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불교, 힌두교의 아류인가? 위빠사나 '알아차림'의 실체!

Buddhastudy 2021. 11. 19. 18:38

 

 

 

 

불교에는 생각을 관찰해 분별에서 자유로워지는

위빠사나 수행이 있습니다.

 

생각과 분리되다 보면

그것이 일어나는 자리에

텅 빈 알아차림이 있게 됩니다.

그것이 참된 자아인 참나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참나 역시 실체가 공하여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나, 순수의식, 알아차림 같은 것들은

또 다른 형태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3차원의 생각을 걷어내고 남게 되는

4차원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영성이 회복되어

고차원 인간으로 거듭나는 건 사실입니다.

 

 

4차원의 생각이 활동하니

반야가 풍부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만물이 하나라는 생각이 들고

더 나아가 일체무애한 해탈경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높은 자각 현상이 일어나니

깨달음이라고 봄 직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싯다르타가 이룬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냥 관념이 만든 허상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3차원 생각이 만든

번뇌망상을 거둬낸 자리에

4차원 생각이 만든

진아와 반야와 절대와 해탈의 꿈이

정교하게 그려진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그럴싸한지

속지 않고는 배기지 못합니다.

 

싯다르타가 나오기 전에 기라성 같은 영적 스승들이

전부 이런 경지에 올라

깨달음을 노래하지 않았던가요?

 

그들 스승들은 더 이상의 경지가 없다고 확신했었습니다.

그런데 4차원 생각이 만든 깨달음의 꿈에

속지 않는 단 한 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싯다르타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째 스승인 라마푸타로부터

해탈의 법을 전수 받고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곤 4차원이 만든 깨달음의 허상을 그대로 관통해

5차원 실존에 이르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이것을 인류가 태동한 이래

싯다르타가 처음으로 이루었고

그래서 불교는 한없이 거룩하고 위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싯다르타가 단숨에 차원의 벽을 뚫고

대각을 이룬 방법이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그가 일찍이 실패하여 쓴맛을 봤던

힌두교의 수행법들만 하늘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삼매로 무아를 이루고

위빠사나로 참나를 찾고

참선으로 자성을 회복하고

불이의 반야로 절대에 이르고

무주와 무애로 해탈에 이르는 법들은

모두 세존이 살아 계실 적에도 있던

힌두교의 수행법들입니다.

 

물론 대승불교가 출범하면서

여래선, 염불선, 묵조선, 조사선, 간화선 등으로

수행법이 다양해졌습니다.

 

특히 조사선과 간화선은

힌두교에 없던 수행법으로

오늘날 한국 불교의 상징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공효면에서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는 현실입니다.

 

 

아무튼 힌두교의 한계를 무너뜨리며 불교가 출범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예외는 있지만

불교의 상당 부분이 힌두교의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불교가 태동한 인도에서는

불교를 힌두교의 한 지파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불교 교리의 대간을 이루는

고해론, 인과론, 업장론, 윤회론 같은 것들이

모두 힌두교에서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 아니던가요?

 

물론 불교에서는 전변설, 적취설, 육사외도 등을 내세워

힌두교를 비판하지만

그건 광범위한 힌두 사상의 일부일 뿐입니다.

 

 

상황이 이러자

불교는 힌두교보다 우수한 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꺼내 든 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불교는 중도의 가치를 들어

힌두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더 높은 무상정등각의 경지를

청사진으로 내겁니다.

 

그래서 불교를 알려면

반드시 중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중도란 무엇일까요?

 

중도는 확실히 힌두교 수행보다

더 높은 차원의 깨달음을 구현하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