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기억록’ 촬영 현장)
아무래도 지켜보는 눈이 많은 직업이잖아요.
또 그만큼 대중들한테 큰 영향력을 미치고
그래서 제가 하는 행동과 선택과 그 모든 것들을
늘 생각하고 자주 돌아볼 수밖에 없는
그런 직업인 것 같아요.
배우라는 직업은 시대를 읽고 공감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어려운 시기에 이분은 그 길을 걸으셨더라고요.
그렇게 시대를 읽고 공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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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파리라 불리던 1930년대 상하이
데뷔 후 단 몇 편의 영화로 대륙을 매료시킨 배우가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 스타로 등극해
영화 황제라는 칭호를 얻은 조선인 영화배우
김염
본명 김덕린
조선인 영화배우
가장 잘생긴 남자배우 1위
가장 연애하고 싶은 남자배우 1위
가장 사랑받는 남자배우 1위
-1934년 영화 잡지 ‘전성’ 中
중국의 젊은이들한테
최고의 우상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편지봉투에 ‘상하이 김염’이라고만 쓰면
편지가 배달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당대 최고의 스타에게 늘 그렇게 따라붙는 거죠.
멜로 영화가 계속 끊임없이 들어오고...
일제의 만주침략
중국인과 한국인의 무장투쟁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침략야욕을 불태웠던 일제
김염의 선택은 언제나 항일영화였습니다.
영화 [들장미]
남녀의 사랑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 시킨
대표적 항일 영화 1932년 作
영화 [대로]
군용 건설 노동자들의 삶을 통해
‘항일’ 의지를 보여준 영화
중국 5대 걸작 영화 중 한 편 1934년 作
영화 [장지릉운]
일제를 ‘도적떼’에 비유
주민들이 단결하여 도적떼를
격퇴한다는 내용
때로는 노동자로, 때로는 경비대장이 되어
혼신의 연기로 항일정신을 그려낸 김염
“그의 연기에는
나라를 잃은 조선인으로서
일제에 저항하는 항일정신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쑨유 영화감독
늘 주목받는 최고의 스타가 계속 항일영화에 출연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불과 20대 중반의 나이에 정말 대단한 결정을 하셨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영화 황제 김염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일제
일제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김염을 강제로 일본 홍보 영화에 출현시키려 했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찢기고 불태워진 김염의 영화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고 해도
그런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탄압과 위협을 받으면서도
다 자신의 소신을 지켜내셨잖아요.
정말 어떻게 그런 용기를 계속 내실 수 있었는지
그런데 이분의 가족 얘기를 듣고 나니까
그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아버지 [김필순]
신민회 자금 조달의 핵심 인물
병원을 운영하며, 독립자금 지원
고모부 [김규식]
파리 강화회의 민족대표로 파견
임시정부 부주석 억압
고모 [김순애]
상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사촌 [김마리아]
2.8독립선언서를 숨겨 국내로 잠입
임시의정원 최초의 여성의원
독립운동가 가문이라는 자부심을 잃지 않으며
화려한 스타의 삶 대신
자신만의 방법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김염
‘저에게는 대선배님이신데
선배님의 불꽃 같았던 삶과 정신을
소중히 기억하겠습니다’
“배우는 부자들의
심심풀이 노리개가 아니다.
자기 예술이 사회에
유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김염(1910.4.7~1983.12.27)
김민정,
김염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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