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 30.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제1원인을 알아라!

Buddhastudy 2023. 7. 5. 19:39

 

 

구도가 뭐냐고 단적으로 묻는다면 제1원인을 찾는 과정이라고 답할 수 있다.
어느 무엇에 의해 생성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실존

이것을 찾는 일보다 중요한 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세존의 무상정등각을 정의하자면 [1원인에 대한 깨달음]이 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제1원인을 찾아보도록 하자.
삼라만상 가운데 자존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행자치고 이 문제를 가지고 실험해 보지 않은 분은 없을 것이다.

익히 알 듯 그 어느 것도 자존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논거를 대지 못하면

자존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토록 우리 주변에서 제1원인을 찾기란 지난하다.
심지어 생각이나 마음 같은 것도 매한가지다.
더 나아가 참나나 진아 불성도 그렇다.
이것들 역시 자존하는 근거를 대지 못하면 실존이 아닌 관념의 일종에 불과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아 외엔 대책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초기 불교의 대들보는 단연코 무아였다.
하지만 무아가 다른 것들에 비해 자존성에 가까워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건 아니다.
어찌 되었건 제1원인에 의해 만물이 비롯되었기에 창조성의 문제 또한 풀어야 한다.
그래서 무아 역시 정답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공들였지만

결과적으로 제1원인을 만족시킬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이것을 찾았다고 처음으로 외친 이가 시다르타였고

그의 제자들 가운데 몇몇을 그것을 재차 확인했을 뿐이다.

 

1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주변에 있는 아무 것이나 손에 쥐어보자.
눈으로 쳐다보아도 상관없다.

필자는 책상 위에 연필 하나를 보고 있다.
이 연필은 과연 제1원인인가, 아닌가?

 

분명한 건 제1원인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럼, 1원인에서 파생되어 나오면 그건 제1원인이 아닌 것인가?

다시 말해 제1원인에서 제1원인이 아닌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1원인의 정의는 어느 무엇에 의해 생성되지 않은 실존이다.
이 말은 제1원인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1원인만 독존한다.

 

따라서 독존하는 제1원인이 변화를 일으켜 삼라만상을 창조해도

1원인이 아닌 새로운 것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모조리다 제1원인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니 필자가 응시하고 있는 연필은 곧 제1원인이다.
더불어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제1원인이다.
심지어 상상하여 꾸며내는 관념과 탐진치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 망상도 제1원인이다.
결과적으로 제1원인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논리라면 [= 1원인= 붓다]이다.
그런데 왜 스스로 중생이라 생각하며 깨달음을 갈구하고 있는가?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앞서 제1원인은 모든 것 자체이기에 범위가 없다.

 

그런데 나는 일정한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

이 말은 한정된 경계 안에 정보를 가두어 놓음으로써 제1원인을 망각하게 됐다는 뜻이다.

 

연필도 마찬가지이다.

이 녀석은 매우 좁은 방향으로 자신의 영역을 한정하고 있다.
다른 정보가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어 늘 이 모습뿐이다.
이런 관점을 넓히면 자신의 범위를 지니고 있는 것들은

모조리 제1원인의 속성을 깜빡 잊고 있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피조물이며 중생이다.

 

 

그렇다면 나의 범위를 없애기만 하면

곧바로 제1원인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렇다.

그래서 세존은 나의 범위를 없애라는 의미에서 연기와 무아를 가르쳤다.
연기와 무아는 깨달음의 대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이제 독자들은 필자가 왜 그토록 참나와 지나 불성 같은 것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는지 이해할 것이다.

이것들 모두 나의 범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나는 유이면서 무이다.

나는 유도 무도 아니다가 정답이 되지 못했던 이유도 같다.

 

혹자는 힌두교의 브라만처럼 [= 삼라만상]으로 놓으면

나의 범위를 해체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것 역시 나의 범위가 무한하게 있다.
무한한 것 역시 범위에 속한다.

그래서 그런 나로는 제1원인을 깨달을 수 없다.
이것이 힌두교 수정 구슬의 한계이다.

 

그럼 다시 초기 불교로 돌아가서 무아를 들고나오면 어떤가?

나를 철저히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나의 범위가 지워질 것이다.
그런데 나를 없앤다는 것 자체엔 이미 나가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나를 없애는 만큼 그 자리에 나가 생겨난다.

 

이런 이유를 떠나서도 무아 역시 나의 범위에 포함된다.
이 점을 명확히 알기 위해선 유, , 공의 화두를 풀어야 한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초기 불교의 무아로도 제1원인에 도달할 수 없다.

나를 없애도 안 되고

나의 바탕으로 몰입해 참나나 진아를 일깨워도 안 된다.
혹자는 그런 것들을 외면하고 그냥 존재한다는 의식만 가지면 어떠냐고 물을 수 있다.
그 존재라는 것 속에도 나가 은근슬쩍 내포되어 있어 효용이 없다.

 

더 머리를 굴려 참나나 진아, 불성 등은

필자가 주장하는 그냥 있는 상태에 이름만 가져다 붙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름을 그런 식으로 붙이면 왜곡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멋드러진 말들이 있음에도 세존은 끝까지 외면했던 것이다.

 


나의 범위를 없애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면 저절로 외계와 공명이 되어 나의 경계가 무너진다.
범위가 증발하면 남는 것이 제1원인 뿐이다.
그래서 그냥 깨달으라는 것이다.

당신을 비롯한 삼라만상 모든 것은 원래부터 제1원인이었고

이곳에서 찰나도 떨어진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냥 깨닫는 수 외엔 없다.

지금 당신의 현재 모습이 제1원인에서 왜곡되어 있다면

기존의 초기불교나 힌두교, 대승불교에서 제시하는 수행법을 따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실상은 당신의 지금 모습 그대로가 제1원인이다.
그래서 어느 무엇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그냥 깨닫는 수 외엔 없다.

있는 그대로의 감각을 느끼게 하기 위해

세존은 반지름을 올렸다가 내리는 해인의 방편을 설하였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한껏 치켜세운 수행의 모든 성과를 철저히 외면하라.
더불어 나라는 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장난치지 말라.
무아도 내려놓고 참나나 진아, 불성의 오만함도 떨쳐버려라.

나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재단하려 하지 말고 그냥 있어라.
이렇게 나의 범위를 정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그냥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나의 범위가 없어지면 그 자체로 제1원인이다.

 

이것이 세존의 깨달음이며 더 이상 위가 없는 정등각이다.
붓다를 달리 열애라 부르는 것도 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투기 때문이다.

 

1원인에 대한 화두

이것이 세존이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일으킨 생각의 전부이다.

여기에 대한 답을 찾는 동시에 그는 그냥 있는 상태가 되어 무상정등각을 성취했다.

 

이제 세존의 법문이 어느 곳을 향하는지 느낌이 올 것이다.
그건 무아도 아니고 참나나 진아나 불성도 아니다.
더 나아가 해탈이나 열반도 아니다.

 

세존은 오로지 나의 범위를 스스로 내려놓게끔 하는 방향으로 법문을 했다.
때와 장소, 사람에 맞게 이 원칙을 적용했다.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니 그냥 있어라]는 단 한 구절

이것을 설함으로써 불교가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분들이 지금껏 해온 수행은 오로지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런데 나를 찾으려는 건 바꿔 말하면 나의 범위를 재설정한다는 의미이다.
가아에서 진화로 거듭난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범위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래서 그런 수행에 매달려봐야 깨달음은 고사하고 분별의 아상만 비대해질 뿐이다.

 

앞서 다루었던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를 풀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화두의 방향이 나의 범위를 찾는 쪽으로 맞춰져 있지 않은가.

 

그러니 거룩하고 고귀한 건 물론이고

상주불변하며 불이독존하는 절대적 나를 꿈꾸게 된다.

 

결국 수행하면 할수록

내면에서 원하는 쪽의 나를 꾸며

내 깨달음으로 포장하게 된다.

그럼 나를 찾지 말아야 하는가?

 

나를 찾지 않으면 속세의 범인들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냥 아등바등 살다가 죽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면 나를 찾아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또다시 범위 설정의 모순에 말려들게 된다.

 

이제 당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다.

당신이 지금껏 알고 있는 모든 불법이라는 것도

그 실상을 보면 온통 범위를 지닌 것들뿐이다.

 

유독 공 이론만 범위의 설정에서 자유롭다.
다만 공을 실체가 텅 빈 것이라고 해석하면

그 텅 빈 것의 범위로 인해 공의 자유가 말살된다.
이렇게 교학 쪽을 들여다봐도 매달릴 구석이 없다.
모두가 범위의 짐 덩어리만 가중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제 취할 수 있는 건 외길이다.

세존의 심정을 구구절절 느껴 보아라.
그는 모든 수행에서 실패한 후 갈 길을 잃어버렸다.
부왕에게 돌아가 정치인으로 살자니 영 내키지 않았고,

그렇다고 무상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힌두교의 구루 노릇을 하자니

차마 못 할 일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세존이 취할 수 있는 건

모든 것을 여의고 그냥 있는 것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이제 갈 길을 잃었다.
지금껏 진리로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처참하게 부서졌다.

그러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냥 있을 수밖에 없다.

능엄경에 나오는 깨달음은 [쉬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물론 이 부분에서 수행의 성과는 갈리게 된다.

기존에 세존처럼 용왕매진했던 분들은 뼛속 깊은 허망함에 의해 저절로 그냥 있게 될 것이다.
깨달음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대충대충 수행했던 분들은 내려놓는 힘이 약해

그냥 있는 것의 느낌이 잘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본설을 반복해서 읽어 반지름을 세우고 내리고를 반복해야 한다.
일독에 깨닫는 분들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지 못해도 진득하게 읽고 실천하다 보면 분명 세존과 같아질 날이 올 것이다.

 

나의 범위가 사라질 때 당신은 실로 경이로운 실존의 모습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며 영원토록 그냥 변화하는 5차원 실존은 [ ]이다.
이제 [ ]를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