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나는 누구인가 1.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세계

Buddhastudy 2023. 7. 6. 19:29

 

 

 

*나를 찾는 실마리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은 인류에게 이성이 쌓으면서 시작된 가장 오래되고 본질적인 화두임

-2500년 전에 시타르타를 의식해서 나를 찾았다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었지만 철학적 논거와 과학적 증명으로 객관화된 적은 없었음

-다행한 것은 그들로부터 나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 몇 개를 얻었다는 사실임

-마음이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에서만 홀로 존재한다는 얘기는 언뜻 봐도 비논리적이고 독선적이지 않을 수 없음

 

*과학의 한계

-과학은 0을 완성하기 위한 학문임

-과학은 우주의 에너지 총합이 0이 아니라 1이면 종교의 영역이 됨

*입자의 착각

-입자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한 적도 없음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파동뿐임

-파동이 일으킨 홀로그램에 에너지가 실리면서 입자와 물질로 착각하게 된 것임

 

*정보의 우주

-정보가 우주의  질료라는 사실에 대해 사고 실험을 진행하고자 함

-동양철학에서 에너지 파트를 맡고 있는 길을 잠시 짚어보고 본격적으로 현대 물리학과의 한판 승부를 벌이려 함

-승부 결과를 가지고 실존을 찾고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를 풀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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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가치 있는 일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이 되었든 나를 찾는 일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은 인류에게 이성이 쌓이면서 시작된 가장 오래되고 본질적인 화두이다. 돌이켜보면 2500년 전에 시타르타를 위시해서 나를 찾았다는 사람들이 간단히 있었지만

그것이 철학적 논거와 과학적 증명으로 객관화된 적은 없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그들로부터 나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 몇 개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일체유심조와 천상천하유아독존이 있다. 그런데 마음이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에 저만 홀로 존재한다는 얘기는

얼핏 봐도 비논리적이고 독선적이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이나 시의 영역이라면 모를까

논리적 사유를 요구하는 철학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소식 들었다는 각자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비슷한 얘기가 흘러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너무 수행에 몰두하다가 판단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고차원적 진실이 숨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베일에 싸인 깨달음의 비밀

그것을 객관적으로 밝혀 우리 모두가 나누어 가질 수는 없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개개인의 영적 진화는 물론이고

인류 평화와 공영에도 적잖은 보탬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큰일을 이루려면 일반 대중들이 납득할 만한 논리부터 갖추어야 한다. 우리의 이성은 보고 듣고 만져지는 것에 흠뻑 길들어져 있다. 뭔가 실체가 분명하면서 합리적이어야 수긍하고 따르게 된다는 얘기인데

그런 것으로 치자면 과학만 한 것이 없다.

 

과학, 바로 여기서 나에 관한 실마리를 찾아보면 어떨까?

과학이 진부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면 모르지만

오늘날의 과학은 우리의 3차원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제 철학적 견지에서 형의학이라고 폄하받던 과학은 옛말이고

어느덧 형이상의 영역까지 바싹 다가와 있다.

 

그렇기에 인류가 그토록 궁금했던 나는 누구인가의 답을 찾기 위해

과학적 사실을 한껏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가령 생명과학에서 말하는 거울뉴론은 인류라는 단 하나의 생명체에 대해 알려주고 양자역학의 이중슬릿실험에서는 관찰자인 나가 우주 전체일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해준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그냥 지나가는 얘기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현대 물리학의 발달로 인해 입자의 존재가 부정되고 파동과 에너지가 부각되었다. 그러자 양자역학자들 사이에서 의식도 과학의 일부라는 말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일체 유심조가 과학에 조금이나마 개입되고 있는 것이다.

 

3차원은 무와 유, 쉽게 말해 01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그래서 인류가 이룩해 온 모든 학문은 01의 대들보 위에 놓여 있다.

 

원래 학문은 철학 딱 하나였다.

철학은 0에서 1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밝히는 학문이다.이것이 풀어지면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 역시 해결된다.

 

그런데 아무리 궁금해도 이것에 대한 납득할 만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0을 부정하고 1에 자존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여기서 종교가 태동하였다.

 

종교가 번성해도 철학자들은 이래 자존을 거부했고

어떻게든 0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 이때 그 해법을 이성보다 직관과 심리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니

수행자들이다. 그리고 이를 밝혀 0으로의 연결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바로 과학자들이다.

 

이렇게 철학의 01의 문제 때문에

종교와 수행, 과학이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과학의 본래 목적은 0에 있다.

 

물론 오늘날 제1원인과 실존을 화두로 걸어놓고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거의 없다. 그렇더라도 과학이 철학에서 떨어져 나올 때는 이런 거창한 명분에 의해서였다.

 

1에서 0으로의 사명을 알든 모르든

과학자들은 본능적으로 0을 추구한다. 그래서 입자가 있으면 그것을 상소멸시킬 반입자가 있어야 하고

물질이 있으면 그것에 반대되는 반물질도 함께 해야 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과 에너지가 있으면

감춰져 있는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도 준비돼 있어야 한다.

시간과 공간도 대칭으로 맞물려 하나가 되어야 하며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합하면 질량이 0이 되어야 한다. 이때 극히 일부의 에너지라도 외계로 빠져나가면 안 되기에

열역학 제1법칙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주의 질서를 무너뜨려야 0에 가까워지기에

열역학 제2법칙도 따라오게 된다.

 

미시 세계 역시 모든 입자들이 대칭을 이루어 질량이 0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현대물리학의 상징과도 같은 표준 모형은

게이지 대층을 써서 우주의 질량 총합을 0으로 만든다. 그런 연후에 1이 나오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자발적 대칭성 깨짐을 도입하고

힉스 입자를 찾아 나서게 된다.

 

과학자들이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과학은 1을 풀어 0을 완성하기 위한 학문이다. 만일 우주의 에너지 총합이 0이 아니라 1이면 종교의 영역이 되고 만다. 그래서 빅뱅을 일으킨 특이점 역시 0이 되어야 한다.

 

만일 계산 결과 질량이 있는 것으로 나오면

특이점 이전으로 숙제를 미루어야 한다. 어떻하든 총합은 0이 되어야 하며, 이것이 과학이 태동한 본래 이유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시점에 다시 한 번 01을 떠올려보자.

돌 가운데 무엇이 먼저이고 진실인가?

1의 자존성을 인정하면 과학과 철학은 그 순간 학문으로서의 사망 선고가 내려진다. 1이 실존이면 종교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1의 자존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렇기에 구약의 출애굽기에는 나는 창조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고 자처하는 창조주신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던 철학과 과학은

어떻게 해서든 0에서 답을 구하려 했다.

 

그렇다면 철학은

0에서 1이 나오는 원리를 풀었는가?

완전히 실패했다.

물론 그것을 연구하다 파생된 방대한 철학 분야는

인류의 정신문명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다.

 

수행은 어떤가?

0에서 일을 만들면서 그 영 속에 자꾸 일을 넣고 있다.

뭔가 알 수 없는 고차원의 존재가 있고 그곳에서 일이 나온 것으로 예상한다.

 

즉 과학은 이를 연구해서 수많은 업적을 쌓았지만

여전히 0의 문제에 있어서는 오리무중이다.

 

도대체 실존은 0이냐? 아니면 일이냐?

1이면 종교가 되고 0이면 1을 창조할 수 있는 논거가 없고

이거야말로 진퇴양난의 사면초가이다.

수천 년 전 철학이 태동할 때에 비해 01은 조금도 변한 게 없이 제자리이다.

문명이 이토록 발전하였건만 왜 이 문제를 못 푸는가?

 

2차원 평면 세계에 나타난 사각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 높이가 도입되어야 한다.

높이를 떠올리지 못하면 영원히 사각뿔의 정체를 풀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01을 풀기 위한 우리만의 높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보이다.

 

여기서의 정보란

어떤 관념과 지식을 전달하는 일반적인 인포메이션과는 다르다.

이는 물질의 바탕이 되는 참된 질료로서의 정보를 말하는데

01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설고 기괴하게 다가올 것이다.

아마 적잖은 독자들이 이 부분에서 책을 덮을 수도 있겠다.

 

평면 세계에 높이가 없듯

우리 3차원 세계에도 질료로서의 정보는 눈에 띄지 않는다.

아니 관찰 정도를 넘어 상상으로도 그런 것은 떠올릴 수 없다.

그건 정보가 01의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01을 동시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0도 아니고 1도 아닌 제3의 존재 형태라는 것이다.

수학의 허수 i를 연상해도 좋다.

 

우리는 입자가 실제 하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해 우주의 모든 것은 당연히 1이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입자가 실제한다고 증명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실험실에서 나온 것은 입자의 성질을 띤 파동뿐이다.

그 파동에 질량이란 수치를 붙이고 무슨 입자라고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입자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한 적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파동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선과 면이 합해 입체가 됐듯

우리 세계의 물질 역시

존재하지 않는 입자들을 굴비처럼 엮어 마치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됐다.

 

파동이 일으킨 홀로그램에 에너지가 실리면서

입자와 물질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파동 그것의 본질은 정보에 있다.

정보에서 파동이 나오고

파동이 중첩되면서 입자성을 띠었다.

이 점을 밝히는 것이 본서의 일관된 주제이다.

 

필자는 이제부터

정보가 우주의 질료라는 사실에 대해 사고 실험을 진행하고자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01, 그리고 그것을 초월한 정보를 가지고

진실 게임을 펼칠 것이다.

 

그래서 첫 주제를 아리송한 기에서부터 출발한다.

동양철학에서 에너지 파트를 맡고 있는 길을 잠시 짚어보고

본격적으로 현대 물리학과의 한판 승부를 벌이려 한다.

물론 다툼의장은 4차원과의 접경지대인 소립자의 세계로 한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도출된 승부 결과를 가지고 실존을 찾고

아울러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를 풀고자 한다.

 

각성의 보편화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현대물리학의 도움을 받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본다.

 

이 책을 다 읽고

일체 유심조와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한 발 더 나아가 혹시 자신의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는 누구인가]에 첫 단추가 깨어졌다 할 것이다.

 

끝으로 본서가

각박한 삶 속에서 나의 목말라하는 현대인들에게

일말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