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선공부

[릴라선공부] 이 꽃은 진짜로 있는가?

Buddhastudy 2024. 5. 14. 19:58

 

 

진짜, 우리가 진짜 있는 거라면

기억을 빌릴 필요도 없어요.

기억을 빌릴 필요가 없잖아, 진짜 있는 거라면.

 

근데 내가 진짜 있었다고 믿었던 그 이야기가

기억에서 시작하잖아요.

 

이거는 진짜를 공부하는 거지

아유, 그게 그렇지이런 대충 보면 안 돼.

 

진짜 진짜라고 여겼던 일들은

시작은 스타트는 어떻게 기억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진짜라고 믿었던 그것이

겨우 기억에 의지해 있어요.

 

기억에만 의지해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게 감각이거든.

여러분 진짜 감각이라는 게 뭔지 모르죠?

감각은 그냥 순간순간의 무상한 느낌일 뿐이에요, 그냥

감일 뿐이에요.

이게 감각의식일 뿐이에요.

감각물이 아니라 의식일 뿐이라고, 감각의식일 뿐이라고.

 

우리는 감각을 근거로 존재한다고 해버리는데

그게 보이는 거, 들리는 거, 만져지는 거, 냄새 맡아지는 거

그냥 의식일 뿐인데

이게 만져지고 소리가 나니까, 있어!

이렇게 하고 있잖아, 지금.

그렇지 않나요?

이거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사실은 사실이잖아.

 

이거 하나만으로 본다면

이거는 만져지고, 소리가 나고

차가운지 아니면 부드러운지, 딱딱한지, 이게 만져지고

소리가 나고, 정보가 동원되죠.

내가 알았던 기억과 지식과 정보가 동원되죠.

 

여기서 하나씩 빼봅시다.

이름도 몰라.

소리 빼봐. 아니 만져졌던 경험도 없어, 기억도 없어.

해체해 보세요.

이게 있는가?

없어요.

그거를 옛날부터도 얘기했어요.

 

이것도 그래.

이것도 그런데

그래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의식일 뿐이에요.

의식일 뿐.

 

엄청난 사실이에요.

이거 받아들이게 되면

 

뭐냐 하면

내 몸도 그렇다는 거예요.

탁자도 그렇다는 거예요, 사물도.

 

그 모든 경험이 이것이 이런 식으로

순간순간순간순간 일어나는 의식인데

우리가 너무 무의식적으로

그게 이제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 찰나 간에 일어나는 무의식인 줄 모르고

이렇게 묶이는 거죠.

그거를 [착 한다]

이렇게 착, 집착

사로잡히는 거, 그거 집착이에요.

 

불교에서 집착은 그거예요.

순간순간 일어나는 분별 의식에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히는 게 집착이에요.

 

그럼 이게 있다 그러면 집착하고 있는 거야.

그냥 이걸 좋아해서가 집착이 아니라

이거 있어.

그럼 집착하고 있는 거야.

일어나 의식에 집착하고 있는 거야.

 

근데 그게 너무 길이 달라 있어요.

오랫동안 우리가 써왔기 때문에

그냥 일어나는, 거의 자동화돼 있는 거예요.

 

한 생각 일으키는 것도 아니야.

그냥 일어나.

이렇게 조건이 되면은

이게 종이 있네

이런이런 거에 막 의식이 일어나는 거에

이렇게 어두워지는 거

이게 집착하고 있다는 게 어두워지는 거야.

매한다 이렇게 해요.

매한다 어둡다 사로잡힌다. 다 똑같아요.

 

*~!

그럼 잘 봐요.

이게 이름이고, 기억이고, 정보이고, 감각의식이고

잡아보세요, 있나?

잡아보시라고, 있는가?

없잖아.

 

근데 우린 이렇게 감각적으로 이렇게 드러나는 의식과 소리와 분별에

그냥 덮어놓고

제대로 못 보고 덮어놓고 있어.

이게 퉁 치고 넘어가는 거지, 그냥 대충.

 

왜냐하면 대충 우리가 살아서 걸리는 거야.

내가 보기 그래.

대충 살아서 그래. 덮어놓고 살아서 그래.

누가 그랬어뭐 이런 식으로 믿어서 살아.

누군가가 얘기를 했는데 이게 종이래, 이게 있대.”

그럼 그래, 그런가 보다, 종이야하고 그냥 덮어놓고 사는 거야.

제대로 못 보고.

 

그러니까 그것도 이해는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뭐 마음이 이렇게 안정이 되면 안정이 될수록

일어나는 분별이 잘 보이거든요.

잘 보여요. 마음이 안정되면.

 

마음이 안정된다는 거는

막 분별 의식이 막 날뛰지 않고 이렇게 있으면

이게 생각이네하는 게 언뜻언뜻 보이고

우리가 공부하는 과정 중에서 마음이 안정되면서

이게 저절로 보이거든요.

 

옛날에 좌선한다고 이렇게 앉아 있으면

저기 마조가 앉아 있으면

남악회양이 와서 벽돌을 갈았다가 하는 이유가

근데 그게 공부가 잘못된 쪽으로 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몸이 가만히 있는 게 마음이 안정된 건 아니잖아.

몸을 가만히 앉히는 게.

그래서 거기서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너는 수레가 가려면 수레를 때려야 되느냐? 소를 때려야 되냐?”

하는 게 뭐냐면

소는 마음에 비유한 거고

수레는 몸에 비유한 건데

 

몸을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다고 마음이 안정되는 게 아니에요.

온갖 잡생각을 다 하고 앉아 있고 그러면

안정이 되는 게 아니고

또 그렇다고 해서 아예 생각을 끊어버려도

그거는 지혜가 밝지 않은 거거든요.

안정이 되면서 열려 있어야지.

 

근데 그게 공부가 잘못된 게 그런 거예요.

눈을 감아서 보지 않든가, 아니면 끊어버리든가

아니 어두워서 막 헤매 다니든가, 아니면 아예 안 보든가

이게 공부가 잘못된 거야.

 

아예 생각을 끊어버리든가, 아니면 막 생각 따라 돌아다니든가.

두 가지가 공부의 병인 거예요.

 

근데 생각을 하되

생각이 밝고, 생각에 매이지 않고

이게 공부가 잘 해나가는 거거든요.

 

근데 공부를 하다 보면

안정이 되면서 보인다고, 이게 보여.

, 이게 어느 순간 이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건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구나

이렇게 순간순간 찰나찰나 일어나는 감각의식,

여기에다가 온갖 지식과 정보를 갖다 붙여서

탁 순간 매해진 게, 어두워진 게

이게 사물이 있는 것으로 나한테는 느껴졌구나라고

스스로 보게 되는 순간이 오거든요.

그러면서 벗어나는 거예요.

이게 구속에서 풀려나는 거예요.

 

우리 중생의 병은 있음의 병이라고 하잖아요.

있음이라는 게 뭐가 있으면 구속이에요. 구속.

 

아까 이제 서두에 얘기했죠.

공부하기 전과

공부가 분명해지고 나서의 현상적인 게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뭐가 달라졌냐?

 

예전에는 다 있었어요.

그래서 있음이 구속돼 있었는데

이제는 있는 게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을 옛날 어른들은 이렇게 얘기했죠, 선사들은

허공에다가 발을 딛고 산다이렇게 표현하죠.

 

땅 위에 발 딛고 살다가 허공에다가 발 딛고 산다.’

이런 식의 비유적인 표현을 하는 게

허공에 발 딛으려면 내가 있어도 안 돼. 떨어져 버리거든.

 

그러니까 시간, 공간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든 게 허공이 돼야지

허공에다가 발 딛고 사는 거예요.

 

그 뭐냐? 뭐가 어떻게 허용이 돼?

있다는 것에서 풀려나면

이거 있어도 있는 게 아니구나하면서 이게 허공이 되는 거야.

이게 허공이 되는 거야.

여기서 풀려나면.

 

그림자와 같다라든지, 환상과 같다라는 게 그 말이거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니까

있어도 있는 게 아니야.

그게 바로 허공성이라는 거예요.

딴 게 허공성이 아니라.

 

그럼 뭐냐?

지금 찰나찰나 간에 일어나고 있는

분별의식에 우리가 어둡기 때문에

뭐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