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범부 중생들에게 깨어나게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좀 가르쳐주셨으면//
지금 하고 있잖아요.
욕심이에요.
깨닫겠다는 욕심이에요.
욕심을 버려야 해요.
그건 원이 아니고 욕심이에요.
그건 망상이에요.
그런 걸 망상이라고 그래.
‘건강했으면 좋겠다’ 한다고 건강해집니까?
‘건강해야지’ 하고 각오한다고 건강해집니까?
아니에요.
그런 건 다 망상이에요.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는 건 욕망이고.
‘행복해야지’ 하는 건 각오와 결심이고 그건 망상이에요.
그런다고 건강 안 해져요.
건강해지려면 뭘 안 해야 한다?
건강을 해치는 행동을 안 해야 하겠죠.
무리하지 말아야 하고, 과음하지 말아야 하고, 과로하지 말아야 하고, 이렇게 무리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고
두 번째는 반대로 게으르지도 말아야 해요.
게으른 게 운동 부족입니다. 아시겠어요?
운동 부족이 게으름이란 말이에요.
게으르지도 말아야 하고, 과민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게 중도에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치우치지 마라.
그래서 자연 태어난 대로
동물을 생각하면 돼요.
소는 풀을 뜯을 때 게으르게 뜯습니까? 급하게 뜯습니까?
(게으르게 뜯습니다)
그거 봐요. 욕심이 금방 보이잖아.
소는 풀을 뜯을 때 절대로 서둘러 풀을 뜯는 법이 없다.
천천히 풀을 뜯습니다.
그렇다고 막~~~ 먹기 싫어서 억지로 게으르게 뜯지도 않고
부지런히 뜯는데
그 부지런함이 조급하거나 서두름 없이 편안하게...
이게 수행자에요.
수행자는
조급해서도 안 되고
나태해서도 안 된다.
자세가 삶의 자세가.
그러니까 ‘돈 벌어야지’ 이러다가도 돈 못 벌면 괴롭지.
그러면 ‘출세해야지’ 출세 못하면 괴롭지.
‘깨달아야지’ 해서 못 깨달으면 어떨까? 괴롭겠지.
그러니까 그 ‘깨달아야지’를 도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건 욕심이에요.
그거는 ‘돈 벌어야지’ 하는 거나 ‘도를 얻어야지’ 하는 거나 ‘ㄴ’자 하나 차이밖에 없어요.
똑같은 욕심에 불과하다.
그러면 건강은 아프지 않은 게 건강이듯이
행복은 뭐가 행복이다?
괴롭지 않으면 돼.
괴롭다는 게 뭐요?
괴롭다, 슬프다, 화난다, 외롭다, 미워한다 이런 게 다 정신적으로 괴로움에 들어가거든요.
그런 걸 살펴서 미워함이 있으면
‘왜 미워하지?’
‘아, 내 잘났고 너 못났다 해서 미워하구나. 내 잘난게 뭐 있노?’
이렇게 알아보면 미워할 일이 없어지는 거고
‘화가 난다’
‘왜 화나지?’ 이렇게 살펴보면
‘화 날 일이 없구나’ 이렇게 알게 되고.
‘슬프다’
‘엄마가 죽어서 슬프다’
‘엄마가 죽었는데 왜 네가 슬프노?’
따져보면 이것도 내 원하는 대로 안 되었다고 생기는 문제이고.
이렇게 해서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면 행복한..
행복한 게 기분 좋은 걸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기분 좋은 건 즐거움이라고 그래. 행복이라고 안 그러고.
즐거움은 반드시 뭐를 동반한다?
괴로움을 동반하는 거예요.
반드시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붙어 다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뭐에서 못 벗어난다?
괴로움에서 못 벗어나는 거요.
여러분들이 천당 가고 싶은 한은 절대로 지옥에서 못 벗어나는 거요.
이걸 윤회라고 그래. 윤회.
지옥과 천당, 이 말은 죽어서가 아니라
고락, 괴롭고 즐겁고를 돌고 돈다. 이게 우리 중생살이, 윤회하는 중생이다 이 말이오.
여러분들이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괴로움을 없애려고 할 때
괴로움하고 즐거움을 딱 칼로 나눠서 요거는 가지고 요건 버리고
이건 불가능해요.
괴로움을 버리려면 뭐도 같이 버려야 된다?
즐거움도 같이 버려야 해.
그럼 괴로움과 즐거움의 뿌리가 뭐냐?
욕구에요.
욕구가 충족이 되면 기분이 좋은 즐거움이 일어나고
욕구가 충족이 안 되면 기분 나쁨이 일어나서 괴로움이 일어나는 거요.
그러니까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 버리면 즐거움도 괴로움도 같이 사라진다.
이게 편안함이에요.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요건 내 사람이다. 내가 요 사람 좋아해.’
즐거워요? 안 즐거워요? 좋아하니까 즐겁지.
그럼 이 사람 죽으면 괴롭겠지.
그런데 저 아프리카에 어떤 인간은 내가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 그러면 안 슬프잖아.
그러니까 즐겁기 때문에 괴로움이 동반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즐거움 때문에, 즐거움에 눈이 멀어서 괴로움을 늘 받고 사는 거다.
여러분들이 계속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늘 괴로움이 그림자로
늘 이렇게 따라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즐거움을 버릴 수가 없잖아.
술을 저녁에 먹을 때 좋았기 때문에 아침에 토하는 괴로움이 따르는 거예요.
즐거움과 괴로움은 늘 같이 있습니다.
이거는 분리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두 가지 인생의 길이 있다.
즐거움을 추구했거들랑 괴로움의 과보를 피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라.
돈을 빌렸으면 뭐해라?
이자를 쳐서 갚아라.
이걸 가져야 해요.
그러니까 그 즐거움을 추구하거든 괴로움의 과보를 기꺼이 받아라.
그러면 괴로움이 줄어요.
두 번째, 그 괴로움이 싫거들랑 그 즐거움도 뭐해라? 버려라. 포기해라.
누구든 다 아는 얘기에요.
돈 갚기 싫거들랑 다음에는 빚내지 마라. 이거에요.
이거 무슨 교회 다닌다고 모르고, 절에 다닌다고 알고 이런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괴로움이 따르는 거는 그만한 즐거움을 앞에 뭐 했다?
누렸거나 안 그러면 뒤에 오거나 그래요.
그래서 이건 공평합니다.
여러분들은 가족을 거느린 즐거움이 있으니까 앞으로 가족하고 헤어지는 괴로움이 따를 거고
나는 가족을 거느린 즐거움이 없는 대신에 가족을 잃는 괴로움도 같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집을 가지고 있는 즐거움이 있으니까 홍수 나서 떠내려가는 괴로움이 있잖아요.
그러면 나는 집이 없으니까 떠내려갈 괴로움도 없잖아.
유명한 얘기가 있잖아요.
홍수가 나서 논밭이 다 떠내려가서 사람들이 울고 하니까
거지 아이가 아버지한테
“아이고, 아버지 우리는 울 일이 없네요”
“그거 다 너희 애비 덕택인 줄 알아라”
그 아버지가 누구다?
부처님이에요.
우리가 뭐든지 집착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면
그게 거지 아니오.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러면 뭐 할 일도 없다? 괴로울 일도 없다.
저는 ‘집착하지 마라’ 이렇게 안 가르치잖아요.
저는 집착하고 싶으면 해라.
그러면 뭐를 받아라? 과보를 받아라.
뭐가 옳은 게 있어서 네가 그걸 하라는 게 아니라
네 선택이다, 인생은.
네가 선택해라.
이게 무슨 세상에 이렇게 살아야 된다. 저렇게 살아야 된다는 길이 있을까? 없을까?
없어.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있을 뿐이야.
그러면 이 선택을 하고 이 결과를 받든지
이 결과가 싫으면 이 선택을 안 하든지
이 길밖에 없어요.
종교라는 게 거짓말이란 말이오.
이 돈을 빌려놓고 안 갚겠다 하는 걸 부처님이 안 갚아도 되도록 해준다는 거 아니오.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그게 복 아니오. 복.
나쁜 짓을 해놓고 죄 안 받도록 해달라 그러잖아.
복은 안 지어놓고 뭐 달라 그런다? 복 달라 그러잖아.
저축도 안 해놓고 은행에 와서 돈 내놓으라는 거요.
사기지, 그게. 사기꾼이지.
그걸 어떻게 부처님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런 얘기를 해요.
그건 사기 심보인데...
그게 종교가 아니라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거를 종교라고 그래.
어떤 거사님이 나한테 와서 그래요.
“스님, 저 법당에 가면 복전함이 있잖아요. 거기 10만원 넣으면 20만원 나옵니까?”
“야, 거기 10만원 넣고 20만원 나올 바에야 내가 너한테 말할게 뭐 있노? 나부터 집어넣지”
요새 2배 벌려면 이자가 10년 갖고 2배 안 되는데
거기 집어넣어서 이틀 만에 벌리면 내가 거기 넣었다 뺐다 집어넣었다 빼지
남보고 넣으라고 그러겠어요? 몰래 나만 넣을까?
그러니까 이런 심보로 공부를 하면 안 된다.
이건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 아니오.
그런데 이런 데 미쳐서 날뛰고 다니잖아요.
도를 얻어야 하겠다 하고 욕심을 내면
그거는 돈을 얻겠다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냥 자기 욕구가 안 되어서 그런 거예요.
엄마가 돌아가시는데
“나 놔놓고 어떻게 죽을 수 있어? 죽지 말아야지”
그러고 우는 거요. 죽었다고.
그러면 네가 원하면 나뭇잎도 안 떨어져야 하고
네가 원하면 사람도 안 죽어야 하고
그럼 다 안 죽어봐라. 무슨 일이 생기겠어?
안 죽으면 더 일이 복잡하나? 더 일이 쉽나?
지금 안 죽어봐라. 전부 지금 얼마나 복잡한 일이 생기는데...
지금 여기 수명이 20년 연장되어도 지금 난리인데.
조금 더 사는 거 정도는 큰 부작용이 없는데
우리의 세상 이치라는 걸 알면,
그렇게 무슨 여러분들이 괴로워 할 일은 없다는 거예요.
한번 얘기해 봐라. 뭐가 괴로운지...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얘기하냐...
“이것 때문에 괴로워요. 저것 때문에 괴로워요...”
“그게 뭐가 괴롭노?”
“이게 왜 안 괴로워요?”
이럴 때 제가 딱 느끼는 게...
‘나는 안 괴로우면 절대로 안 되는 사람이에요, 스님’
이런 사람처럼 그 괴로움을 합리화하고 변명을 하고, 안 괴로울 수 없다고 움켜쥐고 이렇게 있는 거예요.
그러면 스님은 자비심이 없어서 뭐라고 그런다?
알았다. 그러면 괴로워해라. ㅎㅎ
제가 여러분에게 하소연 한번 해볼까?
“아침에 일어나려면요, 너무너무 졸려서 힘들어요, 4시에 일어나려면.
참선하려면 허리가 아프고요, 절하려면 다리가 아프고요, 염불하려면 목이 아프고요...
고기도 못 먹죠. 여자도 한번 못 안아보죠”
그렇게 내가 여러분께 얘기하면 여러분은 뭐라고 그럴까요?
“스님 그만 두면 될 거 아니야” 이렇게 얘기하겠지.
그러면 내가 또 뭐라고 그래요
“내가 중 된지 50년 됐는데 지금 이걸 그만두고 딴 거를 어떻게 해요?”
“그러면 하세요” 그럴 거 아니야.
그렇게 얘기할까? 안 할까?
너무나 여러분도 알 수 있는 얘기 아니오.
“남편하고 살면서 술을 먹고 어쩌고저쩌고 그러면”
“그럼 이혼해라”
“그러면 애는 어떻게 하고요?”
“그럼 살아라” ㅎㅎㅎ
스님, 뭐 대단한 거 같지만 하나도 대단한 얘기 아니에요.
“돈에 쪼들려서 힘들어 죽겠어요. 빌리면 안 될까요?”
“빌려라”
“그러면 이자 갚아야 되잖아요”
“그러면 빌리지 마라”
여러분의 얘기의 요점은 뭐다?
돈은 빌리고 갚기는 싫고
복은 짓기는 싫고 복은 받고 싶고
나쁜 짓은 하고 싶고 벌은 받기 싫고
심보가 더럽나? 안 더럽나? 더럽다.
그런데 이 더러운 심보를 가진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
왜 하느님이 봐주겠어?
그러니까 그런 심보 좀 버려라. 이 얘기에요.
그런 심보 버리고, 버리면 그러니까...
내가 빚을 졌으면 당연히 갚을 거고
뭐 지금 좀 딱해서, 편하려고 하다 보니 나중에 좀...
이걸 나중으로 미루는 거 아니오.
지금 좀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돈을 빌려 쓰고 다음에 갚아야 되니까
이 장애를 다음으로 미루는 거지, 그건 해결이 아니잖아.
수행자는 가능하면
과보를 기꺼이 받는 거예요.
과거 생에 내가 진 빚이 있다면 기꺼이 받고.
그러니까 재앙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여러분은 복을 찾는데 나는 재앙을 즐거이 하는 거요.
재앙이 복인 줄 알아버리면 이 세상에 복 아닌 게 뭐가 있겠어요?
“나한테 빚진 사람 다 오너라. 다 줄게”
다 갚아버리면 이제 빚 갚을 일이 없을 거 아니오.
그런데 왜 빚을 지어놓고 요리조리 도망 다녀요.
그러니까 불안하지.
관점을 좀 바꾸셔야 한다.
그러면 삶이 확 트여요.
학생들 여기 몇 명이 있는데 공부하기 싫다.
하지 말라는 거요 나는.
저는 선생님들하고 전혀 다릅니다.
“스님, 공부하기 싫어요.”
“안 해도 돼.”
그럼 뭐할까요?
너 공부한다고 너한테 특혜로 일 안해도 된다. 밥 주게 되어 있는데
너 공부 안 하면 일하러 가면 되지.
공장에 가서 한 6개월 일해보면 공부가 쉽나? 일하는게 쉽나?
“스님, 공부가 아무래도 하는 게 낫겠습니다”.
“그럼 해라”
그거를 ‘아이는 공부를 해야 된다’ 이런 의무를 주지 마라는 거에요.
그러나 뭘 해야 되잖아. 사람이 살았으니까.
공부를 하든지,
그 공부를 하는 기간은 특혜라는 거예요.
‘너가 이 기간동안은 우리가 먹을 것도 주고, 잘 곳도 주고, 돈도 주고 다 해주겠다’
그러면 그거를 ‘아, 특혜다’ 이렇게 생각하면 공부 하는 게 괴로울 일이 아니죠.
그런데 하기 싫다 하면 스님은
‘하지 마라’
그러면 돈을 펑펑 쓰고 매일 노는 거, 그런 건 없어죠. 존재할 수가 없어.
그걸 사람이 원한다면 그건 잘못된 거죠.
공부 안 하면 너 밥 먹는 거 하고, 입는 거 하고 네가 벌어서 해야 한다.
그럼 나가 일해라.
그래서 이것을 자기가 선택해야 되는데, 왜 힘들까?
부모가 선택해주거든요.
부모가 강제로 시키잖아.
내 어릴 때 아버지가 일을 강제로 시키듯이.
그러면 도망가야지.
그러니까 억지 공부를 하니까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죠.
그래서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발성입니다.
‘부처님이 뭐라고 그랬다. 뭐 성철스님이 뭐라고 그랬다’ 그런 얘기는 별로 인생에 도움이 안 됩니다.
문제는 누구다?
나. 즉, 각자. 나.
나가 뭐냐?
내가 어떻게 해야 될 거냐?
내가 어떻게 사는 게 좋겠냐?
이기적이다.
당연히 이기적이지. 모든 인간이 다 이기적이에요.
우리 남편만 이기적인 게 아니라 나도 이기적이에요.
이기적인게 뭐가 나쁜데..
그런데 내가 이기적인 줄 알면, 남도 이기적인 걸 비난 안 하는데
자기는 이기적이면서 남이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이거야.
아무리 내가 이기적이라 하더라도,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남한테 손해 끼칠 권리는 없어.
내가 마음껏 살 권리는 있지만 남을 죽일 권리는 없어.
내가 즐거움을 추구할 권리는 있지만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고
내가 마음껏 말할 권리가 있지만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어, 말로.
그게 거짓말, 욕설 아닙니까.
내가 뭐든지 먹어도 되지만, 술먹고 취해서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다.
그게 부처님의 가르침인
때리거나 죽이지 마라.
남의 물건 훔치거나 뺏지 마라.
성추행이나 성폭행하지 마라.
거짓말이나 욕설하지 마라.
술 먹고 취해서 행패 피우지 마라.
다섯 가지에요.
이 다섯 가지가 아니면 사람은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남의 인생에 간섭도 하지 말고
남의 간섭도 받지 마라.
부모님이 이래라 하면
부모이기 때문에 말을 따르는 게 아니오.
말 따르는 게 나한테 유리하면 따르면 되고
따르는 게 불리하면 안 따르면 돼요.
그런데 부모님의 의사는 조금 고려해야 하는 게
부모님은 나를 해치려고 그런 말을 한 거는 아니니까
조금 신중하게 좀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죠.
그런데 내가 출가해서 절에 있는데 우리 부모님이
“안 된다, 집에 오너라.”
이거는 부모는 나를 위해서 해주는 말은 맞죠.
그런데 그게 따라가면 나한테 이익이에요? 손해에요? 이익일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맞는데
내가 그걸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는 내가 결정을 해야지
부모님 말을 따르는게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내가 만약 부모님 따라갔으면 오늘 내가 있을 수가 없잖아.
부모님이 약을 딱 가져와서
“너 안 나오면 먹고 죽을 거야”
“아이고 안 되겠다 가자”
이러면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네, 돌아가시는 건 어머니 자유이고, 제가 장례는 치러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제 말 이해하셨어요?
그런데 어떤 여자가 내 손잡고 좋다하고 나하고 결혼 안 하면 죽을 거야.
이런데 내가 눈 깜짝할까? 안 할까?
우리 엄마가 죽는다 그래도 눈도 깜짝 안 했는데, 딴 사람이 와서 뭐라뭐라 한다고 눈이 까딱할까?
그러니까 스님이 헤 웃으니까 좋은 줄 알지. 안 그래.
그렇게 자기 삶에 대해서 딱 분명한 길을 가야
여기에 있을 수 있지, 안 그러면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겠어.
자기가 결혼을 했으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거요.
헤어질 때도 헤어지는 거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거요.
자꾸 남한테 얘기하지 말고.
왜 자꾸 남한테 얘기해요.
결혼도 자기가 하고 애도 자기가 낳아놓고.
자기가 선택에 대한 뭐를 져라?
책임을 딱 진다.
그걸 자꾸 하느님한테 부처님한테 가서 뭐라고 그러지 마세요.
학교 시험도 부처님보고 쳐달라.
결혼 상대도 부처님보고 구해달라.
장사도 부처님보고 잘해달라.
승진시험도 부처님보고 잘하게 해달라.
그럼 자기는 뭐 하려고?
물어볼게. 뭐 하려고 자기는?
그러니까 이런 게 불교가 아니라는 거요.
토끼가 자기 풀 뜯어 먹는 거 갖고 부처님한테 부탁할까? 안 할까?
안 하겠지.
도토리 없다고 부처님한테 부탁할까?
모든 생물은 다 자립하고 있습니다.
딱 예외가 한군데밖에 없어. 어릴 때.
어릴 때는 보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것은 어른의 의무에요.
그 외에는 다 자기 생명을 자기가 살면 돼요.
그런데 그게 자연생태계를 복원하는 거요.
사람은 지금 토끼보다 못한 수준이에요.
그런데 토끼만큼 되면 안 되잖아.
플러스알파가 있어야 해. 그게 뭐다?
남을 조금 도울 줄 알아야 돼.
토끼는 그런 것도 없어요.
남한테 신세도 안 지지만, 도울 줄도 몰라.
그런데 우리는 신세 안 지는 수준은 토끼 수준이고,
남을 조금 도울 줄 아는 플러스알파가 있어야 한다.
이게 부처님과 예수님이 가르친 거요.
이게 보디사트바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늘 구걸만 하잖아.
뭘 해달라 하잖아. 거지 근성이에요.
남편한테도 뭘 조금 해주고, 애들한테도 조금 해주고, 부모한테도 조금 해주고
마음이든 재물이든...
이 사람이 나 만나서 덕 좀 봤다 하도록
조금 해줘야 사람의 길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하나 잡아서 뜯어먹으려고 그러잖아.
그거 안 뜯어 먹어진다고 부처님한테 가서 또 아우성을 치잖아.
그러니까 저는 삶의 관점을 잘못 잡고 있다. 이거야.
이렇게 관점을 딱 잡고 조금이라도 세상에 뭐가 되는 사람이 되자?
보탬이 되는 사람,
내 인생은 누가 살고? 내가 알아서 살고
부처님이 “법륜스님 뭐 도와줄까?” 이러면
“아이고 부처님 저는 제가 알아서 살겠습니다.
북한의 저 사람들 힘이 든다니까 저쪽부터 먼저 좀 도와주세요”
이런 말 해야 안 될까? 어떻게 생각해요?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ㅎㅎ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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