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선과 깨달음, 마음이 부처라니

Buddhastudy 2025. 2. 11. 19:52

 

 

한 납자가 마조 선사를 찾아와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

그 말에 큰 깨달음을 얻은 납자가

대매산에 들어가서 30여 년간 머물렀는데

이름을 법상이라 한다.

 

대매의 법상이 법전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마조가

수좌를 대매산으로 보내 전하게 했다.

마조 선사께서는

전에는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셨는데,

요즘에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법문을 하십니다.”

그 늙은이가 망령이 들었구나.

그래도 나는 나대로 마음이 곧 부처다하리라.”

수좌가 돌아와서 마조에게 스님의 말을 전하자

마조가 말했다.

대매산의 매실이 익었구나.”

 

전등록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사실은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대매 법상은

마조 스님이 입적한 후에 매산에 은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고 하니,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갑자기 의심과 회의가 막 몰려오나요?

그렇다면 잘 됐습니다.

그 의심과 회의는 어디서 오는지 살펴보십시오.

그 의심과 회의는 바로 믿음에서 왔습니다.

 

선과 깨달음이라는

있음직한 유튜브 동영상에 나오는 내용이니

당연히 사실을 말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입니다.

믿음과 의심은 같은 곳에서 나옵니다.

 

법상의 깨달음이 믿음인지 깨달음인지

만약 마조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전하는 책에는

법상의 답이 전해지게 된 사연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염관 제안 밑에 있던 승려가

주장자 감을 베다가

길을 잃고 암자가 있는 곳까지 와서 물었다.

화상께서는 여기에 얼마나 계셨습니까?”

사방의 산이 푸르렀다 누렇게 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 스님이 돌아와서 염관 선사에게 말하니

염관이 말했다.

내가 예전에 어떤 스님 하나를 만났다가 소식이 끊겼는데 그분이 아닐까?”

그래서 다시 연락을 보내니

법상이 게송을 지어 대답했다.

 

최잔고목의한림, 앙상한 고목이 묵은 숲에 의지해 섰으니

기도봉춘불변심, 마음 변치 않고 맞이한 봄이 몇 차례던가?

초객우지유불고, 나무꾼이 지나쳐도 본체만체 하거늘

영인나득고추심, 능숙한 목수가 어찌 힘들게 쫓아와 찾는가?

 

매실이 익었다고 마조가 말했든 염관이 말했든

오래전 이야기를 듣는 우리들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다른 책에서 법상의 매실이 익었다고 말한

염관에게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믿음과 의심이 멈춰버리면

저렇듯 부러진 마른 나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됩니다.

앙상한 고목이 차가운 숲에 서 있으니

표현으로는 그다지 멋있어 보이지 않지만

그 고요함은 비할 데가 없습니다.

 

바람 한 켠 스치지 않는 그 마음에

부처가 있고

또한 믿음과 의심이 교차합니다.

거기에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라는 전언이 지나가고

매실이 익었다는 감탄도 흘러갑니다.

 

헤매다가 법상의 암자를 찾은 승려가 나갈 길을 묻습니다.

산을 내려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법상이 일러줍니다.

흐름을 따라가라.”

 

법정 스님이 알려준 다른 이야기에서는

대매산에서 내려온 그 승려가 염관에게 안부를 알리자

염관은 법상의 하산을 종용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법상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한 못의 연잎으로 걸치기 모자람이 없고

몇 그루의 잣나무 열매로 먹고 남았네.

함부로 세인에게 거처가 알려졌으니

풀집을 옮겨 더 깊은 데로 들어가노라.

 

기개는 물론이지만, 그 심정도 절절하게 전해집니다.

마음을 한 번 보고 나면 세상이 허술해 보입니다.

도대체 그 장난감을 가지고 뭘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정말로 어지러워서 거리가 멀어집니다.

 

남전이 말합니다.

도는 아는 데에도 속하지 않고, 모르는 데에도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망령된 깨달음이며, 모른다는 것은 멍한 상태이니라.

그러니 참으로 향함 없는 돌을 온몸으로 체득했다면

참 본성은 텅 빈 허공과 같이 탁 트여 막힘이 없으니

어찌 시비를 따지겠는가

 

아무리 요란한 영화도 알고 보면

백색 스크린에 펼쳐지며

아무리 적막한 화면도

HD4K를 만들어주는

반도체 픽셀 소자 위에 그려집니다.

 

그 자리는 누가 비춰주고 펼쳐주기 전에는

그저 그렇게 있습니다.

거기를 한번 보면

모든 요란함과 고요함이 이해됩니다.

바탕을 알면 뭐가 상영되든 그렇습니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인과를 떠난 사람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그대가 묻지 않았다면 나도 참으로 모를 뻔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꼭 무슨 견해가 있어야 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됩니다.

텅 빈 자리를 계속 비웠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부처라고 해도 되고, 아니라고 해도 됩니다.

 

 

달 밝은 밤에 마조가 제자들과 도량을 거닐다가

밝은 달을 가리키며 한마디씩 일러보라고 했다.

 

서당 지장,

공양하기 좋은 때입니다.”

백장 회해,

수행하기 좋은 때입니다.”

남전 보원은 아무 말없이 양팔을 흔들면서 가버렸다.

 

 

마음에 해가 들어찼는데

무슨 달빛에 웬 공양이고 수행입니까?

걷는 길이 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