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잘 쉬었다면 우리는 생명력이 아주 충실한 상황이 되었을 텐데요.
그런데 “잘 쉬어서 생명력이 잘 충전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명절은 정신적으로 피곤한 시기이기도 하죠.
오늘은 그래서 제목을
‘당신의 생명력이 부대끼는 이유’
이런 제목으로 여러분과 생각을 나눠볼까 합니다.
노자가 도덕경이라고 하는 책을 남겼지 않습니까?
노자의 도덕경은 양생법이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우리가 아는 도덕 윤리, 이런 거 하고 느낌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가 한번 알아보면서
생명력과 관련된 얘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생명력이 부대끼는 이유는
한정된 생명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와 덕으로 생명을 부양하라.
생명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억압받고 있는데
그 억압을 풀어서 해방하면
생명이 갖고 있는 본원적인 생명력이 전개되면서 스스로 잘 양성될 것이다.
우리가 아는 도덕은
“이건 하지 마라, 이건 꼭 해라”라고 하는 사회적 규범이죠.
사회규범은 인간 사이의 약속이잖아요.
계약을 한 것이죠. 사회규범이고 인위적이고 억압이 존재한다.
노자의 도덕은
오히려 해방 쪽에 무게중심이 있다.
덕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생명력 그 자체다.
생명을 키우는 힘이다.
“이 사람 덕이 있다”할 때는
생명력에 충실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 덕이 있다고 했을 때
“이 사람이 생명을 품어서 키우는 힘이 크다”
그러면 생명력, 생명력을 키우는 덕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그것은 도에서 오는 것이다.
도를 얻고 도를 따르는 것
이것이 우리의 생명을 충실하게 해주는 근본이다.
노자의 도는
천제, 하늘의 상제, 신, 신으로서의 자연의 모든 만물이 존속된다고 했던 대서
노자의 도는 조금 더 형이상학적으로
인격을 가진, 분노하고 상을 주는 인위적 신이 아니라
입법 이치, 이런 것인데
노자는 3가지 특징을 가진 것으로 묘사했는데
1) 도는 영원한 것이다
변화 속에 있는 것, 영원하지 않은 것은 도가 아니다
2) 도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벗어날 수 있다고 하면 도가 아니다
3) 도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알 수 있다고 하면 아는 사람과 알려지는 내용이 존재하기 때문에
도는 천지 만물의 모든 것인데 구분되고 구분되면 도가 아니다.
도를 논한다면 적어도 네거티브하게 접근하는 거죠.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말라.
1) 변하는 것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 모든 것은 벗어날 수 없는데, 도 안에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는데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고 취사선택하는 이것 자체가 도와 어긋난다, 그러지 마라.
3) 도는 알 수 없는 것,
지식을 쌓아가는 것, 쌓아가는 지식, 그래서 점점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야말로 혼란의 근본이라 생각한다.
노자에게 있어서 참된 지식이란
깊어질수록 알아야 할 지식이 점점점 없어져 가는 것이죠.
‘완전한 지식 없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도다.
인식주체와 인식되는 내용, 객체가 있다면
주체는 영원토록 이 세상에 대해서 공부하고 알아가야할 것이다.
그런데 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알아야 될 것이 없는 혹은 알 수가 없는
인식 주체와 인식의 객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구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의 지신이란 없다.
생명력의 근원이라고 하는 에너지는
우리가 변하는 것들에 대한 욕망,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고 취사선택하는 것들
모든 것을 지식으로 알아가려고 하는 그런 노력 속에 다 소진되어 버리고 만다.
도를 본받은 덕이라고 하는 속성은 무엇이냐?
1) 현덕, 가물 현, 검을 현,
너무 크고 너무 길어서, 너무 커서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가물가물하게 크다
어떤 덕은 눈에 보이지만, 어떤 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핵심의 문장이 나를 내세우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生而不有생이불유 爲而不恃위이불시 長而不宰장이부재 是謂玄德시위현덕” 유명한 구절
生而不有생이불유_ 내가 만들었지만 소유하지 않는다.
長而不宰장이부재_ 내가 우두머리지만, 직접 주제하지는 않는다.
爲而不恃위이불시 위_내가 행했다, 내가 만들어냈다, 내가 공을 세웠지만
불시_나의 공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是謂玄德시위현덕_ 이것을 이르러서 현묘한 덕이라고 말한다.
불유, 부재, 불시_ 나를 내세우지 않는다.
생이불유_ 창업자의 정신
장이부재_ 관리자의 정신
위이불시_ 담당자의 정신이었으면 좋겠다.
덕의 속성 중의 하나는
즉, 생명력을 충실하게 하기 위한 속성 중의 하나는
나를 내세우지 않는다.
나에게 자랑할 3개가 있는데
1) 검소한 것
2) 자애로운 것, 사랑하는 것
3) 천하의 나서지 않는 것
(이것이 덕의 속성이다)
그렇게 되면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를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표현
케세라 세라는 될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같은데 그게 아니고
될 일은 자기 조직화가 되어서 일어난다는 뜻
자기의 길을 따라서 사물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굉장해 애를 써서 노력해서 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은
그 일을 이루려는 노력 속에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과 이런 것들이 너무 많이 개입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상할 뿐만 아니라
일도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죠.
3가지 덕의 속성
1) 柔能制剛유능제강_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원리, 태극권의 원리 같기도.
2) 上善若水상선약수_ 지극한 선, 아주 좋은 상태라고 하는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다투지 않고, 중력을 따라서 결국 막히고 멈추었다가 또 돌고 돌아서 내려서
바다로 흘러가니
다투지 않고 목적을 이루는 물과 같다, 좋은 것이란.
3) 無爲而治무위이치_ 내가 굳이 일부러 억지로 의도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다 다스려진다, 다 이루어진다.
노자의 양생법으로서의 이야기한 덕의 이치는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한 것.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해롭다
무위로 다스리면 이롭다.
지혜는 지식도 아닌데, 지혜로 다스리는 게 좋은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때 당시 춘추전국시대 라고 하는 것이
나름대로 한 칼 있다고 생각하는 컨설턴트들이 다
“이렇게 하면 나라가 잘 삽니다”라고 하는 부국강병책을 내세우고
자기 자신을 ..있다고 자칭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내놓은 정책들이 대단히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오히려 해롭다.
그런 것을 채택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소박하고 본성에 따라서 삶을 영위할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이롭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양생법 관점에서, 우리의 생명력을 충실하게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가장 큰 것이 ‘내가 뭔가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
‘내가’라는 생각이 없고, 뭔가를 한다는 인위적인 생각이 없는 것
불교적인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이 이루어지도록 흘러가게 놔둔다’는 것이 핵심.
오늘날 같이 고도로 인위적인 사회에서 생활인으로 살아갈 때
이런 것들하고 정반대의 상황을 맞이한다.
매일매일 전쟁하듯이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데
문제는 그 속에서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고갈되고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자.
깊이 생각하는 것이 명상이다.
노자는 왜 이런 얘기를 했을까?
내가 뭔가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평안하고 자기의 생명력을 충실하게 하기는 쉽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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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의 행동, 생활의 지침은?
이치에 맞게 행동해라.
이치라고 하는 것은
먼저 준 다음에 그다음에 받게 된다.
비운 다음에 채워지게 된다.
物極必反물극필반_ 세상 이치라고 하는 것은 한쪽의 극단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그 반대편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준 다음에 받게 되는 것보다는 그냥 받으면 제일 좋고
차선은 적게 주고 많이 받으면 좋다.
배운 다음에 채워지는 것도 언제 채워지게 될지 모르니 일단 채우자, 비우는 것은 나중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변비에 많이 시달린다.
노자가 생각했던 것은
일음일양,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고, 이렇게 교차하고 교환하는 것이 도에 가깝다.
정지해 있는 것, 변화하지 않고 변화를 거부하고, 주지 않고 비우지 않고 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다.
안간힘을 써서 생명력을 지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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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노자의 도덕경은 윤리를 지켜라, 규범을 준수하라는 것과는 정반대
오히려 양생법, 우리의 생명력을 보존하고 키워가느냐 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크게 두 가지, 도와 덕으로 나뉘는데
1) 도의 입장에서는
-변하는 것에 마음을 주지 마라.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지 말라.
-지식을 너무 숭상하지 말라.
2) 덕에 관해서는
-덕스러운 정도, 덕의 미덕은 주고 나서 받으려고 해라.
혹은 주고 나서 잊어버려라
-비우고 나서 채워도록 해라.
비우기만 해라, 채우는 것은 잊어버려라.
물은 낮은 곳으로 모여서 채워지게 되어있다.
내가 낮은 곳에 임하면 천하의 물들이 다 모여들 것이다.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에.
지금으로 말하면 이것은 과학입니다.
받는 것과 채우는 것은 그렇게 걱정 고민 안 해도 된다.
그러나 눈뜨고도 코를 베어 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내 것을 챙기고 받고 채우고 하는 것을 제때 하지 않으면
영원히 털릴 것이다, 남이 가져갈 것이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멋있는 말이니까 따라하자” 이게 아니고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를 비추어보는 것
결론은
‘내가 뭘 한다’는 생각이 가장 큰 에너지 낭비의 구멍이었다.
/생명력을 키우고 싶으냐?
양생하고 싶으냐?
그러면 내가 뭘 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내가 뭘 한다’는 생각이 정확하게는
‘내가 뭘 한다’는 생각이 큰 문제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봐라.
그러면 당신의 생명력이 서서히 되살아나서 활기찬 삶이 될 것이다./
오늘 노자의 도덕이 가진 양생법적인 성격에 대해서
여러분과 이야기를 생각을 나누어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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