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당신은 '깨달음'의 환상에 속고 있다!

Buddhastudy 2022. 3. 10. 18:49

 

 

지방 어느 사찰의 스님 한 분이

남몰래 자신의 신장을 떼어 보시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이 몇몇 스님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러자 스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보시한 스님이야말로 진정한 각자(覺者)이며 보살이라 추앙하였습니다.

이는 대자대비한 마음을 깨달음으로 연결한 사례입니다.

 

세존의 전생담.. 눈을 떼어 보시하고

굶주린 사자에게 몸을 보시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대승불교의 보시바라밀을 보면

하급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보시하고

중급으로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 보시하고

상급으로 자신의 생명을 거리낌 없이 보시합니다.

 

이쯤 되어야 보살이며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과연 중생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마음이 있으면

저절로 깨닫게 될까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수행자들은 오장육부와 눈을 떼어 환자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깨달음에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힘들다면 적어도 아프리카의 빈곤국에 건너가

평생을 봉사하면서 사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보시행이 거룩하고 찬양할 만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깨달음으로 직결되는 건 아닙니다.

 

대자대비한 성인이 되고 청렴결백한 군자가 되는 길은

기독교나 유교에도 있습니다.

굳이 종교인이 아니어도 효녀 심청이 같은 범인들도 적잖게 있고요.

 

보시행은 공덕을 쌓고 업을 가볍게 하는 효과가 분명 있지만

깨달음에까지 미치는 건 아닙니다.

 

보시행과 더불어 불교에서 수행의 척도로 삼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탐진치입니다.

 

불경에 보면, 싯다르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에 좌정해 있을 때

마왕 파순이 나타나 권욕, 물욕, 색욕을 가지고 탐진치를 부추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이것들을 능히 극복하고 곧바로 깨닫게 됩니다.

 

이런 내용 때문에 탐진치의 소멸이 곧 깨달음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쉽게 말해 깨달음에 인성의 잣대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전지의 영역이고

인성은 선택 사항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깨닫고 난 뒤에 성인군자가 될지, 아니면 밭 가는 평범한 농부가 될지

그것도 아니면 원효대사처럼 성과 욕에 걸림이 없는 불기군자가 될지는

선택에 따른 것입니다.

 

가령 컴퓨터의 가상공간을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는 사람은

자유의지에 따라 취향에 맞는 캐릭터를 선택하게 됩니다.

 

무조건 성자의 캐릭터만 선택하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곧 지()의 완성이며

그 이후의 성품은 잣니의 선택에 의해 갈라집니다.

 

이런 선택의 문제 때문에 붓다와 보살이 나뉘고

심지어 밭가는 붓다와 술마시고 노래하는 붓다도 등장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수행자들이 도덕적 잣대로 깨달음을 평가하는 것은

깨달음에 대한 환상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오로지 깨달음으로만 판단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옛 조사들은 이타나 인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보살행에 대해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하려는 것은

마치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크게 잘못된 주장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살도를 닦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뒤에 보살도를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인격을 닦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건

개인의 수양과 사회의 공익을 위해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다만 그것을 수행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수행은 전적으로

아느냐 모르냐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보시행을 하거나 탐진치를 없애면

깨닫게 된다고 믿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