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471

[현덕마음공부] 인식은 하지만 동요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면 번뇌도 없다. 마음공부는 세상과 담을 쌓거나 삼매 속으로 빠져들어서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목표가 아니다. 세상에서 상황에 부딪혀서도 마음의 동요가 없는 것이 목표다. 동요한다는 것은 '나'가 있기 때문이다. 몸, 마음, 소유, 관계의 총화가 나다. 나에 대한 괸찰은 그것이 구성된 것이며, 변하는 것이며, 끝내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 결과 나에 대한 집착이 경감된다. 내가 특별히 잘되어야 하겠다는 야심이 없으므로 걱정 없음이 가능해진다. 흐름에 따라 살며 삶을 교묘하게 조종하려는 생각이 없어지면서 평화롭게 살 수가 있다.

[현덕마음공부] 스트레스 바로 알기

스트레스는 기분 나쁜 느낌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충분한 이해는 아니다. 스트레스 삶의 위협에 직면한 인간의 생존 반응이다. 그 반응은 호르몬, 신경계, 혈액을 통해서 도피나 투쟁을 위한 폭발적 에너지를 만들어 준다. 우리는 변화량을 줄이고 예측력과 통제력을 올리는 방향으로 노력하지만 그 과정 자체 또한 스트레스가 된다. 변화에 저항하지 않고, 예측 대신 대응을, 통제 대신 자체 변화를 통해서 효과적인 스트레스 감소를 가져올 수 있다.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9장 수행하여 얻는 경지가 없다

修果無相分 -수행하여 얻은 경지가 없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수다원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저 스스로 ‘나는 수다원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다원이란 세류에서 벗어나 도에 갓 입문한 경지라고들 하는데 그 실상을 보면 입문한 바에 신경 씀이 없고 색생향미촉법에도 흔들리지 않기에 수다함이라고 이름하는 것이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사다함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저 스스로 ‘나는 사다함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사다함은 한 번만 윤회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경지라고들 하지만 실상은 그런 윤회에 구애됨이 없기에 사다함이라고 이름하는 것이옵니다.” “수보리야, 네..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8장 전할 바의 法은 없다

無所傳法分 -전할 바의 法은 없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울 만한 칠보로써 보시하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심히 많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러한 물질적 복덕은 깨달음에 직결되는 복덕은 아니지만 아상을 녹여주는 연유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셨나이다.” 다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금강경의 어느 한 구절을 지니거나 더 나이가 몇 구절을 다른 사람을 위해 일러 준다면 그 복덕이 칠보로써 보시한 것에 비하겠느냐.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과 법문이 이 경전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나니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은 불법이 아니니라. 그렇듯 이 경전 또한 그러하니라. -解義- 왜 보시는 ..

[현덕마음공부]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어떤 사람은 수행을 어떤 사람은 깨달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시대적으로는 초기불교와 부파불교는 수행을 대승과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점수와 돈오로도 불려진다. 번뇌에 대한 처방으로 제시된 것이 다른 것은 그 시대와 관련이 있다. 기원전 6세기 경에는 수레(조립)와 연금술(금속가공공정)이 첨단 기술이었다. 이것이 영감을 주었다고 본다. 해탈은 잘 닦아서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반면에 기원후 6세기 경에는 중국과 인도 모두 문자화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다. 이 때에는 생각(언어, 문자)의 과잉이 문제가 되었다. 욕망을 불순물을 제거하고 금을 만드는 과정에 비유하여 닦아서 제거하려던 시대와 생각의 과잉이 낳은 번뇌를 망상을 깸으로써 해결하려던 것은 각각 시대의 특성과 과제에 대응..

[현덕마음공부] 중도, 불교적 미덕

초기불교의 중도는 진리의 본체라기보다는 진리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론이었다. 양극단을 지양하고 자신이 내면의 관점에 묶여 있음을 자각하고 그것을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를 관찰할 때 통찰이 일어나고 초월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트만사상의 상주론과 유물론의 단멸론에 대한 지양에서부터 고행(욕망,호흡,식사), 인간과 세계, 몸과 마음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는 시각이었다.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7장 걸림이 없이 분별을 드러내다

“수보리야, 네 상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무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다고 여기느냐? 이게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제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뜻을 헤아려 보건데 딱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이 없사옵니다. 게다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 역시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사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란 것은 사실상 취할 수가 없고 말할 수가 없으며 그래서 법이 아니고 그렇다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체의 성현들께서는 무위의 법으로써 분별을 나타내기 때문이옵니다.” -解義- 본 장의 주제는 이무위법 이유차별이다. 11장에 나오는 금강경의 공통 주제인 응무소주 이생기심과 같은 맥락의 가르침이다. 무위의..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6장 佛法은 法이 아니다

佛法非法分 불법은 법이 아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나 경전의 글귀를 듣고 깨달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런 의심을 내지 말지라. 여래가 입멸하고 2천5백년 후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계율을 지키고 복덕을 쌓는 사람이라면 능히 이 글귀(금강경)를 보고 믿음을 내어 가히 정법이라 여기게 되리라. 마땅히 알지니, 그런 사람들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부처님이 사시는 동안에 심은 선근의 결과이며 나아가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들이 심은 선근 덕분이니라. 이런 까닭에 이 경전의 글귀를 듣고 한 생각을 일으켜 참된 마음으로 믿게 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현덕마음공부] 불교의 선과 불선, 착하고 유능하고 자유로운

불교의 선하다는 개념은 보편적인 내용 (생명에 대한 친절) 외에 중요한 개념이 추가되어 있다. 그것은 유능함으로 번역되는 kusala이다. 사람은 무엇이 진정 자신에게 유익한 것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서투르기 때문에 속박되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불선의 산스크리트어는 akusala(서투른)이다. 착하다는 것은 불교적으로는 세가지 키워드를 가진다. 첫째는 생명을 향한 친절, 두 번째는 유능함(무엇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유익한가에 대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자신과 타인을 해탈과 열반 즉 자유로 이끌어 가는가 하는 것이다.

[현덕마음공부] 붓다의 누진통, 번뇌의 종식

깨달음의 밤, 마지막 계발된 지혜는 누진통이었다. 누진이란 흘러나옴이 다한 것이다. 번뇌의 종식이라고 하겠다. 번뇌는 갈애 때문이고, 갈애는 무명 때문이다. 무명의 타파가 결국 해탈이다. 무명을 타파하기 위해서 붓다는 무색계 삼매(정신의 억누름)과 고행(몸의 억누름)이라는 명색을 중심으로 수행했으나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천착한 것은 명색과 상호 의존하고 있는 식(경향성이 있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의식을 가지고 의식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문득 분별의 자발적 내려놓음이 일어났다. 완전한 내려놓음, 포기, 분별하지 않음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이 해탈이고 번뇌의 종식이다.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5장 일체의 相은 相이 아니다

諸相非相分 일체의 相은 相이 아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나의 몸을 보고 여래를 봤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나이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의 몸을 보고 여래를 봤다고 할 수 없나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 몸이라고 하신 것은 사실은 몸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모든 것이 다 허망한 것이로다. 만일 유란 것이 유가 아님을 안다면 여래를 보게 되리라.” 解義 본 장은 법상에 대해 설법하고 있다. 상이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형태를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쉽게 有로 정의 할 수 있는데 그 가운에 부처를 이루고 있는 상이 곧 법상이다. 그렇다면 법상을 보면 실존이 보이는가? 수보리의 말마따나 그렇지가 않다. 부처의..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4장 머무름 없는 보시를 하라

布施無住分 머무름 없는 보시를 하라 “그리고 수보리야, 수행자는 마땅히 法에도 머무름이 없이 보시해야 하나니 이른바 겉보기(色)나 소리, 냄새, 맛, 촉감, 사념 따위에 집착해서야 쓰겠느냐. 수보리야, 수행자는 마땅히 이처럼 분별에 초월하여 보시해야 하느니라. 왜 그런 것인가? 수행자가 분별에 구애받지 않고 보시해야 깨달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동쪽의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옵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그렇다면 남쪽, 서쪽, 북쪽과 그 사이의 간방間方, 그리고 위와 아래의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옵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머무름이 없는 것은 허공과 같아 수행자가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보시한다면 그 공효가 허공처럼 가늠할 수..

[현덕마음공부] 붓다의 천안통, 오해와 진실

깨달음의 밤에 붓다의 두 번째 지혜의 개발은 천안통이었다. 타인의 나고 죽는 것을 봄으로써 윤회의 고리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윤회의 핵심은 업이고 그것은 갈애에 의한 행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갈애를 소멸시켜야 한다. 그런데 갈애의 소멸은 수행이 아니라 지혜에 의해서다. 불교가 지혜의 종교인 이유다. 지혜로 밝힐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 연기를 모르는 것 무상고무아를 모르는 것이다. 천안통까지 와서 붓다의 기본 깨달음은 거의 갖추어졌다.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해진 것이다.

[현덕마음공부] 붓다는 숙명통을 얻어서 무엇을 보았나?

불교에서는 3명과 6통을 얘기한다. 3명은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을 말한다. 이에 신족통, 천이통, 타심통까지 더하면 6신통이 된다. 인도적 전통에서 명상을 통해서 계발되는 것은 지혜보다는 능력이었다. 인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초능력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 관점을 바꾸었다. 지혜를 밝혀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을 제시한다. 숙명통도 마찬가지다. 그저 전생의 기억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불교적 관점을 획득하는데 기여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전생의 기억을 통해서 붓다가 얻은 통찰은 배후의 실체 즉 아트만이 없다는 것과 많은 조건들의 묶음을 '나'라고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각각 무이론과 오온이론으로 발전하게되는 단서다. 붓다는 그것을 보고 나서 논리적 추론으로 이끌어내게 된 것이다. 그다음..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3장 중생 제도의 올바른 뜻

滅度正宗分 중생 제도의 올바른 뜻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불제자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다스릴지라 일체의 중생이 존재하는 양태를 보면 알이나 태에서 생기기도 하고 습한 곳에서 자라거나 특정 조건에 의해 화생하니라. 이런 모든 것들은 형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기도 하니라. 내가 이 모든 것들로 하여금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도록 제도하리라. 그런데 이와 같이 무수한 중생들을 내가 제도하지만 실상을 보면 제도가 되는 중생은 없느니라. 수보리야, 왜 그런 것인지 아느냐? 삼라만상 모든 것이 부처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니라. 중생은 저 스스로 미혹되어 중생이라 여기나니 만약 깨달았다는 자에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구분이 ..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2장 법문을 청하는 마음가짐

請法發願分 법문을 청하는 마음가짐 그때 장로 수보리가 승려들 사이에 있다가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른 어깨가 드러나도록 웃옷을 왼편으로 걸친 채 오른 무릎을 땅에 꿇어 합장 하고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상에 드물게 출현하신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희 수행자들을 분별심에 미혹되지 않고 불법을 닦아 깨달음을 이루도록 부촉하며 잘 이끌어 주고 계시옵니다. 세존이시여! 구도의 뜻을 둔 사람이라면 으레 무상의 깨달음을 발원하게 되나니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을 청정히 머무르게 하여 번뇌망상을 없앨 수 있겠나이까?”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한 질문이로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여래는 제자들이 분별심에 미혹되지 않고 잘 수행해 나가도록 부촉하며 이끄나니 그대들은 이제..

[현덕마음공부] 붓다의 고행으로 본 중도, 중도는 방법론이다 (합목적성, open mind, trial & error)

중도는 현재 불교에서 진리의 반열에 올라가 있는 단어다. 초기불교의 연기, 무아와 대승불교의 공, 불이를 연결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렇게 절대화되고 추상화되면 현실에서 체감하고 적용하기가 어렵다. 초기불교에서 강조된 중도는 확실히 방법론적 개념이다. 즉 오염원(감각적 욕망, 악의, 해치려는 마음)의 제거라는 목적을 위해 제한 없는(open minded), 시행착오(trial & error)를 허용하는 명백한 방법론의 준칙이었다. 붓다의 고행에서도 이는 증명된다. 붓다는 나쁜 생각의 극단적 억압, 호흡의 정지, 극단적 단식이라는 고행의 결과 오염원의 제게에 실패한다. 그리고 이들 수행의 재료를 다듬어서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이 나쁜 생각의 위험성을 알아차림, 호흡을 알아차림, 먹는다는 것의 실상을..

[현덕마음공부] 불교의 관점에서 바라본 행복,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불교에는 행복론이 없다. 대신 괴로움의 소멸이 곧 행복이라고 얘기한다. 그 괴로움은 갈애에 기인한다. 갈애 즉 욕망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는 것이 행복의 첩경이다. 갈애(욕망)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추구하게 된다. 만약 그것이 결국 더 큰 괴로움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생생히 느끼게 되면 위험물을 본능적으로 피하듯이 갈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공(空)으로 보는 금강경 제1장 수행은 낮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修始下心分 수행은 낮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숲에 있는 급고독원에서 수행승 12,000명과 함께 머무르셨다. 그 당시 세존께서는 식사 때가 되면 으레 가사를 거친 후 바루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 걸식을 하셨는데 그곳에서 차례를 지켜 공양을 받으셨다. 그리고 본처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남김없이 잡수시고는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좌정하셨다. -단예선사 解義- 본장에서는 세존의 평상시 공양하는 모습을 하루에 걸쳐 무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언뜻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모습이라 여겨질 수 있지만 그 이면에 담긴 뜻은 태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 세존이라는 말은 세상에 둘도 없는 존귀라는 뜻이다. 그렇게 위대하고 특별한 존재인 그가 여..

[Danye Sophia] 한국 불교, '선(禪) 수행'의 충격적인 실상을 공개한다!

익히 알다시피 수행자들은 괴로움의 소멸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어떡하든, 생각을 줄이거나 끊어내려 합니다. 왜냐하면 괴로움은 생각을 연료로 삼아 맹렬하게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길거리에 나뒹구는 돌멩이와 진배없게 됩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허망하겠지요. 그래서 수행자들은 무생물 대신 식물을 떠올리게 됩니다. 식물은 생각이 극도로 줄어들어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매우 잔잔한 상태에서 외부와 공명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점을 고려해 수행자들은 생각을 끊거나 대폭 줄여서 식물이 되는 걸 추구합니다. 그리고 식물의 의식 상태를 선정(禪定) 여기서 더 나아가 의식이 돌멩이처럼 굳어지면 삼매(三昧)라고 각각 부릅니다. 무생물의 삼매에는 그야말..

[현덕마음공부] 무상함이 삶의 기본 인식이 되어야 한다

무상하다는 것은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항상하다는 무의식적 착각에서 무상하다는 의식적 인식으로 깨어나면 착각이 일으키는 욕망과 교만을 제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아의 과도한 부풀려짐을 제거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사랑하고 정든 것들과의 이별에서 오는 상처를 완화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현덕마음공부] 불교에서 바라보는 괴로움은 인지적인 것이다

괴로움 자체는 심리적인 것이지만 불교에서는 그 원인을 인지적인 데서 찾는다. 한마디로 전도몽상, 즉 뒤집어진 꿈같은 생각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불교가 정견의 종교인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심리적, 생물학적, 인지과학적인 측면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다. 보고 싶은 대로 볼 때가 많다. 그것이 불합치와 실패를 가져오고 괴로움을 불러들인다. 사성제의 고집멸도에서 고의 원인인 집성제는 갈애를 말한다. 그러니 멸성제는 갈애의 제거에 있다. 그리고 갈애의 제거는 의식의 경향성을 타파해야 가능하다.

[Danye Sophia]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불교의 '보시행(布施行)' 이것이 진짜 불교의 '보시행'이다!!

대승불교의 수행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을 꼽자면 육바라밀(六波羅蜜)이 있습니다. 이는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에 이르는 여섯 가지의 수행인데 이 가운데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보시(布施)입니다. 보시란 쉽게 말해 부처님의 법이 세상에 널리 퍼지도록 물질 혹은 재능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를 바쳐야 제대로 된 보시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령 재물을 100억 정도를 가지고 있다고 치면 이 가운데 몇 프로를 떼어서 보시해야 공덕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걸까요? 재산의 규모를 최대로 확장해서 재벌 회장쯤 된다면 또 얼마만큼의 불사를 해야 부처님이 보시기에 흡족해하실까요? 부자가 아니어도 불제자들은 자신의 처지에서 이런 의문을 품곤 합니다. 보시의 정확한 기준과 잣대가 뭐냐는 것이지요...

[Danye Sophia] 당신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하는 바로 그것, '락(lock) - 뇌의 자물쇠'란 무엇인가

속도가 너무 빠를 땐 으레 락(lock)을 걸어 놓습니다. 락(lock)은 전동 킥보드에서 슈퍼카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걸려 있는데 이는 적당한 안전 속도를 유지하기 위한 대비책입니다. 그런데 그 락(lock)이란 건 비단 이런 탈것들에만 걸려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에도 락(lock)이 걸려 있긴 매한가지입니다. 가령 빛의 속도를 보면 대략 초속 30만km가 나옵니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물질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여서 이것을 넘어설 수 없다고 합니다. 30만km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없도록 락(lock)이 걸려 있는 것이지요. 이런 락(lock)에 의해 빛이 움직이는 것처럼 착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사실 빛은 움직임이 없는데 락(lock)에 의해 설정된 대차항수 때문에 초속 ..

[현덕마음공부] 그냥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이 있다. 생존과 번식에 기여하는 감정이라는 진화심리학적 해석이 있고, 목적의 의미와 과정의 재미라는 인지적 행복론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저마다 일정한 고유의 행복값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유전적 소인이 크고 환경의 영향은 생각과 달리 크지 않으며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태도라는 것이다. 인간은 조건부 행복론의 신봉자이기도 하다. 만약 ~하면 행복할 텐데!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행복으로 가는 데 걸림돌이다. 우리는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 행복의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조건 없이 그냥 행복할 가능성에 대해서다. 생각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발생하는 모든 일에서 행복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이란 판단이고, 상상이고,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그..

[Danye Sophia] 종교가 사라진 세상! 지옥일까? 천국일까?

예수가 재림하면 가장 먼저 목사들에게 맞아 죽을 거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런 해괴한 얘기가 회자하는 이유는 종교의 근본적인 문제에 기인합니다. 그건 다름 아닌 ‘신격화’입니다. 동물의 세계는 한마디로 적자생존입니다. 사람 역시 형태만 다를 뿐 구조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욕심 가운데 권력욕이 가장 큽니다. 사실 서열 싸움은 좁다란 골목에서부터 노인정까지 예외가 없지요. 정치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철면피가 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 역시 권력욕 때문입니다. 권력욕은 너무 강해서 여기엔 천륜도 피해 가지 못합니다. 역사를 보면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와 형제를 도륙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던가요. 그런데 세속의 이런 권력욕은 종교에 비하면 그저 ‘새 발의 피’입니다. 세속의 권력은 하드웨어를 장악하..

[Danye Sophia] 불교의 핵심은 '마음 비우기'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종교라고 하면 신앙을 빼놓고는 논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 없는 종교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신앙을 정의하자면 ‘우러러 믿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걸까요? 神이 창조주인 것을 믿고, 그 神이 나를 구원해 줄 것을 믿습니다. 구원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나에게 여러 가지 복을 내려 준다는 사실만은 반드시 믿어야 하지요. 그래서 종교의 신앙이란 결국 ‘나를 잘 되게 해 줄 것을 믿는 마음’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 神이 구세주인 것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일이지만, 구세주인 것이 증명된다고 해도 그 神이 무슨 이유로 ‘나’를 구원해 준다는 것인지에 대..

[현덕마음공부] 당신은 자유로운가? 우리는 자유롭기로 결심한 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하지만 자유롭다고 느끼지는 못한다. 외적 자유는 사회적으로 진보해 왔지만 내적 자유는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우리는 조건 지어진 존재이며 관계에 얽힌 존재이다. 그것들의 상호작용으로 나와 나의 성격이 만들어지는 데 때문에 나는 '형성된' 존재다. 스스로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삶은 아닌 것이다. 자유를 방해하는 것은 이렇게 형성된 존재가 되어가는 와중에 내적으로 수용된 권위이고 그것이 의존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부자유의 원천인 것이다. 이것을 직시하고 자연스럽게 떠날 수 있을 때 우리는 내적으로 자유로워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덕마음공부] 여의치 않은 당신에게,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나를 바꾸어보자.

세상은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도 있고 자신을 바꿀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둘 다 필요하다. 대부분의 충돌은 생각의 차이에서 온다. 세상을 바꾸기에 앞서 자신을 바꾸어야 하는 이유는 사고방식의 차이가 충돌의 주요 원인이기 때문이다. 사고방식은 개인의 독특한 역사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모두 편향이 있다. 이 편향을 고집할 때 일어나는 나의 괴로움을 직시하고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매우 유익한 작업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Danye Sophia] 불교 염불 수행의 진실을 낱낱이 파헤친다!

불교 수행에 있어서 참선과 더불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염불에는 소원성취를 위해 부처님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지명(指名)염불’이 있고 부처님을 닮아가기 위해 붓다의 상(象)을 마음에 비추는 ‘관상(觀象)염불’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성품과 공덕을 기리는 ‘관송(觀頌)염불’이 있고요. 어느 것이 되었든 궁극에는 부처님의 가피를 입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습니다. 특히 염불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아미타불 진언’은 서방정토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발원하는 일종의 정토신앙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염불은 참선에 비해 그 공효가 떨어지는 걸까요? 다시 말해 재가신자나 하근기의 수행자들에게 적합한 수행법이 맞을까요? 대개 참선이나 위빠사나, 간화선을 하는 수행자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