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선과 깨달음, 원래 있다는데

Buddhastudy 2025. 2. 6. 20:01

 

 

스님들이 법당 주변을 도는 행세를 하는데

지통이 홀연히 소리쳤다.

나는 이미 크게 깨달았다

스님들이 모두 놀랐는데,

그다음 날 큰스님 귀종 대사가 스님들을 모은 후 자리에 올라 말하길

지난 밤에 그게 깨달았던 놈은 나오거라.”

지통이 나오면서

지통입니다라고 했다.

귀종 대사가 말하길

너는 어떤 진리를 보았길래 그러는가?

나에게 말해보라.”

비구니는 원래 여자입니다.”

귀종대사가 잠자코 인가하였다.

 

비구이가 여자인 것을 모르는 스님이 있겠습니까?

다 아는 이야기를 깨달은 진리라고 내놓았는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틀린 말이 아니니 틀렸다고 할 수도 없겠군요.

그래도 뭔가 좀 수상합니다.

 

황벽산의 희운 선사는 말합니다.

본래 마음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견문각지에 속하지도 않고

견문각지를 벗어나지도 않는다.

견문각지를 떠나 마음을 찾지도 말고

견문각지를 버리고 법을 취하지도 말라.”

 

본래 있는 것을 찾는 거라서

비구니는 여자가 맞습니다.

 

얻은 것이 없는데 깨달음이고

원래 있던 것이니 깨달음이라고 얻을 것이 없습니다.

 

깨달음의 역설을 설명하려는 순간

깨달음이 망가집니다.

 

황벽 스님은

마음이라는 것을 인연, 화합하는 사대가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몸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오온이 마음이 되지만,

그 마음에는 나도 없고 주인도 없습니다.

그렇죠, 오온이 마음이 됩니다.

그걸 모르지는 않습니다.

 

엄양이 조주를 찾아와 말하길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모두 놓아버려라.”

한 물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놓아버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도로 짊어지고 가거라.”

 

가지고 오지도 못하고 내려놓지도 못합니다.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끊이지 않으니

이것을 있다고도 없다고도 못합니다.

당연히 도로 짊어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엄양은 근심만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황벽 스님이 연기법의 십팔계가 비었다고 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공하다고 했지만 그 말의 뜻조차 공합니다.

차라리 깨끗합니다.

이것을 직접 보기 전에는 믿기가 힘들 뿐입니다.

 

밖으로 색과 소리에 얽매임을 저 마음이라 하며,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이 마음이라 하느니라.

만약 밖으로 색에 물들지 아니하면

곧 저 마음이 없음이오.

안으로 망념이 나지 아니하면

곧 이 마음이 없음이니

이것은 두 변이 없는 것이니라.”

 

자동차, 노트북, 아파트 같은 실체가 있는 물건을 마음이라고 하면

당황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스님들 법문에서는

그것이 그저 한 물건일 뿐이고

한 물건은 밖으로 색에 물든 마음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색에 물든 마음에서 일어나는

좋고 싫은 욕탐의 마음은 망념의 수준이니

더 이야기할 것도 없습니다.

 

최소한 여기까지가 분명하면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짊어지고 가는 것은 다음 문제입니다.

 

선사에게 어떤 중이 물었다.

쥐 두 마리가 번갈아 등나무를 갉아먹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몸 피할 곳을 찾아라.”

몸 피할 곳이 어딥니까?”

자네가 지금 나를 보고 있지 않은가?”

 

물든 마음에 피난처를 찾습니다.

마음의 피난처가 어디에 따로 있을까요?

마음이 생겨난 곳으로 들어가면 그곳이 피난처입니다.

그곳은 마음이 사라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무엇이 대인의 모습입니까?”

그러자 조주가 손으로 얼굴을 만지더니

두 손을 모으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온 견문각지로

근심을 설계하고, 기상천외한 고통을 제조합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만들어 놓은 생각공장에서는

매일매일 다양한 한 물건들이 생산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새로 생긴 장치 덕분에

한 물건의 대량 생산도 가능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것이 없으면

세상이 사라지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모두 비슷하게 살고 있습니다.

 

조주 스님처럼 하루 한 번 자세를 가다듬는 일이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미 까맣게 잊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진리를 찾고 도를 구한다면서도

생각공장에서 생산한 VR 장치를

온몸의 견문각지 발생부위에 장착하고 있습니다.

VR 장치를 떼내지 못하면서

자세를 가다듬는 환상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누군가

비구니는 여자입니다라고 말하면

그 사람이 쓰고 있는 VR의 버전을 확인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돌아가는 일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이 사문이 옳고 바르게 먹을 음식입니까?”

먹었는가?”

이 음식을 먹으려면 어떤 방편을 써야 합니까?”

그대의 입이 막혔다.”

 

VR을 겹겹이 차고 있어도 길이 없지는 않습니다.

겹겹이 찬 VR을 보는 자는 같기 때문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어디를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방편을 찾기 전에

보는 자를 찾아야 합니다.

 

임제가 낙보에게 물었다.

한 사람은 몽둥이를 휘두르고, 한 사람은 고함을 질렀는데

어느 쪽이 거기에 더 가까운가?”

낙보가 말했다.

둘 다 진실하지 못합니다.”

임제가 말했다.

그러면 진실한 것은 무엇인가?”

낙보가 바로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임제가 후려쳤다.

 

 

눈 밝은 제자가

눈앞에서 소리 지르며 후려 맞고 있는데

더 가까운 것을 어디서 찾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