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를까요?
수행의 방법은 각 종파마다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체험’에 중심을 둔다는 사실입니다.
이론이나 사상 공부도 필요하지만 궁극에는 ‘체험’이 수행의 성패를 결정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행자들은 심오한 뭔가를 체험하기 위해 심신의 고통을 감내하며 수행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체험을 해야 궁극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첫 번째는 생각이 끊어져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삼매의 멸진처(滅盡處)라 하는데
생각이 소멸함과 동시에 그 어떤 것에도 머무름이 없게 되어 해탈을 체험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생각이 다시 일어나더라도
탐진치가 없는 청정한 마음 상태가 유지돼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번뇌 망상이 사라짐으로써 열반을 체험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생각이 힘을 잃어 제 구실을 못하는 가운데
오감을 觀하는 순수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마치 허공에 오감의 구멍을 뚫어 삼라만상을 감상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이를 통해 ‘참나’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탈’과‘열반’, 그리고‘참나’를 체험하면 어떻게 될까요?
‘해탈’은 생로병사의 고민을 해결하고
‘열반’은 평온한 심리를 부여하고
‘참나’는 ‘나’의 존재 의미를 찾게 해줍니다.
가히 ‘나’에게 꼭 필요한 삼박자를 두루 갖추었으니 깨달음이라 봄 직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수행법이 복잡하다 싶으면
딱 한 가지만 염두에 두면 됩니다.
그건 바로 /무조건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수행자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깨달음은
마음이 텅 비워진 가운데 차오르는 환희의 빛과 같습니다.
집착이 사라져 마음이 비워지면 저절로 어떤 식(識)으로 채워지는데
이것이 삼라만상을 비추면서 새로운 ‘나’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래장’,‘참나’, ‘본성’, ‘불성’, ‘아뢰야식’, ‘순수의식’, ‘깨어 있음’…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지만,
어찌 되었든 가짜 ‘나’가 사라진 뒤에 나타난 진짜 ‘나’라는 데엔 이견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싯다르타가 말한 깨달음이 맞을까요?
생각을 끊고 마음을 비워서 얻는 깨달음은
주관에 갇혀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자신만의 체험을 근간으로 삼기에
깨달음 역시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체험을 중시하는 수행자들마다
깨달음의 기준이나 정의가 각각 다르고
이런 연유로 늘 논쟁을 달고 살게 됩니다.
어쩌다가 이런 주관적 체험이 깨달음의 공식처럼 된 것일까요?
그건 인간의 나약한 심성에 기인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에 부닥치면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기에 신앙에 빠지곤 합니다.
가장 나약한 인간들부터 차례대로 종교적 신앙에 물드는데
여기서 남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수행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수행자들 역시 그 한계에 걸리면 부지불식중 신앙으로 선회합니다.
수행은 지성에서 움트지만 신앙은 체험을 먹고 자라납니다.
수행자들은 대개 진리를 탐구하지만
그 한계에 부닥치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체험을 강조하며
도로 신앙인이 돼버립니다.
붓다가 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체험을 구실로
자기 최면을 걸어 참나를 신앙하게 되는 것이지요.
교인들은 일주일에 한차례만 성경말씀으로 세뇌를 한다지만
수행자들은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의 깨달음을 지키기 위한 세뇌를 반복해야 하니
얼마나 수고스럽겠습니까.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앞서 말한 해탈과 열반 그리고 참나를 아무리 체험해도
단 일모의 깨달음도 얻지 못합니다.
꿈을 무한대로 꾼다고 어떤 답을 찾아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2차원 생물이 진화하기 위해서는 높이를 찾으면 간단합니다.
높이를 찾을 생각은 않고 생각을 끊어 마음을 비우고 그 속에서 빛을 뽑아내서
만물을 반조하는 행위를 한다면
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고대의 주술사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가이 만물의 이치를 터득한 성자였습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그 주술의 행위는 미개하기 짝이 없게 변했습니다.
이렇듯 오늘날 한없이 우러러보이는 수행자들의 체험이 머지않은 미래에 주술사들의 우행처럼 전락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이 무슨 철천지 원수라고 생각을 끊어 말려 죽이려고 하나요?
지금의 생각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인류는 수억 년을 진화해 왔습니다.
호모사피엔스에 이르러 비로소 생각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성장했는데
그 생각을 퇴화시켜 없애버린다고요?
이건 주술사들이 행하는 비합리적인 주술행위들보다 훨씬 기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생각을 없애고 마음을 비워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할 일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면
진리의 빛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강력한 에고로 가득 찰 뿐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지혜라는 것도 사실은 참나를 만병통치약으로 둔갑시키려는
화려한 말재주일 뿐이고요.
이 모든 희극은 수행을 체험으로 연관 지은 데에 기인합니다.
수행이 체험이 되면서 주관의 늪에 빠진 것이지요.
주관적 체험에서는 그 주조상 진리적 자각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당신이 체험하는 해탈과 열반, 참나 등은
당신의 고통을 줄여주는 진통제는 될지언정
그 이상의 혜택은 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 진통제로 인해 중생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아직도 체험하면 깨닫는다고 굳게 믿으시나요?
싯다르카가 성불을 한 직후, 왜 법을 전할 방법이 없다고 탄식했을까요?
깨달음이 체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발상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철저히 진리적 자각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할 만한 의식 수준이 선행되야 하고
더불어 깨달음을 전할 언어 역시 풍부해야 합니다.
싯다르타는 이 두 가지 조건이 구비되지 못한 시대의 한계를 통감했기에
전법을 포기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잘못이 없는 생각을 원수로 돌려
체험에 탐닉하지 마십시오.
이미 텅 비어 실체가 없는 마음을 당신이 어찌 비울 수 있겠습니까!
인류가 끊임없는 희생을 통해 얻어 낸 우리의 생각
이것을 없애기 보다는
잘 활용해서 깨달음에 도전해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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