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19)

BTS 만든 방시혁의 서울대 졸업식 축사 "내 원동력은 분노"

Buddhastudy 2019. 5. 3. 20:50


존경하는 오세정 총장님여러 교수님,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이신 졸업생 여러분들과 가족친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대표 방시혁 입니다.

 

오늘은 날씨조차 여러분들의 졸업을 축하하듯이 화창한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모교의 졸업식에서 축사를 한다는 건 무한한 영광이기에 총장님이 저에게 부탁을 했을 때 덜컥 수락해 버렸지만, 사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굉장히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저는 부정할 수 없는 기성세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꼰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까

또 무엇보다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첫 걸음을 내딛는 여러분께 해드릴 유의미한 이야기가 제 안에 있는 건지도 많이 걱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졸업 축사란 건 연사가 졸업생에게선배가 후배에게자신이 인생에서 배운 것을 이야기 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꼰대스러움에 대한 걱정은 좀 내려놓고오늘은 최대한 솔직한 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제 자랑도 좀 할 것 같고요제 삶의 여정 중 여러분과 맞닿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1980년대 말에 고등학교를 다녔는데그때는 공부를 조금 한다치면 다 법대를 가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그러다 보니 제1지망도 저도 법대였습니다법학에 대한 열망 같은 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때의 저는어떤 열정도 꿈도 없었던  같습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목표와 성공의 기준, 그런 거에  자의식 없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학력고사는 다가오고점수는 계속 아슬아슬한 상황이어서 재수를 각오하고 법대를 쓰느냐법대를 포기하고 안전하게 서울대를 가느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습니다

저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 법학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재수는 하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법대 다음으로 커트라인이 높은 과를 가려니까뭔가 되게 없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과들을 뒤지다가 미학과를 발견했습니다

 

법대를 기대하셨던 집안어른들은 굉장히 세게 반대 했지만 저는 ‘떨어지면 재수는 없다라고 반 협박조로 미학과에 무사히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미학과가 저랑 너무 잘 맞았다는 것입니다

미학이 뭘 하는 학문인지도 모르고 그냥 들어 온 건데, 수업들이 너무 재미있는 겁니다

원래 예술도 좋아했었고 탁상공론 하나 것도 좋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미학과의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중학교 때부터 해왔던 음악도 다 뒷전으로 미루고 음악을 직업으로 하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잊게 됐습니다.

 

그러던 제가 어떻게 음악 프로듀서가 되었을까요

사실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많은 분들께서 서울대생이 음악을 직업으로 삼기까지는 대단한 에피소드나 굉장한 결단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시는데사실 아무리 돌이켜봐도 그런 결정적인 순간은 없었습니다

그냥 흘러가다 보니까 어느새 음악을 하고 있었다. 이게 가장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생각보다 굉장히 허무하죠?

 

저는 그렇게 허무하게뭔가에 홀린 듯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1997년부터 직업 프로듀서의 길에 들어서 박진영씨와 함께 JYP라는 회사를 설립하고그 후에는 독립해서 지금은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프로듀서로 살고 있습니다

우스운 게 독립한 후에도 굉장히 많은 선택지가 있었는데 왜 회사를 차리겠다고 생각했는지 그 선택의 이유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서두부터 제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제 인생에 있었던 중요한 결정들훗날에 보면 굉장히 의미심장해 보이는 순간들이 사실은 별 의미가 없었다는 것

때로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사실 큰 그림을 그리는 야망가도 아니고원대한 꿈을 꾸는 사람도 아닙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구체적인 꿈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번의 선택은 그때그때 제가 하고 싶은 것들에 따라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저와 방탄소년단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행보를 보면 이런 말이 믿기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방탄소년단은 빌보드에서 2년 연속 톱 소셜 아티스트상을 수상했고, 5만 석 규모의 뉴욕 시티필드 공연을 순식간에 매진 시켰습니다

얼마 전에는 그래미 어워드에 시상자로 초청받으면서 또 하나의 ‘최초’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외신에서는 감히 ‘YouTube 시대의 비틀즈라는 과찬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현재 전 세계 주요 지역 스타디움에서 월드투어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의 반열에까지 올라가게 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저는 영광스럽게도 빌보드가 뽑은 25인의 혁신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저희 회사 역시 엔터테인먼트 업계 혁신의 아이콘이자 유니콘 기업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아마 뉴스를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접하셨을 때 이런 성공 뒤에는 분명히 원대한 꿈이 있거나방시혁이 엄청난 야심가여서 큰 미래를 그려놓고 이를 차곡차곡 실현해갈 거라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야심은 둘째 치고 꿈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실 겁니다매번 하고 싶은 것을 아무거나 하고 그렇게 선택하다 보니 어쩌다 이 자리까지 왔다물론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이야기를 잠깐 바꿔 볼게요.

여러분저는 꿈은 없지만 불만은 엄청 많은 사람입니다얼마 전에 이 표현을 찾아냈는데 이게 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 같습니다

오늘의 저와 빅히트가 있기까지제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분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불만 많은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타협이 너무 많습니다

분명 더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튀기 싫어서일 만드는 게 껄끄러우니까 주변 사람들한테 폐 끼친다. 혹은 그냥 원래 그렇게 했으니까

이런 이유들로 입을 다물고 현실에 안주하는데요전 태생적으로 그걸 못 하겠더라고요.

 

제 일은 물론직접적으로 제 일이 아닌 경우에도 최선이 아닌 상황에 대해서는 불만을 제기하게 되고 그럼에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만이 분노로까지 변하게 됩니다.

아마도 ‘위대한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에서의 멘토로 저를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참가자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 분노를 폭발시키던 제 모습을 기억하실 겁니다

굉장히 많이 비호감이었죠

 

그때 이후에 그런 형태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고이제는 사실 그렇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경우는 없어졌지만 그 모습이 제가 ‘불만 많은 사람이라는 게 어떤 뜻인지 설명하기 좋을 것 같아서 잠깐 언급했습니다.

 

이런 저의 성정은 제 작업, 제가 만든 회사의 일에도 똑같이 발휘됐습니다

최고가 아닌 차선을 선택하는 ‘무사 안일에 분노했고더 완벽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데 여러 상황을 핑계로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는 관습과 관행에 화를 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를 가장 불행하게   음악 산업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산업은 전혀 상식적이지도 않고불공정과 불합리가 팽배한 곳이었습니다

음악을 직업으로 삼고 세계를 알아가면서 점점 저의 분노는  커졌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음악이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이용당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곡가로 시작해서 음악 산업에 종사한 지 21년째인데음악이 좋아서 이 업에 뛰어든 동료와 후배들은 여전히 현실에 좌절하고 힘들어합니다

 

음악 산업이 안고 있는 악습들불공정 거래 관행그리고 사회적 저평가

그로 인해서 종사자들은 어디 가서 음악 산업에 종사한다고 말하길 부끄러워합니다많은 젊은이들이 여전히 음악 회사는 일은 많이 시키면서 보상은 적게 주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고객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K-Pop 콘텐츠를 사랑하고이를 세계화하는 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한 팬들이 지금도 ‘빠순이이라고 비하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아이돌 음악을 좋아한다고 떳떳하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업계와 사회가 나서서 찬양하고 최고의 예우를 해줘도 모자랄 판인데, 왜 이렇게 대우를 하는 지저는 이해할 수도 없고 저는 화가 납니다.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전 세계 음악 팬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는 우리의 아티스트들은 근거 없는 익명의 비난에 힘들어하고 상처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피눈물의 결실인 콘텐츠 역시 부당하게 유통되거나 저평가 되고 때로는 부도덕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수단이 되는 경우가 아직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분노하게 되고 이런 문제들과 싸워 왔고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저는 사실 혁명가는 아닙니다

다만음악 산업의 불합리부조리에 대해서 저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외면하고 안주하고 타협하는 건 제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닙니다

원대한 꿈이 있거나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제 눈앞에 있고 저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그 분노가 저의 소명이 됐다고 느낍니다

 

음악 산업 종사자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온당한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화를 내는 것

아티스트와 팬들에 대해 부당한 비난과 폄하한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

제가 생각하는 상식이 구현되도록 싸우는 것

그것은 평생을 사랑하고 함께 한 음악에 대한 저의 예의이기도 하고팬들과 아티스트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이기도 하면서 마지막으로 제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 같습니다.

 

저는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종일 학업이나 업무에 시달리고 집에 왔을 때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뽀송뽀송한 이불 속에 들어갈 때 다들 너무 행복하시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복한 것도 있지만,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행복한 상황도 있을 겁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여러분 스스로가 어떨 때 행복한지 먼저 정의를 내리고그러한 상황과 상태에 여러분을 놓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셔야 합니다.

 

저의 경우두 번째 행복의 정의에 입각한다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특히 우리의 고객인 젊은 친구들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더 나아가서 산업적으로는, 음악 산업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고 음악 산업을 발전시키고 종사자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기여하는 것.

그리고 그 변화를 저와 우리 빅히트가 이뤄내는 게 저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이제 긴 얘기를 돌이켜볼게요.

제가 앞에서저는 구체적이거나커다란 꿈이 있지 않다고 얘기 했습니다

맞습니다어렸을 때나 지금이나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어떤 기업이 될 지방탄소년단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 지심지어는 제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 지에 대해서도 그림 같은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저의 모습을 외부에서 보면 자신의 꿈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고, 그 과정에서 저와 제 주변사람들제가 봉사해야 하는 고객들의 행복까지 빚어내는 매우 이상적인 상황으로 보일 겁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렸듯이 이런 시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저에게는 꿈 대신 분노가 있었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현실저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과 싸우고화를 내고분노하면서 여기까지 왔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저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고 제가 멈출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니 많은 분들께 위로와 행복을 드렸다면 그건 제 꿈이 아니라 제 불만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꿈 없이 살 생각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미래를 구체화하려고 시간을 쓸 바에는 지금 주어진 납득할 수 없는 문제를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음악 산업이 처한 수많은 문제들을 개선하는 데 매진할 것이고방탄소년단은 아시아 밴드혹은 K-Pop 밴드의 태생적 한계라고 여겨지는 벽을 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할 겁니다

저 역시 이런 일을 수행하는 데 부끄럽지 않게 끊임없이 반성하고 제 자신을 갈고 닦겠습니다.

 

결국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지금 큰 꿈이 없다고, 구체적인 미래의 모습을 그리지 못했다고 자괴감을 느끼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이 정의하지 않은 남이 만들어 놓은 행복을 추구하려고 정진하시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시간에

소소한 일상의 한 순간 한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무엇이 진짜로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 지 고민하십시오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남이 정해 준 여러 가지 기준들을 쫒지 않고일관된 본인의 기준에 따라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십시오

 

본인이 행복한 상황을 정의하고이를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고끊임없이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행복이 찾아올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반복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소명이 돼서 여러분의 앞길을 이끌어 줄 겁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여러분의 행복이 상식에 기반해야 합니다.

공공의 선에 해를 끼치고 본인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욕망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은 바깥 세상에 대해서 끊임없는 관심을 유지하시고자신과 주변에 대해 애정과 관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관심 속에서 여러분의 삶에 제기되는 문제들여러분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것들을 해결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상식을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노력들이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여러분 자신의 행복을 쫓는 것은 세상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일이  것이며이것이 우리 학교 졸업생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두서없는 저의 축사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대학이라는 일생에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과정을 잘 마무리하신 여러분

다시 한 번 격하게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될 인생의 다음 단계들을 행복 속에서 잘 살아내시고 10, 20년 후에, ‘내가 제법 잘 살아 왔네이렇게 자평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제 묘비에 

불만 많던 방시혁 

행복하게 살다 좋은 사람이라고 축복받으며 눈감음이라고 적히면 좋겠습니다

 

상식이 통하고 음악 콘텐츠와 그 소비자가 정당한 평가를 받는 그날까지저 또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 겁니다

격하게 분노하고소소하게 행복을 느끼면서요.

여러분만의 행복을 정의하고 잘 찾아서여러분다운 멋진 인생을 사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