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가장 완벽한 존재를 추구합니다.
대부분은 종교적 신앙을 통해 그것을 얻으려고 하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려 합니다.
이처럼 진화의 과정을 단번에 뛰어넘어
무상의 경지에 이르려는 사람들이 수행자입니다.
이들에 의해 수행의 역사는 씌어왔는데
그 결론은 힌두교에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인간의 사고로 힌두교의 유아론보다 완벽한 사상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일까요?
힌두교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삼라만상은 정보(생각)의 점멸로 되어있다.
2) 나 역시 정보로 되어 있고, 이것에 의해 생로병사의 고통을 받는다.
3) 나를 이루고 있는 정보를 털어내면 진짜 존재인 참나가 드러난다.
4) 참나는 우주 의식과 같기에 참나가 곧 삼라만상 모든 것이다.
이상은 힌두교의 사상 체계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간결하면서도 완벽했으면
오늘날까지 이것을 부정한 사람은 딱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바로 싯다르타와 용수입니다.
싯다르타는 무아론으로 힌두교의 유아론을 부정했고
용수는 중론에서 유와 무로서 유아론의 논리를 박살냈습니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무아론과 용수의 중론은 그저 허공의 메아리였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는 수행자들이 없었고
그 결과 초기불교에서 오늘날의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불학은 힌두교의 것으로 채워졌습니다.
한마디로 불교 교리의 대간을 유아론이 차지한 것입니다.
불교 수행자들은 힌두교의 유아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심론을 만들었고
이것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불교의 대들보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참나(아트만)를 모방한 알아차림, 깨어있음, 순수의식, 본성, 불성 같은 것들이 퍼졌고
일체유심조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유식론은 말 그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식뿐이라는 것입니다.
식의 첫 번째는 안이비설신의 오감으로 들어오는 5식이고
두 번째는 5식을 개념화하는 6식입니다.
6식의 정보를 조합해 판단하는 7식이 있는데
7식엔 나의 개념이 뚜렷해서 에고가 쌓이고 그것이 잠재되어 기록됩니다.
마지막은 8식 아뢰아식인데
이것은 에고가 없는 순수한 의식이어서 참나, 본성, 불성이라고 부릅니다.
아뢰야식은 우주의 바탕에 존재하면서
상과 형의 종자를 뿌려 삼라만상을 창조한다고 하니
가히 조물주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식_ 안이비설신의 오감
6식_ 5식을 개념화
7식_ 6식의 정보를 조합해 판단
8식_ 아뢰야식)
불제자들은 유식론을 쪼개고 분석해서 방대한 양의 연구물을 내놓았는데
어찌 되었든 변치 않는 것은
식이 존재한다는 힌두교의 유아론입니다.
물론 불제자들은 유식론이 무아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며
힌두교의 참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식이 생각(정보)이고 마음이고 나의 본질이라는 논리는
참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식= 정보(생각)= 마음= 나)
그리고 정답을 모르면 말이 많아지고 복잡해지는 것처럼
무아를 설명하기 위해 그런 방대한 표현과 논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포장지(표만)만 바꾼다고 내용물이 달라지지는 않겠지요.
마음은 비유하자면 허공과 같습니다.
그것은 현재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눠도 되고
유식론처럼 여덟 단계로 쪼개도 상관없습니다.
8식의 아뢰야식에 흠결이 있다하여 10식으로 놀려도 무방합니다.
허공에 경계가 없는 것처럼 마음 역시 같습니다.
따라서 마음에 계단을 만드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그냥 편리에 따라 임의로 구분해 놓은 것이니까요.
아무튼 유식론은 음지에 있던 유아론을 양지로 끌어올렸습니다.
이때부터 불교는 힌두교의 유아론을 대놓고 주장하고
심지어 힌두교의 경전이나 기도문 같은 것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게 됩니다.
불교의 힌두교화가 빠르게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유식론은 칸트의 인식론과 헤겔의 관념론에 비해
학문적으로 우수하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학문적 고찰을 떠나 유식론에서 도출되는 아상은
커다란 피해를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힌두교의 참나를 신앙하는 풍토를 조성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힌두교의 참나가 어떤 것이던가요?
참나는 쉽게 말해 요술 방망이입니다.
깨달음도 주고 그 부속물로서 열반과 해탈, 영생도 줍니다.
그리고 천지창조의 재미도 주고 그 속에 들어가 마음껏 재미도 느끼게 해줍니다.
일체유심조 이니 못할 것이 하나도 없겠지요.
그러니 신앙종교에서 주는 구원의 선물보다 수백 수천 배는 매력적입니다.
신앙종교에서는 기껏해야 천국에서 살거나
좀 더 발전하면 하나님의 옆자리 정도에 앉지만
참나는 조물주 자체를 선사하니
어느 누가 마음이 끌리지 않겠습니까.
거기다 참나는 스스로 얻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어떤 중간 매채체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자리에서 찾으면 되니까요.
그것을 찾는 방법도 매우 간단합니다.
‘몰라’를 외쳐 멍 때리거나 어떤 카타르시스의 감정을 느끼면
그것이 ‘참나’라고 합니다.
가끔 무념무상이 되어도 참나이고 대상에 휘둘리지 않고 깨어 있어도 참나입니다.
이렇게 참나는 신앙에 의존하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는데다가
그 결과가 조물주이니 얼마나 달콤하겠습니까.
이렇게 상품이 화려하니
이것에 넘어가지 않는 수행자들이 거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참나라는 건
당신이 원하는 에고를 최대한 만족시켜주기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환영입니다.
참나 같은 것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나라는 건 싯다르타의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깨달음의 주체도 대상도 없습니다.
당신이 절망해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없는 ‘나’를 꾸며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나’가 없다는 것에 충격적인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무가 환영이라면 어떨까요?
유와 무가 당신의 착각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싯다르타의 무아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건 나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유무 논쟁을 벗어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점을 간파한 수행자들은 꽤 있습니다.
하지만 실마리만 잡았지, 그 이상의 진천은 보이지 않습니다.
가령 유와 무를 나누어서 보지 마라, 불이법을 직시하라,
나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등으로 설명하지만
이 역시 유와 무에서 자유롭지 못한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유와 무의 비밀을 풀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싯다르타의 무아는 단편적으로 보면 ‘나’가 없다는 선언이고
그 이면의 뜻은 있다 없다의 착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와 무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인 방법은
용수의 중론에 비교적 잘 나와 있습니다.
중론은 다소 부족한 면은 있지만
인류가 만든 형이상학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논리를 갖추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유식론은 참나와의 타협이고, 굴종이고, 항복입니다.
이런 것을 떠나서 현대학론에 특별히 기여할만한 철학적 체계를 지닌 것도 아닙니다.
그냥 세친이란 수행자가 카르마의 기능을 구체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컨대 붓다의 무아론은 힌두교의 참나 같은 것으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유와 무로써 ‘제1원인’을 풀어
실존의 코드를 찾아야만 가능합니다.
당신은 아직도 힌두교의 참나를 믿고
그럼으로써 나에게 달콤한 영생과 열반을 주입하고 싶으신가요?
혹시 붓다의 귀의하면서도 부지불식중 힌두교의 참나를 신앙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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