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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고대 이집트 역사 10: 람세스 2세

Buddhastudy 2023. 5. 10. 19:50

 

 

 

 

고전 영화 매니아분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는

고전 헐리웃 영화의 거장. 세실B데빌은

2차 세계대전 이전이었던 1933년에

영화 클레오파트라로 미국 스펙터클 제작감독으로써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0년대 후반과 1950년에 들어서는

삼손과 데릴라’, ‘지상 최대의 쇼로 대형 영화를 선보였는데

1956년에는 당시 인기절정의 모델출신 배우,

벤허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찰톤 헤스톤을 내세워

영화 십계를 제작하기도 했죠.

 

하지만, 십계의 주인공 모세를 견제하던 또 다른 명배우가 등장했는데

바로 같은 해에 영화 왕과 나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던

율 브리너가 람세스 2세를 맡아 연기했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모세를 시기하고 괴롭히는 역할로

그의 눈빛이 스크린을 압도한 작품이기도 했죠.

율브리너는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의 미국 배우였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예전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가서,

율브리너 생가 기념상 앞에서 사진을 찍은 적도 있습니다.

 

이번 영상은 대중문화에서 익히 잘 알려진

람세스 2세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그는 신왕국 시대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로

이집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영화, 애니메이션, 소설 등 많은 작품에서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강한 이미지였던 만큼 그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도 있으나

반대로 악역의 역할을 맡기도 했으니

동양으로 치면 난세의 간웅, 조조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고대 이집트 파라오라고 하면 언뜻 떠오르는 인물들은

투탕카멘과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람세스 2세라 할 수 있는데

이 유명한 세 인물 중에서는

람세스 2세가 가장 긴 기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습니다.

 

투탕카멘은 짧은 재위 기간으로 유명하고

클레오파트라는 결국 로마제국에게 나라를 빼앗겼으며

람세스 2세는 신왕국 시대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었죠.

 

람세스 2세는 14세 때, 왕세자로서 정치를 경험하고 있었는데

10년 뒤 왕위를 이어받고는 60년 이상 이집트를 통치했습니다.

 

참고로 투탕카멘은 제18왕조에 후반기 파라오였으며

이후, 정통 왕위 계승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람세스 1세 때부터 제19왕조가 시작되었는데

19왕조 전체의 존속기간은 110년 정도였습니다.

 

그중 람세스 2세가 60년 이상을 재위했으니

19왕조의 절반 이상은 람세스 2세가 자리를 차지했던 거죠.

왕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했던 만큼 기록물을 남겨둘 시간도 많아서

그는 이집트 구석구석에 자신의 기념물을 건설하여

심지어는 건축왕 파라오라는 별명이 있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신전 입구에

22미터 높이의 4개의 거대한 좌상이 있는 아부심벨 신전인데요.

람세스 2세가 의자에 앉아서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모습을 하고 있고

발밑에는 왕비와 왕자들의 작은 입상들이 놓여 있습니다.

 

신전 내부에는 이집트 신들의 조각상과

람세스 2세의 상이 함께 배치되어 있으며

신전 벽면에는 그의 치세를 찬양하는 헌사와

히타이트 제국과 벌인 카데시 전투 기록에 대한 부조들이 있죠.

 

아부심벨 신전은 기원전 13세기 때, 람세스 2세가 건설한

세계 최대 규모의 석굴사원이지만

이 거대한 사원도 수몰 위기로 사라질 뻔한 적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인 1959년 이집트 정부는

나일강 나세르 호수에 아스완 댐을 건설해서 강의 범람을 막고

원활한 에너지 공급을 해야 한다고 계획을 세웠지만

아스완 댐을 건설하게 되면

아부심벨 신전이 호수 속에 수몰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죠.

이에 유네스코는 문화재의 수몰을 막고자 1964년부터 8년간

전 세계로부터 문화재를 구하고자 하는 자금을 모았고

70년대 물가로 360만 달러, 원화로 약 450억 원을 모았으며

이렇게 모아진 자금은 아부심벨 신전을

원래 위치보다 60미터 더 높은 곳으로 이전하는데 사용되었죠.

 

 

 

람세스 2세의 석상은 아부심벨 신전뿐 아니라

크고 작은 상들이 이집트 곳곳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는 심지어는 예전 왕들의 상을 고쳐 자신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기도 했습니다.

 

이집트가 고왕국 시절에 피라미드를 내세워 이집트를 자랑했다면

신왕국 시절에는 람세스 2세가 피라미드 기념물을 세울 수는 없었으니

전국 곳곳에 자신의 조형물을 남겨놓은 셈이었죠.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행보를 두고서

역사학자들은 람세스 2세가 심리적인 콤플렉스가 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합니다.

이전 왕들과는 달리 람세스 2세는 금수저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군인의 집안에서 자라났는데

할아버지인 람세스 1세는 하층 계급부터 차곡차곡 올라가

신용을 얻어 파라오가 된 케이스였죠.

 

또한, 아버지 세티 1세는 당시 이집트인들이

미개하다고 여기는 아시아인의 핏줄이 섞여 있으니

19왕조의 출발을 알리던 람세스 1세와 세티 1세는

주변인들로부터 은근히 무시를 받기도 하였죠.

 

이러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람세스 2세는 어릴 적부터 자격지심을 지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신이 왕권에 있는 동안에는

남들이 무시하지 못할 자신의 거대한 기념물들을

이집트 전역에 뿌렸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람세스 2세는 전투적으로 뛰어난 파라오였다고 알려졌지만

그와 동시에 이전 18왕조에 기울어가던 이집트를

다시 풍요로운 경제적 번영을 누린 국가로 운영하기도 하여

그러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기념물 조성 산업에도 열을 올리는 등

상당히 여러 방면으로 적극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파라오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람세스 2세의 잘 알려진 활동으로는 내정보다 외정에 있었는데,

그는 이집트의 지배력을 아시아로 넓혀가려고 했으며

이 때문에 성경의 출애굽기에서 떡밥이 되기도 합니다.

 

출애굽기는 구약성서의 한 책으로

모세 5라고도 부르며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기록한 책이죠.

출애굽기에서 은 탈출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애굽은 이집트를 의미하니, 한 마디로 이집트 탈출기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집트 파라오의 이름을 제공되지 않고 있으며

그로 인해, 당시 이집트 파라오가 람세스 1세다, 혹은 2세다, 아님 아멘호테프 2세다 등으로 논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어쨌든 람세스 2세가 토목 사업을 벌이던 중에 히브리인들을 노역에 동원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들도 나오는 만큼

이집트에서 람세스의 상징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출애굽은 과연 실제 있었던 일인지

혹은 어느 파라오 때 벌어진 일인지 갑론을박이 있는데 반해

람세스 2세 본인이 남긴 기록에는

출애굽 사건 자체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것은 다른 파라오의 연대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이집트 파라오 입장에서는

자국민인 이집트인들이 아닌

그저, 히브리인 소수 집단의 움직임이라고 판단해서 기록을 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은 아예 생략해 버리는

이집트의 역사 기록 성향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죠.

 

만약, 람세스 2세가 히브리인을 일부로 추방을 했다면

이에 대해서는 분석하기로는

당시 이집트 국내에 있던 아시아 세력을 분류시키고

그들의 분쟁지역이었던 가나안 땅으로 옮겨가게 하고서는

가나안의 원주민들과 싸우게 함으로써

이민족의 전력을 약화시켰을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람세스 2세는 집권 후, 대외적으로 이집트의 세력을 넓혀가며

아시아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당시 이집트 해안을 약탈하고 유린하고 있던 바다민족을 토벌하고는

재위 5년째,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대대적인 아시아 원정을 준비하게 됩니다.

 

태양의 신 라, 아몬신, 세트 신 등의 이름을 딴 군단 병력은 2만 명 정도였으며

목표거점은 카데시로 두었죠.

카데시는 부왕인 세티 1세 때 정복한 지역이었지만

현재는 히타이트에게 충성을 맹세한 지역으로

다시 이집트의 사정권 내에 두려고 했습니다.

 

이에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 왕은

3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해 카데시에서 람세스 2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직 젊은 나이의 혈기 넘치던 람세스 2세는

대군을 이끌고 가나안과 시리아 남부를 지나, 한 달 만에 카데시로 접근했습니다.

카데시로 향하던 중 오론테스 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는데,

두 명의 히타이트 족으로 보이는 병사를 잡게 되었죠.

 

이집트군은 히타이트 병사에게 정보를 캐내고자

다른 히타이트 군은 지금 어딨냐고 협박을 하니

두 명이 답하기를

히타이트 군은 아직 카데시에 오려면 200km는 더 와야한다며

대군은 도달하지 못했다고 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무와탈리스왕은 거짓 정보를 흘리기 위해

이 두 명을 첩자로 보냈던 것이었고

람세스는 이들이 말하는 거짓 정보를 곧이 곧대로 믿었죠.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좁은 여울을 찾아서, 서둘러 건너가야 했는데

이로 인해 선두였던 아몬 군단과

람세스가 이끄는 라 군단만이 먼저 강을 건너게 되었고

아직 다른 군대는 저 멀리 뒤에 있었습니다.

 

이때, 또 다른 히타이트 병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재빨리 잡아 심문해보았더니,

이번 병사가 말하기로는 사실은 히타이트 군은 코앞까지 와 있었다고 했죠.

 

당황한 람세스는 아차! 했지만, 이미 히타이트 군의 전차대는

군단과 아몬군단을 향해 돌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람세스의 부하들은 순식간에 나타난 히타이트군들을 마주하고서는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 바빴고

람세스의 부대의 전열은 손쉽게 우르르 무너졌습니다.

 

이에, 람세스는 오로지 혼자서 수많은 히타이트를 상대로

닥치는 대로 상대하며 반격했다고

이집트의 기록에는 적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히타이트 쪽의 기록과는 사뭇 차이가 나는 기록이었죠.

 

먼저, 람세스 본인의 기록을 참고하자면,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람세스의 말을 들었을 때는, 이런 표현이 떠오르기도 하죠.

일기는 일기장에..’ 흠흠..

 

그러면, 히타이트 쪽의 기록에 대해 풀어보자면

당시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스의 성격은

돌다리도 백번은 두들기고 건너는 성격의 소유자로

거짓 정보를 보내는 병사들로 정찰 작전까지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람세스에게 급습을 하는 와중에도 신중함을 유지하느라

소수의 전차대만을 갖고 급습을 하였었죠.

 

그렇게, 얼마간 공격을 행하던 도중

금세 이집트의 친위대가 나타나는 바람에 놀라서는 전군을 투입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자 이집트의 후속 부대인

프타 군단과 세트 군단까지 합류하는 바람에

히타이트군은 후퇴하였다고 합니다.

 

이집트군도 람세스를 구출한 뒤에는 다시 강을 건너 후퇴하였고

서로서로 오론테스 강을 사이에 두고 며칠간 대치하다가

너무 많은 군사들의 대규모 전투는 감당하기가 어려워

두 나라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세계 전쟁사에서 최초로 전말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된 카데시 전투라고 하는데요.

양 국가 모두 큰 손실 없이 전투는 끝나게 되었는데

결국엔,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각자 서로 자기들이 이겼다고 주장하였죠.

 

카데시 전투 이후에는 히타이트의 기세가 더욱 강해져서

이집트 지배하에 있던 아시아 도시들이 점점 히타이트에게 붙었지만

람세스는 그러한 정세에 밀리지 않고

되려, 히타이트를 향한 원정공격을 계속 시행했습니다.

 

히타이트는 이에 이집트를 매우 성가시게 여겼으며

국내 문제로는 여러 가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었죠.

예를 들면, 무와탈리스가 아들 무르실리스를 왕족의 자격이 없다고 내쫓자

무르실리스는 이집트에 망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북쪽에서는 강력한 군대를 이끄는 아시리아가 성장하고 있었으며

이에 위협을 느낀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공통의 적인 아시리아에 대비하기 위해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죠.

 

이 평화조약에는 동맹국으로서 한쪽이 누군가에게 침략을 당하게 될 때

원병을 보내 도와주기로 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요

조약을 체결하는 근거로 히타이트 공주는 람세스에게 시집가기도 했으며

이후 40년 동안 두 나라는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집트는 북쪽으로는 히타이트와 평화상태를 유지했지만

남쪽과 동쪽으로는 누비아와 리비아를 공격하는 등

정복 활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람세스 2세의 활동은 국가적인 차원에서만 활발했을 뿐 아니라

가족을 꾸려가는 데도 많은 활동을 보였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세종대왕이 22명의 자녀를 두어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가졌기로 유명한데

람세스 2세는 아내들만으로도 수십 명이었으며

자녀는 적게는 80, 많게는 400명까지 추정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고대 이집트 역사 10번째 시간으로

람세스 2세와 카데시 전투에 대해 다루어 보았는데요.

기원전 13세기경 제19왕조 3대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지금으로부터 3300년 전의 인물로

오랫동안 장수하며 통치 수단으로서 많은 조각상을 만들며

파라오 마케팅에 열을 올린 통치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19왕조가 끝나고도 여러 파라오들이 람세스 2세의 업적을 숭배하여

그의 이름을 지켜가고자 람세스 11세까지 존재했으며,

후대에는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도 그에게 흥미를 가지게 되었죠.

 

그의 활약상은 겸손 같은 미덕은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현대 사회의 히어로물이나 인기 작품의 캐릭터처럼

고대 사회의 개성 있는 캐릭터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