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선생님에게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학년으로 갈수록 더 심각해 질수가 있다고 합니다.
부모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나요?//
제일 먼저 선생님께 “고맙습니다.”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내 아이인데, 그런 문제점이 있다면 누가 제일 먼저 알아야 되요? 그런데 왜 빨리 치료를 안 해요? 알고 있으면 치료를 해야지. 어떻게 노력했는데? 병원에 데리고 갔어요? 그러면 치료를 해도 그거라면 아이가 만약에 눈이 하나 안보이거나 팔이 하나 없으면 그럼 그 정도 장애가 있으면 그 아이는 죽어야 되요? 장애를 갖더라도 그 아이는 행복하게 살아야 되요?
그래. 그 정도 장애가 있거나 그 정도 어떤 문제가 있으면 성격적 장애가 있으면 성격적 장애를 감수하고 인생을 살아야 되고, 신체적 장애가 있으면 신체적인 장애를 감수하고 살아야 되고, 지능이 장애가 있으면 지능을 감수하고도 살아야 될 거 아니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뭐요? ‘아이가 약간 대인 관계에 장애가 좀 있다.’ 이렇게 싶으면 지금 왜 그리 되었냐? 이것은 중요 안하단 말이오. 이미 발생한 거니까. 그러면 그 아동심리학이나 아동 발당장애나 이런 데 데려가서 상담을 해서 어느 정도 장애인지를 봐야 된단 말이오.
그러면 “이렇게 이렇게 한 1~2년 훈련 받으면 정상화 됩니다.”하는 경우도 있고, “이 아이는 발달 장애가 있기 때문에 한 80%정도 회복은 되지만, 완전히는 정상적이 되기는 좀 어렵습니다.” 하면 그것을 속상해 하거나 충격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고, 부모의 기대를 그 수준에 기대를 해야 된다, 이 말이오.
집에서는 부모가 아이가 장애다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배려를 한단 말이오. 학교에서 같은 또래 아이는 얘가 장애라는 것을 모를 거 아니오. 배려하는 마음이 있을까? 없을까? 없으니까 얘가 긴장을 하게 되거나 그러면 말도 안 나오죠. 그러니까 그것을 계속 집에서 학교 가서 받는 스트레스를 집에서 풀어줘야 되고, 그 다음에 아이를 격렬해 줘야 되요.
예를 들면 한쪽 눈이 안보이면 이거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면
“그래도 두 눈 다 안 보이는 거에 비해서 얼마나 다행이니?” 이렇게 격려가 되어야 된다.
부모도 같이 울면 안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약간 이런 장애가 있을 때
부모가 다른 아이하고 비교해서 똑같이 안 된다고 속상해 하는 것은
부모의 욕심이고 아이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은
아이는 약간의 장애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존중해야 할 인생이란 말이오.
그리고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그 수준에서 행복할 권리가 있단 말이오.
그럼 부모는 그 아이에 대해서
항상 위로하고 격려하고 그것을 수용해 줘야 된다.
한쪽은 치료를 해주고,
치료가 안 되는데 애를 치료하겠다고 계속 끌고 다니면 애는 열등의식을 느낍니다. 오히려.
의사선생님하고 해서 치료를 하되 더 이상 치료가 안 된다면 부모는 빨리 이 아이의 장애는 80%면 80% 선에서 받아들여야 된단 말이오. 그러면 학교에 가서 그 정도 장애면 일반학교에서 다닐 수 있는지, 다닐 수 있다면 선생님께 항상 학년에 올라가면 미리 얘기를 해서 “우리 아이에게 이런 장애가 있습니다. 특별히 조금 배려를 해주세요.”
그리고 아이들과의 문제가 계속 되면 나중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얘기를 해야 되겠죠. “이 아이는 말하는 속도가 조금 느리니까 이것을 놀리지 말고, 오히려 말을 이 아이하고 대화할 때는 천천히 해서 친구를 배려하게 하자.
우리나라는 아직 아이들이 약간 장애 있는 아이를 왕따 시키고 놀리는 경향이 셉니다. 얼굴이 검으면 놀리고, 저애 엄마가 베트남인이다. 이렇게 놀리는 형이거든요. 그만큼 전체적인 아이들 교육 시민교육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다 부모의 영향이에요. 그런데 그것으로 애들을 나무랄 수가 없어요. 어른이 아니니까.
그래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장애 있는 아이를 감싸고 같이 갈 수 있는 선생님들의 교육도 중요하고, 자기가 필요하다면 학부형 모임 같은데 가서 양해를 좀 구하고.
그것은 안 좋은 현상이죠. 그래도 밝히고 수용하는 게 낫지,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을 살아야 되는데, 이것을 계속 덮어놓고 살아서 해결될 일은 아니에요. 한쪽은 치유를 하고, 한쪽은 환경을 도움이 되도록. 그러니까 무조건 봐 달라는 게 아니라, 적응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이렇게 해 나가야 된다.
가장 부모가 중요한 것은
장애를 속상해 하면 안 된다.
우리가 장애가 있으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애를 낳았나?” 이렇게 말하잖아. 그러면 장애가 죄의 과보라는 뜻 아니오. 그 자체가 굉장한 인권 침해에요.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얼굴이 검은 게 죄의 과보가 아니에요. 피부빛깔이 다를 뿐이지. 그런 것처럼 장애도 불편할 뿐이지 열등한 게 아니에요. 제 말 이해하셨어요. 장애는 뭐라고? 열등한 거요? 다만 불편할 뿐이오? 조금 불편할 뿐이오.
그러면 불편하다 하면 불편을 극복할 기술이 개발되는 거요. 눈이 잘 안보이면 안경을 낀다든지, 귀가 잘 안 들리면 보청기를 낀다든지, 팔이 만약에 없으면 의수를 한다든지, 이렇게 불편한 것은 우리가 보완을 해 갈 수 있는데, 열등하다 그러면 자학증세가 생기든 남을 증오하든 이런 방식으로 흘러간다. 이 말이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이것은 열등한 게 아니에요. 죄의 과보가 아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것을 죄의 과보로 생각하잖아. “하나님이 나만 미워하나 봐. 천벌 받았나 봐.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굉장히 인권 침해적 사고방식이오.
그러니까 우리 아이는 그런 아이도, 마치 피부가 검은 아이도 행복할 권리가 있고, 여자 아이도 행복할 권리가 있듯이, 장애 아이도 뭐할 수 있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 거기에 맞게끔 부모가 요구해야지. 더 이상 요구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그러면 아이는 열등의식을 갖게 돼.
성적이 중간밖에 안 나오는 아이에게 계속 1등하라고 그러면 그 아이는 열등의식을 갖는다. 그럴 때 그 아이를 존중해야 돼. “아이고, 중간만 해도 됐어.” 이렇게 애를 격려해줘야 돼. 애가 속상해도 부모가 격려해줘야 그 아이는 열등의식을 안 갖게 됩니다.
그러면 전문가 하고 부모가 집에서 아이가 자기 얘기를 마음껏 나눌 수 있는 훈련을 계속 해야 돼.
부모는 편하니까. 부모님이 잘하면 딴 사람하고 대화하는 것을 훈련을 시켜야지. 우리가 말도 훈련시켜서 몰고 다니고, 개도 훈련을 시키는데, 사람을 훈련하면 되죠. 그런데 그것을 부모가 원하는 속도로 요구하면 애는 못 따라 간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를 욕심을 내지 말고, 아이를 존중하고, 격려하고, 꾸준히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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