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불교방송 개국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면서요,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불교라고 우리가 보통 말할 때는 3가지 조금 다른 성격이 있습니다.
첫째, (믿음을 기초로 한) 종교로서의 불교
종교로서의 불교는 가장 중요한 기본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기초로 해서 살아서는 복을 구하고, 죽어서는 극락왕생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게 종교로서의 불교다.
그런데 불교는 종교로서의 역할만 있는 게 아니라
둘째, 철학으로서의 불교, 학문으로서의 불교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 철학은 이 세계의 그 어떤 다른 철학과 비교해서도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훨씬 더 합당한 그런 철학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그 불교의 철학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해를 중요시 한다.
세 번째, 수행으로서의 불교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체험, 실제로 자기가 행해보고 자기가 그 경험을 해야 한다.
목표는 해탈과 열반입니다.
그럼 이 셋 중에 원래 26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추구하셨던 것은 수행으로서의 불교입니다.
그러나 불교가 역사 속에서 발전하면서 종교로서의 불교영역으로도 발전해 가고
또 다른 사회적인. 철학학파들과 논쟁을 하면서 철학으로서도 발전해 갔다.
그러나 지금 260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 다시 되돌아와서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인 수행으로서의 불교의 비중을 더 높여야 하지 않을까.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살기가 힘들 때, 즉 먹고 살기가 힘들 때는 누구나 다 복을 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먹고살 만한데 괴롭다.
이럴 때는 복을 구한다고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
이 고뇌에서 벗어나려면 바로 해탈과 열반을 증득해야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작은 나라지만 왕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먹고 입고 자는, 이런 생활상의 고뇌는 없었습니다.
남이 다 부러워할 만큼 그런 좋은 조건에 있었다.
그런데도 많은 번민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사람들, 또는 유럽이나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부처님 당시에 왕족들이 누릴 수 있는 그런 생활조건보다 더 좋은 조건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이 걱정이 없는...
그런데도 우리는 괴롭다.
한 50년 70년 전에 우리 세대의 부모들은 먹고 입고 자는 문제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잘사는 기준이 뭐냐?
먹는 거는 소고기국밥에 흰쌀 밥을 먹는 거요.
입는 옷은 비단옷을 입는 거다.
자는 집은 날아가는 듯한 기와집에 자는 거다.
이게 부자고, 잘사는 기준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나 양옥들은 그런 기와집보다 더 낫고
지금 우리들이 입고 있는 이 옷은 옛날 비단옷보다 더 낫고
지금 우리들이 먹고 있는 음식들은 쇠고기 국밥에 흰쌀밥 먹는 것보다 더 잘 먹는다.
그런데 우리의 고뇌가 우리 할아버지보다 적으냐?
만약에 경제 수치로 따지면 지금부터 70여 년 전, 뭐 70년까지 아니고 한 50여 년 전,
1960년대에 우리나라 1인당 GDP가 100불 정도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냐? 3만 불 가까이 됩니다.
그러면 물질적으로만 따지면 300배 더 좋아진 거요.
그런데 우리의 행복도가 할아버지 세대보다 300배 더 행복하냐? 아니다.
300배는 고사하고 30배도 행복하냐? 그것도 아니다.
그럼 30배는 고사하고 3배는 더 행복하냐?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어쩌면 우리 선조 세대보다 번뇌나 괴로움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런 물질적 발달만 가지고 고뇌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물질적 발달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그것만 가지고는 고뇌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
그러면 이것 말고 고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다른 길이 있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을 해야되는데...
우리는 이런 경험을 직접 하고도 아직도
집이 좀 더 크면, 돈이 좀 더 많으면, 좋은 옷을 입으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도무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성하는 돌이켜보는 이런 능력이 없다.
다시 말하면 그냥 앞만 보고 가는 일직선상을 달리는 아주 단편적인 사고밖에 할 줄 모르는 중생이다.
그러니까 붓다가 그러한 좋은 조건에 있으면서도 고뇌가 있었고, 이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왕위도 버리고, 그 풍요로운 삶도 버렸습니다.
필요 없다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가 없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이러한 풍요로운 삶을 버리기까지는 못하더라도 이 길만으로는 안 된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우리가 좀 가져야 한다는 거요.
오늘날 유럽이나 미국에서 특히 테라밧다의 위빠사나 수행같은 것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에요.
이러한 물질적인 풍요만 가지고 인간이 고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런 시점에 이르러서 바로 그 부처님의 문제의식이 오늘 우리들의 삶의 문제의식과 동일해졌다.
그러니까 복을 구하는 그런 종교로서의 불교는 그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미 기독교가 있기 때문에.
또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그들에게 굉장히 심오함을 주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미 서양 철학도 그리스 로마의 전통을 이은 서양 철학도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 혹할 정도로 구미를 당기는 건 아니다.
바로 이 세 번째, 수행으로서의 불교, 고뇌를 벗어날 수 있는 이 길은
그들로서는 정말 새로운 만남이고, 새로운 희망이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과 이런 종교로서의 불교나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수행으로서의 불교,
즉,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고뇌, 이 고뇌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
모든 고뇌가 사라진 경지, 그것을 우리가 열반이다. 니빠나다, 니르바나다 이렇게 말하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경지, 이것을 해탈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왕생극락이 아니고
복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거다.
즉, 생활적인 용어로 쉽게 말하면, 지속 가능한 그런 자유와 행복을 증득하는 거다.
과연 나는 행복한가?
과연 나는 자유로운가?
지속 가능한 자유와 행복이라고 제가 단서를 붙이는 이유는
우리가 말하는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즉,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일어나는 만족감으로 행복을 삼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가 않다.
다시 욕구가 더 커지게 되면 불충족이 따르고 그러면 다시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한다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하는 대로 될 수 없으면
다시 우리는 속박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돌고 돈다. 윤회한다.
이건 윤회의 세계에요.
윤회로부터 벗어났다 하는 것은 이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즐거움
즉, 욕구가 충족이 되어서 얻어지는 즐거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서 생기는 그 들뜬 즐거움이 열반이 아니다.
윤회에서 벗어난다, 이런 말을 쓰잖아요.
이걸 쉬운 말로하면 지속 가능하다.
그런 자유와 행복을 얻는 것이 수행으로서의 불교의 궁극적 목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경지로 나가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경지로 나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잘 살펴야 합니다.
이번에 제가 인도에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보드가야 근교에, 부처님이 6년 고행하셨던 자리에..
그 학교 선생님 12명을 한국에 초청해서 견학을 시켰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국에 와서 불편한 건 없었느냐?”
“없었습니다. 다 좋았습니다”
“먹는 거?” “좋았어요”
“자는 거?” “좋았어요”
“날씨는?” “아이고 이 정도면 아주 시원합니다.”
지금 인도는 46도 47도 이렇게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28도 30도 32도 이런 거는 시원한 축에 들어가는 거요.
“그래도 좀 불편한 게 있으면 한번 말해봐라.”
“화장실이 제일 불편했습니다”
어떤 화장실이 불편했을까요?
네, 좌변기 화장실이 불편했다.
문경 저희 수련원에 있으면서 제일 좋았던 게 화장실이라는 거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환경운동한다고 화장실을 재래식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그러니까 거기가 제일 좋았다. 이거에요.
문경 수련원에 온 우리 수련생들에게 제가 물어봅니다.
“여기 1박 하면서 무엇이 제일 불편했습니까?” 그러면
1번이 화장실이요. 그래요.
그러면 재래식 화장실을 쓸 때, 불편하다.
이 불편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불편한 마음이 어디서 왔을까?
이 재래식 화장실에서 왔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화장실에 대해서 불평을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입을 하는 곳에 이렇게 화장실을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 하느냐? 사용도 불편하고, 또 냄새도 많이 납니다.
이 불편한 마음이 ‘화장실로부터 온다’ ‘화장실이 문제다’
이렇게 생각하면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불만이 생깁니다.
이 불평과 불만이 결국은 좀 지속되면 미움이 되고 원망이 되고 이러죠.
그러면 이 불편이 화장실로부터 오는걸까?
이 불편이 화장실을 사용하는 나의 습관으로부터 오는 걸까?
나의 습관으로부터 온다. 동의하십니까?
그러면 마음이 불편한 건 맞는데, 이 불편함이 밖에서 오는 거다.
화장실에서, 너 때문에 오는 거다 할 때는
불편한 마음에서 불평과 불만으로 옮겨간다.
이게 괴로움이다.
그런데 이것이 나의 습관에서 일어나는 거다.
이 불편한 마음을 살피면서
‘아, 이게 내 습관으로부터 오는 거다’
이게 안으로부터 일어난다.
나로부터 일어나는 거요.
나라고 하는 이때는 나의 습관이에요.
이거를 불교용어로는 업식, 인도 말로는 까르마, 이렇게 말해요.
나의 업식으로부터 일어나는 거다.
그러면 불편한 마음은 있는데, 이 불편한 마음이 불평이나 불만으로는 가지 않는다.
불편한 마음이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 그냥 사라진다.
이렇게 눈을 밖으로 돌리지 않고, 눈을 안으로 돌리게 되면
불편함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불평이나 불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괴로워하지 않게 된다는 거요.
이게 수행으로서의 불교의 가장 중요한 관점입니다.
안심인명의 도는 밖으로 찾아 헤매서는 안 된다.
다른 말로는 부처를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안에서 찾으라고 하니까
안에 부처가 어디 있어서 보는 거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자기 마음을 알아차려야 된다.
그래서 선에서는 손가락으로 딱 찍듯이 직지인심(直旨人心)
마음을 알아차리면 바로 부처를 본다.
이렇게까지 표현을 했습니다.
바로 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고뇌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종교가 무엇이든, 어떤 나라 사람이든, 그 괴로움에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즉, 경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부처님께서 당시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괴로움을 하소연했을 때
그들이 하소연할 땐 대부분 바깥 환경을 탓하면서 하소연을 합니다.
부처님이 하시는 일은
그것을 자기 안으로 눈을 돌이키도록,
자기 쪽으로 살피도록 도와줌으로써 스스로
‘아, 아무 문제가 없군요’ 이렇게 해서
그 고뇌에서 벗어나는 이런 가르침을 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부처님 가르침의 방식대로
우리도 우리들의 고뇌가 일어날 때, 우리가 내부로 안으로 살펴서
‘왜 이 괴로움이 일어날까?’
‘정말 이게 괴로워할 만한 일일까?’
이렇게 돌이켜본다면
우리는 뭔가 길을 찾을 수 있다.
아까 사회자가 ‘명쾌한 답을 준다’ 이렇게 저를 소개했는데
그것은 굉장한 오류입니다. ㅎㅎㅎ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이 길에는 이것이라고 할 어떤 정해진 답도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다만 눈을 안으로 돌이키도록 도와주는 것뿐이에요.
여러분들이 저와 대화를 하면서
눈이 안으로 돌이켜지면 여러분들이 고뇌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그게 눈이 안으로 안 돌이켜지고 계속 밖으로 향하면
어떤 길도 찾을 수가 없는 거다.
그러니까 인생상담을 하는 게 아니라
위로해 주는 게 아니라
야단을 치는 게 아니라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다만 눈을 안쪽으로 돌이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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