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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고대 이집트 역사 9: 투탕카멘

Buddhastudy 2023. 5. 4. 18:58

 

 

 

고대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 시대.

아멘호테프 3세와 티이의 아들로 태어난 아멘호테프 4세는

기원전 1350년부터 재위를 시작합니다.

 

출생명 아멘호테프는 아몬신이 만족한다라는 뜻을 지녔지만

그는 재위 5년에 이크나톤으로 개명을 하게 되죠.

이크나톤은 아톤의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당시까지 아몬신을 숭배하고 있었으며

신관들은 각종 전쟁에서 이겨온 파라오들의 공적을

모두 아몬신 덕이라 하며 전리품들을 다수 챙겼었죠.

 

점점 신관들의 세력이 왕권을 억제할 정도로 커지게 되자

이크나톤은 새로운 파라오로 집권하자마자

신관들의 힘을 꺽으며

아몬신과 함께 모든 신들의 숭배를 금했습니다.

 

그리고는 아톤신만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세계 최초의 일신교를 도입하면서

아톤신을 위한 새로운 수도 아케타톤을 건설했습니다.

 

이크나톤이 통치할 때의 이집트는

선대의 왕들이 넓은 영토를 차지한 상태로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렸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이크나톤은 부자 나라인 이집트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귀족들과 부자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평민들에게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급변하게 풍요로움과 편안한 환경을 맞이한 평민들은

게을러지기 시작하였으며

교육에 신경을 쓰고자 했는 왕의 명령도 귀찮아했죠.

 

평화로움에 젖어든 백성들의 나태함은

결국 이크나톤이 집권한지 10년 만에

국가의 경제, 사회적인 위기상황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크나톤의 이집트가 평화로움에 심취해 있을 때,

이집트의 외부적으로는 히타이트와 아시리아가 병력을 증가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이집트가 소유하고 있었던 드넓은 땅을 넘보기 시작했죠.

 

또한 이집트의 눈치를 보던 시리아나 팔레스티나도

더 이상 이집트를 따르지 않을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죠.

 

외국의 움직임 심상치 않자 귀족과 군의 권력자들은 목소리를 높여

왕에게 원정 진출을 주장하였지만

평화주의자였던 이크나톤은 전쟁은 원치 않았고

계속해서 아톤 신에게 빌어, 이집트의 번영을 기원하자고 했습니다.

 

부하들은 이크나톤이 긴박한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한다 생각하여

더 이상 파라오에게 기대를 하지 않았고, 배반을 일으키게 되죠.

 

이크나톤의 뒤를 이어

신하들은 이크나톤의 양자 투탕카멘을 즉위시켰으며

그와 동시에 아톤 신앙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크나톤의 죽음은 기존에 숭배했던

아몬 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주장하였으며

아몬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는 다시 테베로 수도를 옮겨야된다고 했죠.

 

아톤 신앙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이후 투탕카멘과 통치자 아이를 거쳐

람세스 시대에 가서는 이크나톤은 이단아로 취급받아

기록을 말살하기에 이릅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름을 지우게 되면

영혼까지 모두 없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크나톤의 묘로 추정되는 곳의 이름을 모두 지운 것은

이집트 왕조에서 이크나톤은 죽어서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죠.

 

이크나톤의 사후, 다음 파라오는 10살짜리 아들

투탕카톤이 자리를 이어받게 됩니다.

선대인 이크나톤의 정책에 반대했던 신하들은

부왕이 아몬 신의 노여움을 사 질병으로 죽었다 하여

아톤의 살아있는 신상이라는 의미가 담긴

이름 투탕카톤을 개명하게 됩니다.

 

투탕카톤은 재위 2년 만에 아몬 신이 살아 있다는 의미의

투탕카멘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죠.

 

 

 

투탕카멘이 재위했던 시기로는 기원전 1360년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는 동양에서는 진시황이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했던 시기보다도

1천년의 전의 일이었죠.

 

이케나톤은 여러 명의 부인 중에서 아들 투탕카멘을 가졌으며

정식왕비인 네프리티티 사이에는 딸 안케세나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투탕카멘과 안케세나맨은 이복남매이면서 결혼을 하게 되었죠.

결과적으로 투탕카멘은 이케나톤의 아들이자 사위가 되었던 겁니다.

 

투탕카멘은 상당히 잘생긴 외모를 지녔다고 전해지며

파라오의 황금 마스크는 그 모습을 그대로 본따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의 치세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바가 없지만

10살의 나이로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니

실권은 대재상인 아이와 장군 호렘헤브가 모두 차지하게 되었죠.

 

투탕카멘은 파라오서의 존재감은 거의 없었으며

18세의 나이로 요절하게 됩니다.

8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에서는

역대 파라오 중, 가장 인지도가 떨어지는 파라오 중 하나였으며

이로 인해, 후대에 대부분의 군주가 도굴꾼에 의해 파헤쳐지고 털릴 때도

유명세가 없었던 투탕카멘의 미라는 그대로 유지되었죠.

 

투탕카멘이 죽고 나서, 아내인 안케세나멘은

재상인 아이가 왕좌를 노리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주변의 강국 히타이트로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아이는 네페르티티의 아버지로 고령의 노인이었으며

안케세나멘은 히타이트에 자신과 결혼할 젊은 왕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죠.

히타이트에서는 이때가 기회라는 식으로

이집트를 삼켜버릴 목적으로 왕자를 보냈는데

고령의 경험이 많았던 아이는 미리 간파하고

국경에서 히타이트 왕자를 암살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사이는 극도로 불편하게 됩니다.

결국, 아이는 투탕카멘의 미망인이었던 안케세나멘과 결혼하여

자신이 파라오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죠.

 

그의 젊은 시절은 누이 티예가 아멘호테프 3세의 왕비 중 한 사람이었고

딸인 네프레티티는 이크나톤의 왕비였기 때문에

이미 이집트 왕실과의 혼인 관계의 실력자였다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가족 관계를 따져보자면

아이의 딸이 네페르티티였고

네페르티티의 딸이 안케세나멘이었으니

아이는 자신의 외손녀와 결혼했던 거죠.

 

평생을 염원했던 파라오 자리에 앉았던 아이는

재위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습니다.

왕위에 올랐을 때는 워낙에 노령인데다가

강건했던 아몬 신을 모시기에는

다른 이들의 충성심을 받들기에는 군사적 경험마저 부족했죠.

 

노쇠한 아이의 통치는 4년 만에 끝이 나고 뒤를 이은 파라오는

정식 왕조의 후계자가 아닌 호렘헤브라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평민 출신으로 군대에서 이집트의 국경을 지켰으며

나중에는 장군까지 승진하는 실력자였죠.

 

호렘헤브는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명성을 쌓아 올리며

군사령관이 되어서는 이크나톤, 투탕카멘, 아이의 치세를 겪으며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혼란을 수습하고 정국을 평화롭게 이끌어가긴 했지만

실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보는 역사가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당시 백성들은 외부에서 다른 국가들의 힘이 강성해지자

불안해진 이집트인들은 평화로움을 추구하던 이크나톤이나

너무 나이가 어렸던 투탕카멘, 노쇠했던 아이보다는

평생을 이집트의 방위에 힘을 쏟은 군사령관 호렘헤브를 선호했습니다.

 

호렘헤브는 신왕조 이집트의 질서를 확립한

아몬 신관단의 지지를 받았고

이전 아톤 신앙과 관계가 깊었던 왕들에 대해서는

그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톤 신을 숭배했던 파라오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유적, 유물들의 기록을 말살하였죠.

 

호렘헤브는 기원전 1319년에 파라오의 자리에 올라

30년 가까이 안정적인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호렘헤브는 후대 왕조에서 존경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로는 자신의 후계자 파라오로 아들에게 물려주는 세습형태가 아닌

이집트를 통치하기에 좀 더 적합한 인물을 고민하여

람세스에게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이었죠.

 

 

오랫동안 신왕조를 이끌었던 제18왕조는

호렘헤브를 끝으로, 람세스 1세가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새로운 시대인 제 19왕조를 열게 됩니다.

 

람세스 1세는 델타의 사령관으로 있다가

호렘헤브 왕의 신임을 얻어 후계자로 지목을 받게 되었죠.

하지만, 그는 재위 3년 만에 죽고

아들 세티 1세가 뒤를 잇게 됩니다.

 

세티 1세는 제18왕조 말기에 잃었던 이집트의 대외적인 권위를 회복하는데 힘쓰는데

그의 군사 활동은 얼마간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세티 1세의 군사 활동은

아들 람세스 2세가 치루었던 대외 활동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상당히 작은 편이었죠.

 

세티1세의 아들 람세스2세는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로

이집트에 관한 소설이나

대중문화 등에서 가장 잘 알려진 파라오라 할 수 있죠.

 

20대 중반에 왕위를 물려받아 60년 이상 이집트를 통치했는데

강력한 왕으로도, 장수한 왕으로도 유명하여

이집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19왕조 2대왕 세티 1세의 원정으로 인해

이집트는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일대에서 영향력을 회복하였지만

아톤 신이 추앙받던 이전 시절인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 시절에 비교하면

그리 안정적인 영향력을 지니진 못했습니다.

 

북쪽에서는 히타이트가 점점 세력이 커지며 여전히 이집트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해상에서는 다크호스라 할 수 있는 바다민족이 출몰하여

이후에 이집트를 비롯하여 히타이트와 여러 지방에 큰 피해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람세스 2세는 자신의 첫 번째 목표로

해안선에서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는 바다 민족에 대한 토벌로 잡았고

그간 골치 아팠던 문제에 대해,

총제적인 공격작전과 계획을 구상하여

단 한 차례의 기습작전으로 이집트 내 바다민족을 소탕했습니다.

 

람세스 2세는 전투력이 뛰어난 파라오로 알려지고 있었는데

지상과 해상 지형에 관한 정보력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걸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바다민족을 소탕한 람세스 2세는 금새 북벌 준비를 착수하고,

지금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인

비브로스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람세스 2세의 활동에 맞서는 듯이, 히타이트의 활동영역도 넓어지는데

이크나톤과 투탕가멘이 파라오였을 때

히타이트의 세력확장으로 인해

이집트의 동맹국이었던 미타니 왕국이 사라지게 됩니다.

 

람세스 2세는 북쪽으로 확장하고, 히타이트는 남쪽으로 확장을 하니

두 나라는 카데시에서 격돌하게 되었고

이때 당시의 군사력은 양쪽 모두 최고의 정점에 달한 상태였죠.

 

람세스 2세의 군대는 자국민뿐만 아니라 싸움에 능통한 누비아인과

그간 점령해온 리비아, 가나안 출신들의 용병들

그리고 비브로스에 있던 아무르 족까지 통솔하여

카데시의 평원을 노렸습니다.

 

강력한 람세스 2세의 군대와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히타이트가 맞붙게 될 카데시 전투

다음 시간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고대 이집트 역사 9번째 시간으로

아톤 신을 숭배했던 이크나톤의 사후

투탕카멘이 파라오로 올랐으나 8년 만에 병으로 죽고

대재상 아이와 장군출신의 호렘헤브

이집트의 통치를 맡았던 이야기로 시작해보았습니다.

 

투탕카멘은 존재감이 없었던 왕으로

살아있을 적에는 금세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후대에는

이집트 내의 도굴꾼들에게 인기가 없어

투탕카멘의 미라는 고스란히 남게 되었죠.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한 사람은 1920년대의 영국의 하워드 카터와

그의 재정 후원자로

이집트 문명의 다수의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이미 도굴된 무덤들 뿐이라 큰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카터는 인근 무덤에서 투탕카멘의 유물 조각을 찾아내었고

다른 고고학자들이 모두 포기했지만

마지막 발굴의 시도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찾게 되었습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투탕카멘의 미라를 비롯해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이후 전 세계에 이집트의 미라를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18왕조는 후반대에 투탕카멘을 거쳐

아이 통치관이 잠시 맡으며 막을 내리게 되었고

호렘헤브는 이집트를 되살리고자 자신의 아들이 아닌

능력 있는 부하였던 람세스1세에게 통치권을 내줌으로서

19왕조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강대국이라는 타이틀에서 잠시 주춤했던 이집트는

19왕조 3대왕인 람세스 2세에 접어들어서는

다시 강성한 나라로 회복하게 되는데요.

 

세력을 키워오던 히타이트와 기원전 1274.

카데시 평원에서 맞부딪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