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523

중도론19. 깨달음, 당신이 몰랐던 3가지 핵심 키워드(有, 無, 空)

3. 有, 無, 空의 화두를 잡아라 1) 제1원인과 有, 無, 空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한가할 때면 불쑥 튀어나와 머리를 어지럽히던 문제가 있었다. ‘우주가 끝이 있으냐 없느냐’에 관한 의문인데 당시엔 그것이 그렇게 난해하고 혼란스러웠다. 물론 138억 광년에 이르는 우리 우주를 놓고 보면 끝이 있다. 하지만 공간을 기준으로 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우리 우주 너머 펼쳐져 있는 공간을 무한대의 속도로 질주하면 끝이 나올까? 끝이 있다면 그다음의 공간은 또 무엇인가? 만일 공간의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무슨 이유로 그럴 수 있는지 의아했다. 혹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같은 공간을 맴돈다고 말하지만 그런 닫힌 공간을 포괄하는 열린 공간의 문제가 또 남는다. 결국 공간의 끝이 있어도 모순이고 없..

중도론18. 그냥 깨닫는 법! 이것이 진짜 깨달음, 무상정등각 - 수학적 증명

2. 대칭을 깨고 자유로워라. 실존에 대한 궁구는 인류에게 이성이 싹트면서 시작하였다. 고대의 철인들은 삼라만상이 비롯하게 된 제1원인을 탐구했다. 그것을 X로 놓고 그 답을 구했다. 물, 불, 공기, 원자, 신.. 등등 수없이 많은 것을 X에 대비했지만, 모두 자존의 문제에 걸리고 말았다. 유는 자존할 수 없다는 진리 앞에 그들은 낙심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無를 X의 답으로 들고나오기 시작했다. 無는 충분히 자존의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창조의 문제에선 답을 알 수 없었다. 無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1) 수학과 제1원인 결국 고대의 철인들은 X의 답을 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X는 세월이 흐르면서 수학의 영역으로 넘어왔다. 수학자들은 차원을 만들어 냈..

[현덕마음공부] 양자역학과 무아

양자역학은 원자를 실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관련된 물리량들(질량, 속도, 위치등)의 상호작용 정도로 본다. 그럴 때 측정된 원자에 대한 사실들을 더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계를 도는 행성들이라는 케플러 이미지는 제거된다. 이름이 있다고 곧 그에 해당하는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붓다가 강조한 말이다. 아트만이 그 대표적 오용 사례라고 보았다. 인간이란 아트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체라고 본 것이다. 이럴 때 착각이 낳는 오류 즉 집착을 벗어날 수 있고 괴로움이 종식될 수 있다.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의 융회관통

둘 다 이고득락의 불교라고 불리는 것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학문주의와 선정주의를 경게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연기와 공을 일치시킨 중관학파 이후에 궁극적 깨달음도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무아와 진여(법신, 여래)는 표현상 정반대의 측면에 서 있어서 뚜렷이 구별되는 것도 사실이다. 연기법의 터득은 정사유의 상태에서 가능하고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언어도단심행처멸에서 가능하다. 생각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개아에서 탈피하므로 번뇌의 제거가 가능하다는 점,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상통하고 있는 불교라고 말 할 수 있다.

중도론17. 그냥 깨닫는 법! 이것이 진짜 깨달음, 무상정등각 - 해인을 쥐어라

해인을 쥐어라. 실존을 형상화하면 어떤 모양이 적합할까? 언어로 담지 못하는 실존을 어떤 구체적인 모양으로 그려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그런 점을 사전에 두고 가장 근접한 형태의 도상을 설정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일체의 머무름이 없으면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초월적 존재여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건 딱 두 개 뿐이다. 점과 원이다. 점은 위치는 있지만 면적이 없다. 위치가 있기에 유이지만 면적이 없어 무이다. 그래서 비유비무이다. 이런 점과 같은 것이 원이다. 어딘가에 걸려 있는 모서리를 전부 없애면 원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모서리가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 속 이론에선 원이 가능하지만 실제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

중도론16. 그냥 깨닫는 법! 이것이 진짜 깨달음, 무상정등각

세존은 어느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그냥 깨달았다. 이것을 일러 중도라고 한다. 여기서 가운데 중자는 치우침이 없다는 뜻으로 쓰였다. 모든 착을 놓아버림으로써 순수 본연의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세존의 증도는 곧 그냥 있는 상태로 정의할 수 있고 따라서 깨닫고자 한다면 그냥 깨달으면 된다. 어떤 특별한 방법이 없기에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그 자리에서 깨달을 수 있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면 독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깨달음을 마음대로 이룰 수 있다면 세상에 부처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거듭 말하자면 깨달음은 깨닫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 즉시 이루어진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서 깨달음이 요원하게 된 것이다. 세상엔 금강발원을 세우고 목숨을 바쳐 가면서..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 (9) 몽산 덕이 선사의 간화선

대혜졸고의 간화선은 백년 후 몽산 덕이선사에 와서 변화를 겪는다. 좌선과 용맹정진을 강조하고 동정일여와 오매일여를 경계로 제시하였으며 간단없이 화두를 들어 타성일편이 되는 것을 중시했다. 고려말 태고 보우 선사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한국의 간화선은 몽산 덕이의 간화선이다. 이것은 염불선의 기법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 (8) 묵조선

묵조선은 간화선을 주창한 대헤종고선사와 동시대의 인물인 굉지정각선사에 의해 주창된 선법이다. 본각에 깊이 믿어서 시각(다시 깨달으려는 시도)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앉아서 묵조하는 것은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본각임을 누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쉼, 방하착, 오염되지 않음의 혜능 법맥을 충실히 잇고 있는 선법이다. 의식의 깨어있음으로 충분하므로 따로 화두를 드는 등의 유위적 방법론이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중도론15. 붓다의 깨달음, 무상정등각(4)

싯다르타는 어떻게 해야 수행자들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자리에서 그냥 깨닫게 할 수 있는지 알아냈다. 그 길은 쉬우면 쉽고 어려우면 어려운 길이다.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수행 그것이 바로 불법인 것이다. 이제 싯다르타는 엄지손가락에 해당하는 가르침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너무 적거나 부실하면 엄지손가락은 올라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방대하고 현란하면 손가락 전체가 펴지게 되어 다시 주먹을 쥐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그는 깨달음에 꼭 칠요한 정수만을 모아 가르침의 체계를 세웠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苦이다. 苦는 자신을 괴롭혔던 생로병사일 수 있고 또는 차원의 한계에서 오는 무지에 대한 갈증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었이든 간에 삶과 존재에 대한 고를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그래야 깨달음..

중도론14. 붓다의 깨달음, 무상정등각(3)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는 것인가? 그 답은 매우 단순하다. 그냥 있지를 못해서이다. 그들은 무언가에 着이 되어 그냥 있지를 않는다. 着을 떼어 무애한 경지로 나아가는 수행자들도 그렇다. 무애로 간다지만 실상은 거기서도 또 着에 붙어 버린다. 싯다르타 자신도 그러지 않았는가. 가아에서 떨어져 진아에 붙었고 다시 불이를 가지고 절대에 가서 붙었다. 이것저것 모두 떼어내고는 끝내 해탈에 가서 붙었다. 당시 그는 모든 着이 없어졌다고 믿었지만 심연에는 자신도 인지하기 어려운 着이 작동하고 있었다. 着은 너무나 교묘하여 앞선 세 스승마저 속였다. 어느 무엇을 이루려는 마음이 일모라도 있으면 着은 발생한다. 그렇다고 무아로 가서도 안 된다. 무아엔 着도 없지만, 깨달음을 인지할 알아차림도 없다. 깨..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 (7) 대혜종고선사의 간화선

송나라때 대혜종고 스님은 간화선을 창시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살이 있는 생생한 선문답이 공안을 연구하는 죽은 참구로 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화두 제시를 통한 수행법을 제시한 것이다. 화두는 언어도단 심행처멸을 위한 방법이다.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하는 자가 사라지는 것이다. 화엄경의 '신구의의 의식적 활동이나 사념 분별을 떠나 본성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앞뒤가 끊어지는 체험을 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것은 '시각에서 본각으로 나아가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능엄경의 취지와도 상통한다고 하겠다.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6) 불성론

중국선은 불성론의 이해와 관계가 있다. 불성이란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원래 모두 깨달아 있다는 입장으로 바뀐다. 그리고 선불교에서는 입지돈오를 얘기한다. 3아승기겁이나 맹렬한 명상수행이라는 방법론을 밀어냈다. 원래 깨달이 있으므로 수행주의는 깨달음을 제작하려는 의도의 발로여서 본각이라는 사실에 어긋난다고 보는 것이다. 선불교의 방법론 혹은 수행론은 본각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조동종의 묵조선과 본각이지만 시각을 강조하는 임제종의 간화선을 양대 축으로 발전하게 된다.

중도론13. 붓다의 깨달음, 무상정등각(2)

이제 싯다르타의 당시 현장으로 몰입해 보자. 그는 과연 어떻게 무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가? 보리수나무 아래에 좌정한 싯다르타,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무심하면서도 허탈했고 청정하면서도 혼탁했다. 구도의 끈 자락은 이미 끊어져 맥없이 나풀거렸고 무엇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메말라 버렸다. 이제 싯다르타가 가야 할 길은 완전히 증발했다. 환속할 수도 없고, 수행의 길을 계속 갈 수도 없다. 세상 어디에도 자신이 갈 길은 없었다. 연명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싯다르타의 의식은 마치 목적을 잃고 표류하는 부평초처럼 의지처를 잃었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그냥 앉아 있었다.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상태가 되어 그냥 있었다. 꾸며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

중도론12. 붓다의 깨달음, 무상정등각

싯다르타는 세 명의 스승으로부터 깨달음에 이르는 몇몇 수행법을 익혔다. 첫 번째는 고행을 통한 위빠사나로 진아를 찾는 수행이고 두 번째는 불이의 마음으로 절대에 이르는 수행이고 세 번째는 무소주하고 일체무애하여 해탈하는 수행이었다. 이 세종류의 수행법 외에도 싯다르타는 다른 세 곳의 수행법을 곁눈으로 보고 잠시 따라 한 적이 있었다. 호흡법이나 기도, 요가의 차크라 운용 같은 것인데 잠시 해 보고는 깨달음과 거리가 있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따라서 그가 세간의 수행법에 관심을 가진 것은 총 여섯 가지이고 그 가운데 세 명의 스승은 실제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싯다르타가 그동안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 그건 간략히 진아(본성), 반야, 절대, 무아, 해탈이었다. 이 다..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 (5) - 공안의 역할

학문도 아니고 명상도 아닌 선불교의 방법론(길 없는 길)은 공안이다. 공안은 스승과 제자의 선문답이다. 이를 통해 제자는 언어도단 심행처멸 즉 말 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 길은 정신력의 완전한 소진, 논리와 언어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통한다. 쥐가 쥐덫에서 빠져나오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극점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빠져나오려는 자가 죽어버리는 것이다. 주객 분리가 사라지고 구하는 자와 진리 경험하는 자와 경험 내용의 구분이 사라진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경향성이 있는 의식의 극복과 상통한다. 초기불교든 선불교든 이를 통해서만 고의 소멸이 가능하다.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4) 중국 선의 두 갈래

선불교는 시작부터 중관파와 유식학파의 영향을 빋았다. 사상적 궤도는 초기 붓다의 원음보다는 대승의 교리에 의존했다. 대승의 교리는 붓다가 부정했던 형이상학 즉 언어 표현이 불가능한 궁극적 실재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계합의 방법으로 다시 점오 돈오의 두 갈래 길이 생겨났다. 오조 홍인의 제자 신수의 북방선은 점오를 혜능의 남종선은 돈오를 주창하였고 이후 혜능의 남종선이 중국 선의 주류가 되었다.

중도론 11. 깨달음을 얻기 위한 3가지 길(3)

3. 싯다르타의 세 번째 구도행, 해탈 싯다르타는 다시 이곳저곳을 배회하였다. 여러 곳을 거치다가 한 곳이 눈에 띄었다. 라즈기르 지역을 지나다가 700여 명의 수행자를 거느리고 있는 웃다카 라마푸타라는 영적 스승에 관한 소문을 들은 것이다. 당시 그는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져 있었다. 생각도 아니고 그렇다고 생각이 아닌 것도 아닌 즉 해탈의 경지에 오른 스승이라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나타나자 한 수행자가 그를 안내해 라마푸타에게 데려갔다. 이런 걸 보면 당시 출가자들 사이에서 싯다르타의 이름이 꽤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마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 사실부터가 남달랐고 수행에 임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용왕매진하는 그의 구도욕이 화젯거리였을 것이다. 아니면 그의 출생에 얽힌 ..

중도론 10. 깨달음을 얻기 위한 3가지 길(2)

2. 싯다르타의 두 번째 구도행, 절대 싯다르타는 여기저기 배회하며 영적 스승에 관한 소문에 귀 기울였다. 그가운에 가장 주목을 끈 이는 바이샬리 지역에서 가르침을 펴고 있는 알라 칼라마였다. 우선 120세라는 그의 나이부터가 그랬다. 16세에 출가했다고 하니 무려 104년 동안이나 수행하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깨달음에 있어서 나이를 따지는 건 우매한 일이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수행자들이 300여 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싯다르타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했다. 싯다르타는 단숨에 알라라 칼라마를 찾았다. 허나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관문을 거쳐야 했다. 싯다르타가 머뭇거릴 때 알라라 칼라마가 나타났다. “젊은이가 싯다르타인가?” 알라라 칼라마는 어찌 되냐 영문인지 싯다르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네..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3) 직지인심 견성성불

https://youtu.be/V00hj57-uuA 선불교는 소극적으로는 교외별전 불립문자를 내세웠다. 그럼 적극적으로 어떻게 직지인심 견성성불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그 방법은 정신력의 완전한 소진이다. 주관이 객관을 이해하는 방식의 완전한 실패와 내려놓음이 주는 심리적 자아의 종말이다. 모든 궁리의 실패 끝에 궁리하는 마음이 사라진 후에 깨달음이 있다.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2) 중국의 선불교

7세기 달마가 중국에 선을 전래함으로써 중국의 선불교가 시작되었다. 중국적 지성과 대승불교의 만남과 꽃 피어남으로 보기도 한다. 선불교는 대승의 중관학과 유식학을 승계하면서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입지성불, 돈오라는 점에서 아승기겁 동안 세세생생의 보살행도 아니고 학문주의도 아니고 좌선명상도 아니며 신앙도 아닌 것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현세적이고 간단한 것을 좋아하는 중국적 감성에 맞는 변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길 없는 길'이라는 방법론 아닌 방법론을 제시하며 불교의 이해와 수행에 큰 획을 그은 것은 분명하다.

중도론 9. 깨달음을 얻기 위한 3가지 길!

1. 싯다르타의 첫 번째 구도행, 진아 싯다르타는 생로병사의 무상함을 절감하고 참된 존재를 깨닫기 위해 출가하였다. 당시 그는 수행을 해 본 전력이 없었고 그렇다고 철학적 견식이 풍부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을 이끌만한 스승을 찾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찾은 첫 번째 스승은 밧가와이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숲속에서 고행을 하면서 마음을 닦고 있었다. 한쪽 다리로 선 채 최대한 오래 버티는 것은 기본이고 못이 박힌 판자 위에 서서 괴로움을 참거나 날카로운 바위에 살가죽을 문지르며 통증을 인내하는 등 여러 종류의 고행을 실천하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며칠 동안 그들 무리에 섞여 자신이 몸담을 만한 수행인지 유심히 살폈다. 어느 날 싯다르타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밧가와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싯다..

중도론 8. 깨달음의 6가지 함정(5)

6. 진아를 찾아 무주가 되다 초기불교는 철저히 진아론을 배척했다. 진아론은 철학적으로 보면 ‘존재론적 본체를 인정하는 주장’을 말한다. 싯다르타가 이런 진아 대신 본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를 들고 나옴으로서 불교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후 대승불교가 출범하면서 다시 진아론이 대두되었다. 아비달마에 보면 자성을 인정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오늘날까지 논란의 불씨가 되고 있다. 어쨌든 힌두교의 아트만과 유사한 것이 대승불교에 나타났는데 이때의 진아는 엄밀히 따져 아트만보다는 그 의미의 폭이 커졌다. 아트만은 브라만의 작용적 측면을 강조한 개념으로 생각(정보)으로 얼룩지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말한다. 이는 참된 자아로 해석되기에 참나와 비슷하다. 이에 비해 브라만은 스스로 존재하며 영원불변하는 실존의 개념이 ..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1)

선불교는 대승불교다. 대승은 공을 내세운다. 그것은 개체성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무아이지만 공이 궁극의 실재라는 측면에서는 진아다. 그리고 이것이 붓다의 근본 교의라고 주장한다. 대승의 경전, 중관 철학과 유식 수행론은 모두 이 무아와 공(실재로서의) 간의 긴장을 중재하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대승 또한 무아를 기초로 한다는 것은 합의할 수 있는 교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모습은 서로 확실히 달라진다. 어느 것이 진짜냐 혹은 맞는 것이냐는 가리기 어렵다. 자유로운 지성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현덕마음공부] 불교와 해체주의

모든 사상이 그렇듯이 불교 또한 해체와 재구성의 종교다. 초기불교는 인간을 기존의 아트만에서 오온으로 해체해서 설명했다. 대승(유식)불교에서는 주객분리의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불이사상을 주장했다. 각각은 심리적 접근과 인식론적 접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아의 구현과 번뇌의 종식이라는 목적은 같았지만 가는 길은 골짜기와 능선만큼 달랐다고 할 수 있겠다.

중도론 7. 깨달음의 6가지 함정(4)

5. 무아지경에 이르다. 조사들의 어록에 보면 깨달았다고 말하는 수행자들을 주장자로 내리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수행자가 아픔을 호소하면 “지금 아파하는 놈은 누구인고?”하면서 일침을 가한다. 특별히 깨달음을 거론하지 않아도 수시로 몽둥이를 날리거나 욕설, 고함을 해대는데 이런 언행들은 모두 참된 본성을 깨우치게 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무아에 빠져 자성을 망각하는 것에 대한 경고라고나 할까. 사실 사마타 수행에 깊이 몰입하다 보면 물론 쉬운 건 아니지만 간혹 ‘나’가 없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가 없으니 생로병사가 없고 나아가 시공도 없다. 소멸될 ‘나’가 없으니 영생이고, 일체의 번뇌망상이 없으니 열반이 아니랴. 얼핏 보면 무상의 경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를 없애려는 것은 동서고금을 ..

중도론 6. 깨달음의 6가지 함정(3)

4. 위빠사나를 통해 알아차림만 남다. 적잖은 수행자들이 불법을 위빠사나로 알고 있다. 싯다르타가 중도의 상태에서 위빠사나를 가지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와 오늘날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퍼져 있는 남방불교에서는 위빠사나를 수행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위빠사나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알아차림’, ‘마음챙김’, ‘바로 보기’ 정도가 된다.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니 마음을 살피는 것은 당연하다. 마음을 무엇이 온통 메우고 있는가? 바로 생각이다. 그러니 생각에 대한 관찰은 수행의 태동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생각의 집착력은 너무나 강하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着으로 표현한다. 생각의 着에 대항해 봤자 백전백패이다. 그래서 생각을 바로 떼려는 대신 그것을 살피는 관찰함으로..

[현덕마음공부] 꿈 같은 삶

삶은 꿈과 같다고들 한다. 돌이켜보면 꿈결 같거나 꿈만 같은 것이 삶이다. 잠들어서 꾸는 꿈이든 깨어 있는 현실이든 생생하지만 과거를 재현할 수 없고 기억 속에서만 재생되는 동영상이라는 점에서는 현실의 삶과 꿈이 다를 바 없다. 삶을 꿈으로 보는 관점이 마음공부에 도움이 된다. 괴로움은 생각과 관련이 있다. 삶을 깨어서 꾸는 꿈이라고 볼 때 그 핵심도 생각이다. 심리적 생각의 종식이 번뇌의 근원을 다스리는 지름길이다.

[현덕마음공부] 명색으로부터의 자유

사람은 아트만이 아니고 명색이다. 정신과 육체의 결합이다. 본질은 비어 있고 작용만 있는 오늘날로 보자면 특수목적법인이다. 실체인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나라고 동일시하는 데서 고통이 시작된다. 명색을 나라고 생각하는 동일시가 고통의 그릇인 셈이다. 사람을 명색으로 보는 관점은 '나'를 '그것'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고통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실마리가 된다.

중도론 5. 깨달음의 6가지 함정(2)

2. 대자대비한 보살심으로 충만하다. 지방 어느 사찰의 스님 한 분이 남몰래 자신의 신장을 떼어 보시한 일이 있었다. 나중에 이 사실이 몇몇 스님에게 알려졌다. 그러자 스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보시한 스님이야말로 진정한 각자이며 보살이라고 추앙하였다. 대자대비한 마음을 깨달음으로 연결한 것이다. 세존의 전생담에 보면 눈을 떼어 보시하고, 굶주린 사자에게 몸을 보시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같은 맥락이다. 대승불교의 보시바라밀을 보면 하급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보시하고 중급으로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 보시하고 상급으로 자신의 생명을 거리낌 없이 보시한다. 이쯤 되어야 보살이며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과연 중생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마음이 있으면 저절로 깨닫게 될까? 보시행이 거룩하고 존주..

중도론 4. 깨달음의 6가지 함정(1)

수행의 발단은 苦이다. 苦란 시공의 한계에서 오는 생로병사에 의한 것도 있지만 더 큰 것은 실존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명에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한평생 살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존재 이것에 대한 자각에서 고가 싹트고 고를 해결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수행은 시작된다. 수행의 첫 단추는 대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화두이다. 차원의 굴레에 갇혀 번뇌망상을 일으키며 촌각을 살아가는 나 그것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구성하는 것들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를 꾸미고 있는 생각을 관찰하게 되는데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그것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수행이 일단락된다. 이렇게 해서 空의 상태가 되면 무아의 삼매경에 들기도 하고 때론 공에 내재된 초지성을 통해 진아를 깨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