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하 천연 선사가
혜림사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일입니다.
방이 매우 추웠는데 장작이 없는 까닭에
법당의 목불을 가져와서 쪼개 방을 데웠습니다.
이튿날 절 살림을 총괄하는 원주 스님이
이 사실을 알고서
단하 스님을 꾸짖었습니다.
“불상을 장작으로 쓰다니 이 무슨...”
“부처님을 다비해서 사리를 얻으려고 했소이다.”
“나무토막에서 무슨 사리가 나오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나를 꾸짖습니까?”
원주 스님이 그 자리에서 눈썹이 몽땅 빠져버렸다고 합니다.
불교를 몰라도 아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자주 인용하는 고사죠.
김성동 작가의 <만다라>라는 소설은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었는데
비슷한 내용을 인용해 불상을 태우는 이야기를 꾸미고 있습니다.
소설에는 화두도 나오죠.
입구는 좁고 속은 넓은 병에
새 한 마리를 집어넣고 키웠는데
새가 자라서 꺼낼 수가 없습니다.
병을 깨서도 새를 다치게 해서도 안 되는데
자 어떻게 하면 새를 꺼낼 수 있을까요?
저 문제를 마주하면서
답을 하려고 하지 말고
진실로 답이 솟아오를 때까지
10년만 의문을 품어 보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저 문제는 짧게는 수초만에 풀릴 수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덤벼들 엄두를 못 내고
고민스러운 먼지만 날리고 맙니다.
화두를 푸는 원리는 모르지 않지만
뭔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준비가 안 되었거나
뭘 좀 더 공부를 해야 하거나
훈련을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바로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듭니다.
“봉황이 날아도 다다르지 못할 때는 어떻습니까?”
“어디로부터 날아오느냐?”
의외로 주변적인 것들을 우리는 삶의 기본 흐름으로 여깁니다.
애초에 우리의 인지구조, 사고구조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날개를 퍼덕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부리를 조아리고, 발톱을 세웁니다.
가는 곳은 어렴풋한데 떠난 곳은 곧바로 있습니다.
2004년에 나온 재난영화 <The Day After Tomorrow>에서는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추위가 닥칩니다.
도서관에 고립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책을 땔감으로 써야 할 상황에 처합니다.
그들은 어떤 책부터 태워야 할지 고민에 빠집니다.
중이 불상을 태우는 마당에
얼어 죽을 상황에 닥친 사람들의
땔감 우선순위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우리는 일상을 그렇게 삽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나갈 다리가
무너진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해탈비해탈, 해탈이 해탈이 아니니
열반기고향, 열반이 어찌 고향이리
취모광삭삭, 취모검의 칼날이 번뜩이니
구설범봉망, 입 벌리면 그대로 목이 잘리네.
서산대사의 제자였던 소요 태능 스님은 농담이 참 심합니다.
해탈과 열반은 입을 벌리기 전에 목을 자릅니다.
목을 잘려 본 사람은
목을 잘리고도 보고 듣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 일을 전할 입과 혀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두를 드는 일은 목을 내놓는 일입니다.
비록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목이 잘린 후에는 입을 벙긋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각오가 아니라면 화두를 들 이유가 없습니다.
불상을 태워 사리를 얻는 것이 쉽습니다.
더군다나 종잇장에 적힌 이야기들 중에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마련하는 일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화두를 들 일일까요?
입구가 좁은 병 속의 새를 꺼내는 것은
나중에 태울 책을 고르는 것과 뭐가 어떻게 다를까요?
“무엇이 스승이 필요 없는 지혜입니까?”
“나는 그대를 가르친 적이 없다.”
은산철벽이란
은으로 만든 산, 철로 만든 벽입니다.
바람도 통하지 않고, 위로 날 수도, 땅 밑을 팔 수도 없습니다.
모름지기 화두는 틈새가 없어야 합니다.
화두가 생각의 빈틈을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빈틈없는 화두란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깰 수 없는 것은 화두가 아닙니다.
뚫지 못할 것도 화두가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깨지 못하고 뚫리지 않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잣나무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다”
“언제 성불합니까?”
“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라.”
“허공은 언제 땅에 떨어집니까?”
“잣나무가 성불할 때까지 기다려라.”
화두가 마음 밖에 있으면 깨지도 뚫지도 못합니다.
화두를 마음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태워버리면
홍로일점설, 붉은 화로에 떨어지는 눈꽃 한 송이가 됩니다.
그래서 마음먹기 나름이라 합니다.
힘을 쓰는 일이 아닙니다.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대로 본받아라.”
“어디를 말씀입니까?”
“남의 자리를 차지하지 말라.”
선 공부의 요령은
요령 없음을 최고로 칩니다.
이것은 분명 비유이지만
스스로 진짜라 느낄 정도로 들이대고 두들겨 맞으며
절벽 위에서 내지르고 불태우면
그 춤사위가 품새로 잡힐 때 허물 하나가 벗겨집니다.
“큰 선지식도 지옥에 들어갑니까?”
“내가 맨 먼저 들어가지”
“큰 선지식인데 어째서 지옥에 들어갑니까?”
“내가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너를 만날 수 있겠는가?”
깨달은 이가 어찌 지옥에 들어가느냐고 묻자
조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화두는 자기라는 지옥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야
진짜 화두가 됩니다.
“눈 밝은 사람은 모든 것을 본다는데 빛깔도 봅니까?”
“후려쳐버려라.”
“어떻게 후려칠 수 있습니까?”
“힘을 쓰지 말라.”
“힘 쓰지 않고 어떻게 후려칠 수 있습니까?”
“힘을 썼다 하면 어긋나 버린다.”
“불을 질러라.
불꽃이 어떤 힘을 쓰고, 무슨 용을 쓰며 타오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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