년으로, 요즘 말하면 꿈 많고, 출세의 가도가 양양된 그런 소년, 청년이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어느 날 농경제에 참여했다가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왜 하나가 사기 위해서는 하나가 죽어야 할까.’

왜 둘이 다 같이 사는 길은 없을까.’

이런 큰 의문이 생겼던 거요.

 

또 농부가 가죽채찍을 휘둘리면서

소를 때리면서 쟁기질을 하는 것을 보고,

왜 하나가 편리하기 위해서는 저렇게 하나가 불편해야 하는가.’

왜 둘 다 편리란 그런 길은 없을까.’

 

또 농부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보면서

왜 당신은 고통스럽습니까?’ 했더니

바로 지배계급이 자신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양반과 상놈이라는 이 세상의 관계, 주인과 노예라는 이러한 관계, 이것이 그 농부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럴 때, 왜 둘 다 행복해지는 길은 없을까.

이런 큰 의문이 들었고, 그런 의문을 부모님께 물어도 모른다고 그러고, 스승께 물어도 모른다 그런다.

온갖 세상의 지식을 다 알고, 자신에 가르쳐준 그래서 평소에 자신이 존경했던 자신의 두 스승도, 이 질문을 했을 때는 모른다는 거요.

 

세상은 본래 그렇다.

하나가 살려면 하나는 죽어야 한다.

하나가 이기려면 하나는 필연적으로 패배해야 한다.

왜 그런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게 세상이다.

 

그러니 내가 죽지 않으려면 내가 살아야 된다.

살려면 상대를 죽여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기는 길을 찾아야 된다는 거요.

 

어떻게 하면 내가 이길까,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아남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짓밟고 일어서서 나의 행복을 추구할까.

 

이것이 이 세상의 이상이라면,

바로 부처님이 추구했던 것은

왜 같이 사는 길은 없을까.

왜 같이 행복해지는 길은 없을까.

이런 큰 의문을 가지셨고,

당시 이 세상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답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많은 탐구 끝에 결국은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할 때

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개별적 단족 존재의 집합이 아니다.

각각의 존재들은 서로 연관된 것이다. 서로 연관되어 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한 손에 연관되어 있듯이

그래서 이 다섯 개의 손가락은 겉으로 보면 별개의 손가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것은 하나로 연관되어 있다.

하나의 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손가락이 살기 위해서 다른 손가락을 해친다면, 그것은 곧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만약에 오른손이 왼손을 덮는다면 그것은 곧 자신을 돕는 길이다.

이것이 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연기적인 세계관에 서서 바라봤을 때

바로 비둘기와 매는

살리고 죽이는, 죽이고 사는 그런 관계만이 아니다.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 세상에 실현하는 자가 누군가

그것이 바로 보살이다.

그것이 수행자다.

 

이런 우리의 관점에서 이것이 바로 나중에는 중도사상이 되고, 이것은 원효대사에게 이르러서는 바로 화쟁사상이 됐다.

서로 다른 것들이 모순관계에 있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관계, 즉 화단에 있는 꽃들이 서로 다른 모양, 서로 다른 크기, 서로 다른 색깔, 이렇게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화단을 이루는 것처럼

 

서로 다름이 대립과 갈등이 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름이 어우러져서 조화를 이루는,

바로 그런 가운데에서 평화를 이뤄나가는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이

오늘 우리 인류사회의 나타나고 있는 많은 모순과 갈등을

화합시키는 그런 밑받침이 되지 않겠느냐.

 

이것은 작게는 자기 내면의 평화를 가져오고,

나아가서는 부부지간에 부모자식 간에 모순관계가 바로 해소되는,

가정의 평화를 가져오고

우리 사회에 오늘날 갖가지 계급별로 이루어진 이런 갈등이

대립이 아니고 바로 조화를 이루는 쪽으로 가 주도록

남북 간의 갈등, 북미간의 갈등 이런 것들도 다

조화와 균형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나가는 것,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런데서 오늘 우리는 마치 이 매가 미국 같고, 비둘기가 북한 같고

그럴 때 둘을 다 살리는 길,

그 둘 사이에서 깨어서 의심받는 존재에서 둘을 다 살리는 수행자의 길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한국이 북한과 미국의 모순을 해결하고

이것을 평화로 일깨울 수 있는 지혜를 내는 것도 바로 이 보살의 삶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가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우리가 이런 가르침을

우리가 사는 세상에 조금만 적용해본다면

부처님의 이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세상의 평화를 위한 길, 세상의 모순을 극복하는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가 있다.

 

그런데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배의 창고다.

이 좋은 보배를 창고 안에만 가두어 놓을 것이 아니라

꺼내서 유용하게 쓰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 불자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