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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21)녹봉창고 광흥창 ...

Buddhastudy 2022. 8. 17. 19:13

 

 

조선의 관리들이 한 달에 한 번 서강西江 주막에 갔다는데...

 

 

한양에서 일하던 조선의 관리들은

조선 초에는 1년에 네 번

1701년부터는 한 달에 한 번씩 한강 서강西江에 갔다.

열심히 일하던 관리들, 풍경 좋은 서강에 땡땡이치러 갔을까?

 

서강西江은 서호西湖로도 불렸는데

한강의 서쪽 봉원천(창천)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말한다.

동호東湖는 중랑천과 한강의 합류 지점을 말한다.

호수처럼 드넓은 동호와 서호는 한강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왜 한양의 관리들은 서강에 정기적으로 갔을까?

놀러간 게 아니라

녹봉(급여)을 받으러 갔다.

 

서강에는 호남·충청·황해·평안도로부터

바닷길을 통해 운송된 세곡稅穀을 보관하는 나라의 창고가 있었다.

광흥창廣興倉과 풍저창豊儲倉이다.

 

여기에 보관된 세곡들은 관리들의 녹봉으로 주로 쓰였다.

용산에도 용산창이란 이름의 나라 창고가 있었는데

영남·강원·충청 등으로부터

남한강·북한강을 통해 운송된 세곡이

군자감軍資監, 풍저창豊儲倉에 보관됐다.

 

군자감 세곡은 군량미로

풍저창 세곡은 왕실용으로 사용됐다.

 

고려 충렬왕 때부터 개경성 예성 강변에 같은 창고가 있었는데

조선도 한강변에 같은 방식으로 나라 창고를 설치하여 운영됐다.

서해 바다를 통해 운송된 세곡은

서강변에서 하역됐으며

와우산 기슭에 설치된 광흥창과 풍저창에 보관됐다.

 

1392년 건국부터 1700년까지

조선의 관리들은 1년에 네 차례 녹봉을 받았다.

매년 1·4·7·10월의 네 차례 지급 받았다.

 

1701(숙종 28)부터는 매월 지급받았다.

1품 쌀 28말과 콩 15말부터

9품 쌀 10말과 콩 5말까지 차등을 두었으며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서 발급한 지급의뢰서를 가지고 관리가 직접 광흥창과 풍저창을 찾아가서 받아 갔다.

 

지방 관리들은 지방 곳곳에 설치된 나라 창고에서녹봉을 받아갔다.

전국적으로 수십 개소 이상 설치되어 운영됐다.

원주의 흥원창興原倉과 춘천의 소양창昭陽倉

주요 강변에 ○○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나라 창고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무겁고 큰 부피의 세곡은 대개 배를 통해 운송했고

주요 나라 창고들은 지역의 강변에 설치됐다.

 

광흥창은 현재 광흥창역 일대다.

홍대 거리와 함께 서울의 젊은 에너지가 넘쳐나는 곳이다.

아마 조선시대의 광흥창 주변도 녹봉을 받으러 온 젊은 관리들이

관리생활의 고단함을 풀던 곳이었을 것이다.

 

넉넉하지 못한 녹봉이지만

녹봉을 받은 기쁨을 동료 관리들과 함께

지게를 지고 온 하인과 함께

술 한잔하며 그 소소한 기쁨을 나누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 한강걷기 코스 : 광흥창역광흥창터 밤섬

6호선 광흥창역에서 내려 인근의 광흥창터를 둘러본다.

서강대교로 진입한 후 다리 아래 펼쳐진 밤섬을 살펴본다.

인적이 닿지 않는 유네스코 자연유산, 밤섬의 부활한 자연환경을 살펴볼 수 있다.

다시 광흥창역으로 돌아와 젊음의 거리를 활보하며 기운을 받아 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