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선과 깨달음, 생사를 끊는다

Buddhastudy 2025. 2. 4. 19:49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시의 마음이 도이다.”

그래도 닦아 나갈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든 하려 들면 그대로 어긋나 버린다.”

하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 도를 알겠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고에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헛된 지각이며,

모른다는 것은 아무런 지각도 없는 것이다.”

만약 의심할 것 없는 도를 진정으로 통달한다면

허공같이 툭트여서

넓을 것이니 어찌 애써 시비를 따지겠느냐?”

 

현실적으로는 열심히 해야 합니다.

말에 속아서 아무것도 안 하면

지금 이 신세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뭘 열심히 해야 합니까?

그겁니다.

중요한 것은 뭘 하는가입니다.

 

정말 다 제쳐두고 10분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봅니다.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엄연하게 용어까지 있습니다.

무위행입니다.

 

뭐가 막 움직이고 바뀌는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세상이 변합니다.

이것이 형상이 형상임을 보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사의 흐름을 끊고

무위의 언덕을 건너는 데에는 다른 특별한 것이 없다.

그저 당사자가 맹렬한 근기로써 자기의 흉금을 내걸고

일체의 유위, 유루는 헛꽃과 같아

원래 참다운 성품이 없는 줄 확실히 아는 것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늘 무언가 하는 것에 익숙해서 뭔가 안 하는 것은 매우 낯섭니다.

게으른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지 않느냐고요?

이 사람은 열심히 뭔가를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열심히 하는 거죠.

 

중도와 초월을 말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균형은 쉽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무위행은

생사를 초월한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실제로 생사가 걸려 있는 상황이 되면

사람은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약산 문화의 사미가 하직을 구하니 약산이 물었다.

어디로 가려는가?”

강릉으로 계를 받으러 갑니다.”

계는 받아서 무엇하려고?”

생사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약산이 말하길

어떤 사람은 계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생사를 벗어나려는 생각도 안 하는데

그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배고픈 사람이 땅을 팝니다.

밭을 일구어 씨를 뿌립니다.

거름을 주고 비를 맞습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익습니다.

열매를 먹고 배고픈 사람이 다시 땅을 팝니다.

 

유엄이 운암에게 물었다.

너는 백장선사 밑에서 무슨 수행을 했느냐?”

네 생사를 투탈했습니다.”

, 그거 잘 됐군.

생사의 바탕을 깨끗이 빠져나왔느냐?”

본래 자기에겐 애당초 생사 따위는 없는 것입니다.”

이 바보 녀석아

너는 백장 밑에 20년이나 있었다면서

아직도 판에 박은 수작을 하고 있느냐?”

 

애초에 생사가 없다는 이가 땅을 팝니다.

땅을 일구어 열매를 먹고도

땅 파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땅 파는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쟁기를 뺏고 곡괭이를 묻어야 생사가 보입니다.

 

생사란 우리 일상 속에 깊이 숨어 있습니다.

그대로 앉은 자리에서 천 길 절벽에 선 듯하여

범부에 매지도 않고, 성인에 끄달리지도 말아야만

비로소 일을 마친 납승이라 하리라.”

 

이것이 생사를 투철하게 벗어나는 일입니다.

일상을 절벽 위에 세우는 일입니다.

 

임제가 상전 스님을 방문해 물었다.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경지에 대해

스님께서는 얼른 말해보시오.”

나는 다만 이럴 뿐이네.”

이 숱한 까까머리 중들아

이 속에서 무슨 밥그릇을 찾겠느냐?”

 

진리를 알고 싶다지만

태반은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싶고

불성을 보고 싶다지만

대부분은 불성이 나를 봐주길 바랍니다.

 

그러니 발 디딜 곳이 없고 머물 자리도 없습니다.

무딘 낫으로 계속 벌초를 합니다.

 

경전을 보아도 생사 속에 있고

경전을 보지 않아도 생사 속에 있으니

그대들은 어떻게 벗어나겠는가?”

한 스님이 불쑥 물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되겠지만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밤이면 밤마다 땅을 파고, 밭을 일구면서

스스로 머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쟁기질을 하면

내내 그 밭에 있으니 머무는 것처럼 생각되죠.

입에 밤송이가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는 생사를 알지 못합니다.

 

천마만난간여환, 천마와 만난을 만나도 헛깨미처럼 볼지니

직사탄두철전선, 뒤집혀 여울에 버려진 배와 다름없네.

탄투금강병률자, 금강석과 밤가시를 통째로 삼켜야만

방지부모미미생, 부모가 날 낳기 전 모습을 알게 되리.

 

우리는 늘 생사를 마주합니다.

거창한 단어로 삶과 죽음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매 순간 벌어집니다.

매 순간이 생사에 묶이는지 벗어날지를 선택하는 자리입니다.

생각으로 숨어들지 말고

그것을 마주 보면 늘 기회가 있습니다.

 

생사를 끊는 것은 죽고 살고 하는 생각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보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분명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살았다고 여기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살아있다는 생각입니까?

아니면 살아있는 것을 아는 무엇입니까?

 

물에는 근육도, 뼈도 없는데

능히 쌀 만 섬을 싣는 배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 도리가 어떻습니까?”

여기는 물도 없고 배도 없는데 무슨 근육과 뼈를 말하는가?”

 

몇 건 안 되는 무게로 늪에서 허우적거리니

세상이 다 무거워 보이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