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알려면 죽음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을 알아야 삶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공부는 삶에 대한 공부입니다.
우리 인생은 죽음으로써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태어난 이상 누구나 한번은 죽게 됩니다.
조금 빠르게 가느냐, 늦게 가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입니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꺼려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어디서 죽을지 모르고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공부를 해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벽암록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삶 자체가 되어 살아가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 자체가 되어 죽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그 삶을 전부로 알고 열심히 살고
죽음이 임박할 때는 죽음을 전부로 알고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을 공부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죽음을 가장 편하게 맞이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장자입니다.
장자는 약 2,300 년 전 중국 전국 시대에
작은 약소국가인 송나라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혜시라는 재상급의 인물과 친구로 지냈고
여러 제자를 두고 있었습니다.
장자는 83세까지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 그 나이까지 살았다면 엄청나게 장수를 한 것으로
오늘날과 비교하면 120세까지 살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장자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바싹 말라 형체만 남아있는 앙상한 해골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해고를 말채찍으로 두드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대는 욕심을 부리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나라의 죄를 짓고 처형을 당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부끄러운 일을 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굶어 죽어 이렇게 되었는가?
늙어서 이렇게 죽었는가?”
그러다가 그만
그 해골을 끌어다 베고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이 코 밤이 되었고 해골이 꿈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조금 전에 당신이 한 말은
모두 살아있는 사람의 괴로움에 해당되는 것이오.
죽어버리면 그런 것이 없소.
죽음의 세계에는 임금도 없고, 신화도 없고, 계절의 변화도 없소.
임금 노릇하는 것이 즐겁다 하지만
이보다 더 즐거울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러자 장자는 그 해골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다시 살아서 생전의 모습으로
부모 형제와 처자식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겠소?”
그러자 해골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 어찌 임금 노릇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을 버리고
산 사람으로 돌아가 고생하겠는가?”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자신과 친하게 지낸 그의 친구가 죽자
빈소에 가서 슬퍼하지 않고 간단하게 곡을 세 번만 하고 나왔습니다.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을 한 그의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그가 태어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며
그 사람이 죽은 것은 죽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면 슬픔이나 즐거움이 끼어들 수가 없다.
그래서 옛날에 이것을 하늘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불렀다.”
장자는 또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연은 형상을 주어 나를 나게 하고
삶을 주어 나를 수고하게 하고 있다.
늙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고
죽게 하여 우리를 쉬게 하고 있다.
자기 삶을 잘 사는 것은
곧 자기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이다.”
이처럼 그는 생로병사를 자연의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삶과 죽음을 같은 자연 현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늘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그의 삶이 천체의 운행과 같고
그의 죽음은 사물의 변화와 같다.”
장자는 자연의 순리를 깨닫고
그 흐름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채 살아갔습니다.
살았을 때는 우주의 질서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고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인은 살아감에 있어서는 자연의 운행을 따르고
죽음에 있어서는 만물과 함께 변화한다.
그의 삶은 무리에 떠돌아다니는 듯하며
그의 죽음은 편안한 휴식과 같은 것이다.”
장자는 그의 아내가 죽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항아리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광경을 본 그의 친구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아니 자네는 자네의 처가 죽었는데 슬퍼서 울지는 않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참 이상한 사람이구만.”
그러자 장자는 이렇게 대꾸를 하였습니다.
“난들 처음에는 어찌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네.
생각해 보게.
본래 형체조차도 없었던 것 아닌가?
자연의 작용에 의해서 기운이 생기고
기운이 변화하여 형체가 생겨나고
형체가 변화하여 삶이 있게 되었던 것이네.
지금은 그가 또 변화하여 죽어간 것일세.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철이 운행하는 것과 같은 변화이네.
그 사람은 하늘과 땅이라는 거대한 방 속에 편안히 잠들고 있는 것이네.”
장자는 자신의 죽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임종이 다가오자, 그의 제자들이 그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려고 하자
이를 나무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구슬 장식으로 삼고
별을 진주와 옥장식으로 삼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삼으려 하니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태려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이렇게 대꾸하였습니다.
“그러면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파먹을 것이 염려됩니다.”
그러자 장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땅 위에 놓아두면 까마귀와 솔개가 먹을 것이고
땅 아래에 묻으면 개미들이 먹을 것이다.
이쪽 놈이 먹는다고 그것을 빼앗아 딴 놈들에게 주는 셈이 될 뿐이다.
어찌 그렇게 편협하게 생각하느냐?”
장자는 장례식도 치르지 말고, 관도 짜지 말고
자신의 시신을 산 위에 그냥 갖다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시신까지도 매장하지 않고 자연으로 돌려주었습니다.
장자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도
장자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는 죽고 난 후
자신의 시신을 땅에 묻지 말고 방치해 놓으라고 했는데,
이는 짐승들이 그 시신을 먹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고 합니다.
장자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파악하고
자연의 섭리와 우주의 질서에 따라 살 때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을 삶의 끝이요, 소멸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합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소멸이 아니라 변화로 받아들였습니다.
장자는 끝없는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길이오,
그렇게 살면 죽음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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