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오로지 ‘나’의 이익으로 움직입니다.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
이것은 인류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심리가 움직이는 방향을 잘 헤아리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 됩니다.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정치권력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교리로 내세워야 그 종교가 번성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싯다르타는 참으로 우매한 분입니다.
왜냐하면 싯다르타는 사람들의 심리를 고려하지 않고
원법의 전달에만 힘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니 ‘신앙’이라는 상품이 가장 잘 팔릴 수밖에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앙’ 다음으로는 힌두교의 ‘참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참나’는 가짜 ‘나’만 털어내면 손쉽게 얻을 수 있는데다가
그 품질이 창조주 브라만과 차이가 없습니다.
가아(假我)가 모호하다면 ‘몰라’를 주입해
멍 때리거나 카타르시스를 느껴도 ‘참나’를 찾게 됩니다.
이처럼 ‘신앙’과 ‘참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고품질과 편리성을 두루 갖췄고,
그래서 종교계와 수행계를 이끌어 가는 명실상부한 쌍두마차입니다.
그런데 신성불가침과 같던 ‘신앙’과 ‘참나’를 거부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바로 싯다르타입니다.
그는 ‘無我’를 들고나와 이것들을 부정함으로써 사람들의 희망을 완전히 꺾어버렸습니다.
싯다르타는 종교적 구원 같은 것은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였고
당시 사회의 절대적 명제였던 ‘참나(아트만)’마저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사실 ‘신앙’과 ‘참나’가 없다면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게 됩니다.
그럼에도 싯다르타는 자신의 소신대로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그 소신이 바로 불교입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싯다르타의 뜻을 잘 간직하고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의 속성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이로운 것을 믿고 따르려는 심리
이것을 불교 용어로 我相이라 합니다.
我相은 ‘나’의 이익을 위해서 실상을 끊임없이 왜곡합니다.
그 왜곡이 너무 교묘해서 속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我相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구원받아 천국가든지
아니면 깨달아서 붓다가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我相은 ‘영원불변하는 최상의 존재’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이나 ‘참나’가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앙’과 ‘참나’는 나오기가 무섭게 불티나게 팔립니다.
이 얘기는 ‘신앙’과 ‘참나’가 수행의 함정이라는 뜻입니다.
我相이 자신의 존재를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
‘신앙’과 ‘참나’를 미끼로 쓰는 것이니까요.
이런 이유로 싯다르타는 無我로써
‘신앙’과 ‘참나’의 무의미함을 질타했습니다.
‘나’의 실체가 없는데 무슨 신앙이며 참나를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자 싯다르타는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힌두교 수행에 지친 수행자들이
처음에는 싯다르타의 혁명적인 무아론에 동조했습니다.
하지만 싯다르타의 無我에는 알맹이가 없습니다.
‘참나’를 부정했으면 ‘참나’와 다른 어떤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데
無我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당연히 비전이 있을 리가 없지요.
我相이 추구하는 것과 완전히 단절한 것이 無我이니까요.
일모의 희망도 없는 상태,
그래서 구할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그렇다고 되는대로 살아갈 것도 없는 상태
다시 말해 모든 차원의 착에서 떨어져
그냥 있는 상태를 싯다르타는 바랐습니다.
아상이 모조리 꺾여 모든 것을 여의고,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그냥 있게 되기를
간절히 염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꺼내든 무아의 처방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무아가 유물론에서 말하는 사멸이 아니냐며
뜰썩거리기 시작했고
이에 싯다르타는 불교의 보존을 위해 수습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단멸론을 경계하는 방편을 조금 썼는데
이것이 무아의 어떤 비전이 숨어 있다는 희망을 움트게 하였습니다.
결국 그 희망은 세존의 입멸과 더불어 무아에 대한 재해석을 유발하게 됩니다.
무아란
“오온으로 합성된 가짜 나가 없다”는 식으로 푼 것입니다.
오온의 정보로 구성된 나가 없다는 말은
가짜 나가 사라지고 난 바탕에 진짜 나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참나와 같게 됩니다.
그런데 참나라는 말을 쓰면 스승인 세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힌두교의 표절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명칭을 ‘본성’이나 ‘불성’으로 바꾸게 됩니다.
이것도 창피하게 생각한 불제자들은
그냥 ‘식’이나 ‘마음’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명칭을 쓰던 나가 본성, 불성, 여래장, 아뢰야식, 순수의식, 마음 등의 형태로 존재하게 됩니다.
즉, 유아론인 힌두교의 참나와 꼭 부합하는 것입니다.
결국 불제자들은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
힌두교의 참나를 포기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싯다르타의 무아는 공염불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컨대 깨달아 붓다가 되려는 마음은
구도욕인 동시에 아상의 극대화입니다.
이런 것을 완전히 부셔서
자신의 원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싯다르타의 무아입니다.
하지만 불제자들은 무아를 아상이 원하는대로 해석했고
그 결과 무아가 곧 참나가 돼버렸습니다.
불교는 없어지고 도로 힌두교가 되어 버린 뼈아픈 현실입니다.
당신은 나가 꼭 있어야 하나요?
나가 영원히 사라지면 안 되는 걸까요?
나의 범위가 없는데 왜 당신은 나가 있고 없는 것에 극도로 집착하는 걸까요?
나에 대한 착을 잠시라도 내려놓으시는 건 어떨까요?
'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덕마음공부] 마음공부의 기원 (0) | 2022.04.11 |
---|---|
[Danye Sophia] 간화선의 위기! ‘몰라’에 열광하는 한국불교 (0) | 2022.04.07 |
[현덕마음공부] 성찰하는 자아, 눈을 떠라! (0) | 2022.04.05 |
[현덕마음공부] 마음의 평화 (0) | 2022.04.04 |
[Danye Sophia] 청와대에 숨겨진 남모르는 풍수지리의 비밀! (0) | 2022.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