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506

[현덕마음공부] 중독된 인생, 만족도가 줄어들수록 갈망과 의지는 더욱 커진다

노화에 따라 뇌의 작업 정밀도와 수행력은 떨어진다.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삶에서 성취가 주는 만족감도 저하한다. 뇌의 이런 문제를 갈망(의지)을 크게 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한다. 생존의 본능이다. 이것이 중독의 패턴이다. 막상 예전만큼 만족스럽지 않지만 다음에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며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생명의 본능이야말로 내적 속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갈망으로부터의 자유가 진짜 자유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상태는 텅 빈 상태와 같다.

중도론25. 당신이 붓다인 과학적 증거! 당신은 언제나 깨달아 있다!

모든 수행은 현재의 나가 중생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번뇌망상이 그치질 않고 그렇다고 지혜가 출중한 것도 아니니 중생임에 틀림없다. 중생이 살아가는 삶 우여곡절이 많겠지만 결국엔 병들어 죽고 마는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고해를 일찌감치 절감하는 사람들은 영생과 열반에 초점을 맞춘다. 대부분은 종교적 믿음을 통해 쉽게 얻으려 하지만 철학적 식견을 갖춘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을 성취하려 한다. 후자의 사람들을 가리켜 수행자라 한다. 어떤 수행이 되었든 대칭을 깨고 자유로워지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그런데 중생을 전제로 한 출발은 그 자체로 매우 대칭적이다. 중생과 붓다로 가르고 시작하지 않는가. 자신의 현재 모습을 진솔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는 좋다. 하지만 수행에 임해서는 중생과 붓다의 이분법적..

중도론24. 이것이 참된 위빠사나 수행이다. 관찰만하지 말고 맘껏 즐겨라!

5. 관찰하고 즐겨라. 생각을 관찰하여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 이것을 일러 위빠사나라 한다. 그러데 위빠사나에 대한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바로 즐기는 것이다. 생각을 관찰하는 이유가 뭔가? 생각이 일어나는 방향 자체가 실존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생각은 나를 분명히 하려고만 한다. 그러다 보니 수십조 개의 생명(세포)으로 이루어진 몸뚱이와 여기서 발생하는 무수한 정보의 이합집산을 통틀어 나로 규정한다. 그리고는 피조물이니 중생이니 하면서 무상함과 고해를 토로한다. 바로 한 줄기 생각에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기가 막힌 허상이다. 이런 이유로 위빠사나에서는 생각을 관찰하여 그것이 만든 다의 허상에서 탈피하려 한다. 대단한 설득력있는 수행 방법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반쪽짜리이다. 1..

[현덕마음공부] 뇌와 마음 2. 뇌는 효과를 발휘하고 싶어 한다.

뇌는 자극 없음을 견디지 못한다. 산만해지고 과거의 기억이 몰려오며 맥락 없는 연결과 사고의 전개로 환각과 환청을 경험하기도 하면서 온전한 정신 통제가 힘들어질 수도 있다. 큰 스트레스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명상을 할 때 초심자가 겪는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 텅 빈 상태에 대한 접근 방식이 핵심이다. 주체적으로 추구해 가느냐 타의에 의한 감각 박탈을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갈라지는 동일한 현상인 것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원리에 따라 활동과 수면의 경험에 따라 뇌는 효과를 발휘하고 싶어 하는 것과 동시에 때때로 자발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텅 빈 상태를 갈망하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둘 다 필요하다.

[현덕마음공부] 뇌와 마음 1.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인간은 진공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끝없는 자극과 반응을 추구한다. 그러나 자극의 홍수와 다양한 체험 속에서 진정으로 만족할 만큼 체험에 몰두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버킷리스트를 체크하는 것이 주 과제가 된다. 나아가 SNS상의 "좋아요"라는 반응이 자신의 존재감의 근거가 된다. 행복의 주도권을 넘겨준 상황이 된 것이다.

중도론23. 사이비 불교인! 그들이 외도(外道)에 빠지는 이유

2) 의심과 왜곡 분별은 논리적으로 의심해 들어가면 그것의 뿌리 약화된다 그래서 수행은 오로지 의심삼매여야 한다. 의심의 궁극까지 가서 의심이 없는 경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의심이 쉬운 것 같지만 몇 발짝 들어가다 보면 주저앉기 일쑤이다. 지와 혜가 바닥나서 그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왜곡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이다. 왜곡이 무엇인가? 그건 논리의 부재를 말한다. 간단히 말해 논리가 있으면 의심이고 논리가 없으면 왜곡이다. 그래서 논리가 탄탄하면 정도이고 논리가 허술하면 외도이다. 얼룩을 지우면 바탕이 드러나듯이 외도를 바로 알면 정도가 분명해진다. 외도는 태생적으로 논리를 꺼린다. 왜냐, 논리가 세워지면 자신의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도는 한결같이 논리를 부정하거나 감추려고 한다. 구체적..

중도론22. 세존의 깨달음이란 어떤 상태일까? 그후 어떤 과정으로 생각을 일으켰을까?

4. 분별에 속지 마라. 1) 분별이란 무엇인가? 5차원 실존에 이르면 유, 무, 공을 비롯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체계가 모조리 부서진다. 2차원 평면 세계에서 3차원 입체 세계로 넘어오면 그동안 알고 있던 2차원의 지식들은 까마득한 먼 나라 얘기가 되고 만다. 그렇듯 실존은 가히 천지개벽을 억만 배 이상 하는 것보다 큰 충격을 몰고 온다. 세존은 세 명의 스승으로부터 진아와 절대, 그리고 해탈의 경지를 배웠지만 그건 모두 4차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3차원의 의식 구조에서 보면 4차원으로의 도약은 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변화이다. 수행자들이 평생을 매진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높고 높은 경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세존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5차원 실존의 열매마저 움켜쥐었다. 인류역사상 처..

[현덕마음공부] 관찰하는 자아가 왜 중요한가?

사람은 두 개의 자아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경험하는 자아(주로 감정적)고 다른 하나는 관찰하는 자아(주로 이성적)다. 감정적 상처는 우선은 위로받아야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반드시 관찰, 성찰, 직면, 해방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관찰하는 자아의 필요성과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왜곡된 인식패턴을 인지하고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현덕마음공부] 평화를 염원하며

전쟁같은 삶이라고 표현하지만 세상에는 실제로 전쟁이 일어난다. 인류의 문명은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하고 번영을 이루는 방법을 상당히 발전시켜 왔다.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현상과 내 마음속을 연관시켜서 보아야 한다. 내 마음속에도 갈등과 투쟁이 있다. 그것이 인간관계, 사회, 국가 차원에서의 투쟁과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 마음속에서 번뇌를 제거하는 일이 평화를 위해서도 시급한 일임을 알 수 있다. 나도 세상의 비참에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더욱 마음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이유다.

중도론21. 간화선 '화두 수행'의 함정!

(3) 논리와 반야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90여 개의 선방에서 2천여 명의 수행자들이 화두를 잡고 있다. 그들은 하루 평균 3~4시간의 수면만을 취하며 조주선사의 무자 화두에서부터 이 뭣꼬, 만법귀일, 일귀하처, 정전백수자, 구자불성, 마삼근, 같은 무려 1700여 개에 이르는 공안에 수행의 성패를 맡기고 있다. 이들이 닦고 있는 간화선은 반야에 역행하는 매우 독특한 수행법이다. 진리를 구하려는 마음엔 나가 있고 그렇기에 아무리 반야를 증득해도 실상을 보지 못한다. 이에 간화선은 반야의 반대인 모름을 가치로 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화두이다. 화두의 답은 없다. 없기 때문에 모르는 의식에 머물게 되고 점차 진리를 알려는 나가 사라진다. 이렇게 해서 무아에 이르면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드러나는 것처럼 실상..

중도론20. 공(空)을 알면 얻게 되는 깨달음의 4단계

2) 유와 무의 잣대 대저 찌그러지고 불규칙한 벽돌로는 집을 올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모호한 언어를 가지고 진리를 논리적으로 알아 갈 수 없다. 그렇기에 가장 분명한 언어인 유와 무를 측정 도구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유와 무가 적용될 수 없는 예외의 경우를 가정해 X에 해당하는 공을 덧붙이게 된다. 그런데 공이 알 수 없는 X라 해서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몰고 가서는 안된다. 지금 당장 답을 풀지 못해서 X인 것이지 그것의 실체가 불분명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용수가 지근 회쟁론에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성하며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이다라고 쓰여있다. 이 뜻을 풀어보면 여러 유들이 계속해서 이합집산을 하기에 그 실체가 없고 그래서 공이라는 얘기이다. 공을 유무와 다른 어떤 존재 형태로 본 ..

[현덕마음공부] 뇌의 텅 빈 상태와 불교의 공

우리는 복잡한 생활 속에서 휴식을 원한다. 자아의 일시적 망각을 통해서 재충전하고 힘을 회복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뇌의 텅 빈 상태는 휴식 이상의 상태다. 실제로 뇌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판단하는 자와 판단하는 과정이 부재하는 상태다. 그래서 막상 이런 상태는 두려움과 경원의 상태이기도 하다. 불교 수행도 마찬가지다. 수행 중에 공의 경계가 드러나면 많은 수행자가 공포를 느낀다. 자아의 소멸 때문이다. 물론 착각이지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진입 시에 자연스레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겠다. 자의(수행)든 타의(질병 같은)든 텅 빈 상태의 뇌파는 델타파다. 평온한 것이다. 태어나기 전 자궁 속에서 깊은 잠 속에서 죽음 후 짧은 시기 동안 우리 뇌는 델타파 상태다. 본질적이고..

중도론19. 깨달음, 당신이 몰랐던 3가지 핵심 키워드(有, 無, 空)

3. 有, 無, 空의 화두를 잡아라 1) 제1원인과 有, 無, 空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한가할 때면 불쑥 튀어나와 머리를 어지럽히던 문제가 있었다. ‘우주가 끝이 있으냐 없느냐’에 관한 의문인데 당시엔 그것이 그렇게 난해하고 혼란스러웠다. 물론 138억 광년에 이르는 우리 우주를 놓고 보면 끝이 있다. 하지만 공간을 기준으로 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우리 우주 너머 펼쳐져 있는 공간을 무한대의 속도로 질주하면 끝이 나올까? 끝이 있다면 그다음의 공간은 또 무엇인가? 만일 공간의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무슨 이유로 그럴 수 있는지 의아했다. 혹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같은 공간을 맴돈다고 말하지만 그런 닫힌 공간을 포괄하는 열린 공간의 문제가 또 남는다. 결국 공간의 끝이 있어도 모순이고 없..

중도론18. 그냥 깨닫는 법! 이것이 진짜 깨달음, 무상정등각 - 수학적 증명

2. 대칭을 깨고 자유로워라. 실존에 대한 궁구는 인류에게 이성이 싹트면서 시작하였다. 고대의 철인들은 삼라만상이 비롯하게 된 제1원인을 탐구했다. 그것을 X로 놓고 그 답을 구했다. 물, 불, 공기, 원자, 신.. 등등 수없이 많은 것을 X에 대비했지만, 모두 자존의 문제에 걸리고 말았다. 유는 자존할 수 없다는 진리 앞에 그들은 낙심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無를 X의 답으로 들고나오기 시작했다. 無는 충분히 자존의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창조의 문제에선 답을 알 수 없었다. 無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1) 수학과 제1원인 결국 고대의 철인들은 X의 답을 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X는 세월이 흐르면서 수학의 영역으로 넘어왔다. 수학자들은 차원을 만들어 냈..

[현덕마음공부] 양자역학과 무아

양자역학은 원자를 실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관련된 물리량들(질량, 속도, 위치등)의 상호작용 정도로 본다. 그럴 때 측정된 원자에 대한 사실들을 더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계를 도는 행성들이라는 케플러 이미지는 제거된다. 이름이 있다고 곧 그에 해당하는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붓다가 강조한 말이다. 아트만이 그 대표적 오용 사례라고 보았다. 인간이란 아트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체라고 본 것이다. 이럴 때 착각이 낳는 오류 즉 집착을 벗어날 수 있고 괴로움이 종식될 수 있다.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의 융회관통

둘 다 이고득락의 불교라고 불리는 것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학문주의와 선정주의를 경게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연기와 공을 일치시킨 중관학파 이후에 궁극적 깨달음도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무아와 진여(법신, 여래)는 표현상 정반대의 측면에 서 있어서 뚜렷이 구별되는 것도 사실이다. 연기법의 터득은 정사유의 상태에서 가능하고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언어도단심행처멸에서 가능하다. 생각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개아에서 탈피하므로 번뇌의 제거가 가능하다는 점,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상통하고 있는 불교라고 말 할 수 있다.

중도론17. 그냥 깨닫는 법! 이것이 진짜 깨달음, 무상정등각 - 해인을 쥐어라

해인을 쥐어라. 실존을 형상화하면 어떤 모양이 적합할까? 언어로 담지 못하는 실존을 어떤 구체적인 모양으로 그려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그런 점을 사전에 두고 가장 근접한 형태의 도상을 설정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일체의 머무름이 없으면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초월적 존재여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건 딱 두 개 뿐이다. 점과 원이다. 점은 위치는 있지만 면적이 없다. 위치가 있기에 유이지만 면적이 없어 무이다. 그래서 비유비무이다. 이런 점과 같은 것이 원이다. 어딘가에 걸려 있는 모서리를 전부 없애면 원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모서리가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 속 이론에선 원이 가능하지만 실제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

중도론16. 그냥 깨닫는 법! 이것이 진짜 깨달음, 무상정등각

세존은 어느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그냥 깨달았다. 이것을 일러 중도라고 한다. 여기서 가운데 중자는 치우침이 없다는 뜻으로 쓰였다. 모든 착을 놓아버림으로써 순수 본연의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세존의 증도는 곧 그냥 있는 상태로 정의할 수 있고 따라서 깨닫고자 한다면 그냥 깨달으면 된다. 어떤 특별한 방법이 없기에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그 자리에서 깨달을 수 있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면 독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깨달음을 마음대로 이룰 수 있다면 세상에 부처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거듭 말하자면 깨달음은 깨닫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 즉시 이루어진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서 깨달음이 요원하게 된 것이다. 세상엔 금강발원을 세우고 목숨을 바쳐 가면서..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 (9) 몽산 덕이 선사의 간화선

대혜졸고의 간화선은 백년 후 몽산 덕이선사에 와서 변화를 겪는다. 좌선과 용맹정진을 강조하고 동정일여와 오매일여를 경계로 제시하였으며 간단없이 화두를 들어 타성일편이 되는 것을 중시했다. 고려말 태고 보우 선사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한국의 간화선은 몽산 덕이의 간화선이다. 이것은 염불선의 기법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 (8) 묵조선

묵조선은 간화선을 주창한 대헤종고선사와 동시대의 인물인 굉지정각선사에 의해 주창된 선법이다. 본각에 깊이 믿어서 시각(다시 깨달으려는 시도)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앉아서 묵조하는 것은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본각임을 누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쉼, 방하착, 오염되지 않음의 혜능 법맥을 충실히 잇고 있는 선법이다. 의식의 깨어있음으로 충분하므로 따로 화두를 드는 등의 유위적 방법론이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중도론15. 붓다의 깨달음, 무상정등각(4)

싯다르타는 어떻게 해야 수행자들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자리에서 그냥 깨닫게 할 수 있는지 알아냈다. 그 길은 쉬우면 쉽고 어려우면 어려운 길이다.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수행 그것이 바로 불법인 것이다. 이제 싯다르타는 엄지손가락에 해당하는 가르침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너무 적거나 부실하면 엄지손가락은 올라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방대하고 현란하면 손가락 전체가 펴지게 되어 다시 주먹을 쥐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그는 깨달음에 꼭 칠요한 정수만을 모아 가르침의 체계를 세웠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苦이다. 苦는 자신을 괴롭혔던 생로병사일 수 있고 또는 차원의 한계에서 오는 무지에 대한 갈증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었이든 간에 삶과 존재에 대한 고를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그래야 깨달음..

중도론14. 붓다의 깨달음, 무상정등각(3)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는 것인가? 그 답은 매우 단순하다. 그냥 있지를 못해서이다. 그들은 무언가에 着이 되어 그냥 있지를 않는다. 着을 떼어 무애한 경지로 나아가는 수행자들도 그렇다. 무애로 간다지만 실상은 거기서도 또 着에 붙어 버린다. 싯다르타 자신도 그러지 않았는가. 가아에서 떨어져 진아에 붙었고 다시 불이를 가지고 절대에 가서 붙었다. 이것저것 모두 떼어내고는 끝내 해탈에 가서 붙었다. 당시 그는 모든 着이 없어졌다고 믿었지만 심연에는 자신도 인지하기 어려운 着이 작동하고 있었다. 着은 너무나 교묘하여 앞선 세 스승마저 속였다. 어느 무엇을 이루려는 마음이 일모라도 있으면 着은 발생한다. 그렇다고 무아로 가서도 안 된다. 무아엔 着도 없지만, 깨달음을 인지할 알아차림도 없다. 깨..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 (7) 대혜종고선사의 간화선

송나라때 대혜종고 스님은 간화선을 창시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살이 있는 생생한 선문답이 공안을 연구하는 죽은 참구로 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화두 제시를 통한 수행법을 제시한 것이다. 화두는 언어도단 심행처멸을 위한 방법이다.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하는 자가 사라지는 것이다. 화엄경의 '신구의의 의식적 활동이나 사념 분별을 떠나 본성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앞뒤가 끊어지는 체험을 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것은 '시각에서 본각으로 나아가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능엄경의 취지와도 상통한다고 하겠다.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6) 불성론

중국선은 불성론의 이해와 관계가 있다. 불성이란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원래 모두 깨달아 있다는 입장으로 바뀐다. 그리고 선불교에서는 입지돈오를 얘기한다. 3아승기겁이나 맹렬한 명상수행이라는 방법론을 밀어냈다. 원래 깨달이 있으므로 수행주의는 깨달음을 제작하려는 의도의 발로여서 본각이라는 사실에 어긋난다고 보는 것이다. 선불교의 방법론 혹은 수행론은 본각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조동종의 묵조선과 본각이지만 시각을 강조하는 임제종의 간화선을 양대 축으로 발전하게 된다.

중도론13. 붓다의 깨달음, 무상정등각(2)

이제 싯다르타의 당시 현장으로 몰입해 보자. 그는 과연 어떻게 무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가? 보리수나무 아래에 좌정한 싯다르타,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무심하면서도 허탈했고 청정하면서도 혼탁했다. 구도의 끈 자락은 이미 끊어져 맥없이 나풀거렸고 무엇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메말라 버렸다. 이제 싯다르타가 가야 할 길은 완전히 증발했다. 환속할 수도 없고, 수행의 길을 계속 갈 수도 없다. 세상 어디에도 자신이 갈 길은 없었다. 연명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싯다르타의 의식은 마치 목적을 잃고 표류하는 부평초처럼 의지처를 잃었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그냥 앉아 있었다.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상태가 되어 그냥 있었다. 꾸며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

중도론12. 붓다의 깨달음, 무상정등각

싯다르타는 세 명의 스승으로부터 깨달음에 이르는 몇몇 수행법을 익혔다. 첫 번째는 고행을 통한 위빠사나로 진아를 찾는 수행이고 두 번째는 불이의 마음으로 절대에 이르는 수행이고 세 번째는 무소주하고 일체무애하여 해탈하는 수행이었다. 이 세종류의 수행법 외에도 싯다르타는 다른 세 곳의 수행법을 곁눈으로 보고 잠시 따라 한 적이 있었다. 호흡법이나 기도, 요가의 차크라 운용 같은 것인데 잠시 해 보고는 깨달음과 거리가 있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따라서 그가 세간의 수행법에 관심을 가진 것은 총 여섯 가지이고 그 가운데 세 명의 스승은 실제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싯다르타가 그동안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 그건 간략히 진아(본성), 반야, 절대, 무아, 해탈이었다. 이 다..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 (5) - 공안의 역할

학문도 아니고 명상도 아닌 선불교의 방법론(길 없는 길)은 공안이다. 공안은 스승과 제자의 선문답이다. 이를 통해 제자는 언어도단 심행처멸 즉 말 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 길은 정신력의 완전한 소진, 논리와 언어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통한다. 쥐가 쥐덫에서 빠져나오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극점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빠져나오려는 자가 죽어버리는 것이다. 주객 분리가 사라지고 구하는 자와 진리 경험하는 자와 경험 내용의 구분이 사라진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경향성이 있는 의식의 극복과 상통한다. 초기불교든 선불교든 이를 통해서만 고의 소멸이 가능하다.

[현덕마음공부] 초기불교와 선(4) 중국 선의 두 갈래

선불교는 시작부터 중관파와 유식학파의 영향을 빋았다. 사상적 궤도는 초기 붓다의 원음보다는 대승의 교리에 의존했다. 대승의 교리는 붓다가 부정했던 형이상학 즉 언어 표현이 불가능한 궁극적 실재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계합의 방법으로 다시 점오 돈오의 두 갈래 길이 생겨났다. 오조 홍인의 제자 신수의 북방선은 점오를 혜능의 남종선은 돈오를 주창하였고 이후 혜능의 남종선이 중국 선의 주류가 되었다.

중도론 11. 깨달음을 얻기 위한 3가지 길(3)

3. 싯다르타의 세 번째 구도행, 해탈 싯다르타는 다시 이곳저곳을 배회하였다. 여러 곳을 거치다가 한 곳이 눈에 띄었다. 라즈기르 지역을 지나다가 700여 명의 수행자를 거느리고 있는 웃다카 라마푸타라는 영적 스승에 관한 소문을 들은 것이다. 당시 그는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져 있었다. 생각도 아니고 그렇다고 생각이 아닌 것도 아닌 즉 해탈의 경지에 오른 스승이라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나타나자 한 수행자가 그를 안내해 라마푸타에게 데려갔다. 이런 걸 보면 당시 출가자들 사이에서 싯다르타의 이름이 꽤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마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 사실부터가 남달랐고 수행에 임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용왕매진하는 그의 구도욕이 화젯거리였을 것이다. 아니면 그의 출생에 얽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