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열반과 해탈, 불성은 깨달음이 아니다! 관념의 가상공간에 갇힌 수행자들

Buddhastudy 2021. 11. 18. 18:59

 

 

 

당신이 깨달음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정녕 무엇인가요?

 

욕망의 뿌리를 끊어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얻으면

깨달음인가요?

 

의 모든 것을 소멸하여 무아의 멸진처에 이르면

깨달음인가요?

 

화두를 풀어 지극한 반야를 성취하면

깨달음인가요?

 

생각이 일으키는 자리를 찾아 진아(불성)를 자각하면

깨달음인가?

 

삼라만상을 불이로 보게 됨으로써 절대성을 회복하면

깨달음인가요?

 

그 어떤 경지에도 머무름이 없어

일체무애한 해탈에 이르면

깨달음인가요?

 

 

대부분 위에 열거한 것을 깨달음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간혹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에 깨달았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싯다르타가 출세한 이후에 나온 모든 깨달음은

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요약하면

평화, 열반, 참나, 무아, 진아, 반야, 무주, 적멸, 절대, 해탈.. 등의

명제들입니다.

이것 외에 몇 가지를 더 붙일 수 있지만

대개 이런 것들을 이루면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일련의 깨달음에 대한 명제를

싯다르타로부터 전수 받은 것이 맞을까요?

 

싯다르타는 첫 번째 스승인 밧가와에게서 고행을 통한 무아를 배웠고

또한 생각을 관찰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바로 위빠사나입니다.

이 법을 통해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 즉 진아를 찾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싯다르타는 두 번째 스승인 알라라 칼라마에게서

불이의 법을 통해 절대로 승화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한동안 절대의 경지에 머물다가

이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싯다르타는 세 번째 스승인 라마투파로부터

자신이 이룬 경지마저 놓음으로써

무소주하고 무소유하고 일체무애한 해탈의 법을 배웠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이룬 경지에 만족하는 것 같았던 그는

어느 순간 이것 역시

깨달음이 아니라며 부정했습니다.

 

 

싯다르타의 수행 과정을 보면

뭇 수행자들이 오매불망하는

무아, 진아, 절대, 해탈.. 같은 것들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싯다르타의 제자를 자처하는 수행자들은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요?

 

 

2차원 평면 세계엔

오로지 평면만이 존재의 모든 것이라고 믿는 생물들이 삽니다.

다행히 그곳에도 수행자가 있습니다.

 

그들 수행자들의 목적은

해탈하여 더 높은 차원

, 3차원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차원에 대한 이론을 수만 개 만들어 달달 외우면 될까요?

아니면 피가 터지고 뼈가 깎여 나가는 수행을 거침없이 해 나가면 될까요?

 

그런 수고를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2차원 평면에 더욱 달라붙을 뿐입니다.

 

고차원으로 탈출하려면

무조건 높이를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고개를 바싹 쳐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개를 올릴 생각은 않고

종이에 달싹 붙여

무아니 진아니 절대니 해탈이니 옹알대고 있으면 어떨까요?

 

높이를 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종이에 눌어붙어 장좌불와하고 용왕매진하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수행자들의 모습이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싯다르타는 고개를 쳐드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속한 3차원의 속박을 끊고

4차원을 건너뛰어

5차원 실존에 이르는 법을 전재 준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태동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는 수행법은

기이하게도 3차원에서 분별의 꿈을 일으켜

그 꿈속에서 붓다가 되는 수행입니다.

 

물론 4차원의 경지에 올라

오도송을 읊는 도인들도 간간이 나와 주었지만

그건 불교에서 지향하는 궁극의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차원을 뛰어넘는 높이는 어떻게 세우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