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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스파르타 역사 10분 완벽정리

Buddhastudy 2023. 10. 11. 19:55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 중 스파르타는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도시국가였습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지역을 통치하고

지배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기원전 431년부터 27년간 치루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33년 동안 그리스 남부에 대한 지배력도 강화하게 됩니다.

 

스파르타인들은 타 국가에 대한 불신이 큰 나머지

내정에 관한 기록을 만들진 않았습니다.

스파르타에 대한 역사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유일한 역사 기록은 아테네 출신이지만

스파르타의 용병으로 활동했던 크세노폰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집필한 투키디데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

그리고 그리스 로마 제정기의 시인 플루타르크의 글에만 등장합니다.

 

더군다나 이 네 사람의 공통 특징은

그 누구도 스파르타인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다른 그리스 폴리스와 확연히 달랐던

스파르타의 정치 체제를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이 영상에서는 짧은 내용이나마

스파르타에 대해 알려진 점들로 풀어보겠습니다.

 

 

스파르타는 초기에 남부 펠로폰네소스를 정복하여

확장된 스파르타 국가로 영토를 편입시켰습니다.

스파르타의 사회는 3개의 계급으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스파르타의 국유노예인 헤일로타이 혹은 헬로트.

반자유민인 페리오이코이,

그리고 엘리트 계급인 스파르티아테스 혹은 호모이오이가 있었습니다.

 

헬로트는 전쟁 포로들로 국유 노예가 되어

스파르타의 농업 경제에 뒷밤침하는 노동력을 제공하였습니다.

반자유민인 페리오이코이는

주변 거주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정복된 영토의 자유민들이었습니다.

 

페리오이코이들은 자신들의 기반시설, 행정 체제, 지역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스파르타에 공물을 바쳐야 했으며

군대를 확충하기 위한 병사를 제공해야 했습니다.

 

엘리트 계급인 호모이오이는 스파르타의 시민으로

유일하게 스파르타인이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스파르타 인구는 노동 계급에 비해

그 인구수가 훨씬 적었으며

헬로트 대 모든 스파르타 시민의 비율은

71 혹은 81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헬로트와 페리오이코이는 농업과 산업의 노동력이었으며

스파르타인들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유지하며

국가를 운영하는데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스파르타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스파르타 내에 질서를 유지하고

대규모 노예 인구에 대한 통제력이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엄격한 교육을 의미하는

스파르타 교육이 그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스파르타 교육 제도는 고대 그리스로 아고게라 하며

교육의 주목적은 애국심 향상과 강력한 군대 양성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는 스파르타 교육은

집안에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다섯명의 검사관들이 아이 검사를 하며 시작됩니다.

 

검사관들이 판단하는 최강의 스파르타인 기준에서는

신체에 장애가 있다거나, 체형이 작은 경우에

절벽에 떨어뜨려 아이의 생을 마감시켰습니다.

7살 때까지의 유아기 교육은 집안에서 이루어지는데

아버지에게 전투상식과 예절을 배운 뒤에는

꼬마시절에 집을 떠나 집단 생활교육을 받게 됩니다.

20년이 넘는 군복무생활이라 할 수 있는 스파르타 교육은

사치 근절을 기본 골자로 하고 있는데

이는 물질적인 사치뿐만 아니라

가정에서의 따뜻한 보살핌도 사치라 판단했습니다.

 

 

 

군대 같은 기숙사 생활에서는 24시간 중 10시간이 군사훈련으로

기초 근력 훈련과 검술, 창술, 레슬링 등의 훈련을 진행했고

잠은 하루 7시간, 식사시간은 하루 1시간이었습니다.

이론 수업에서는 읽고 쓰고 계산 수업위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강력한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깊은 사고방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인생이

인생 최고의 명예로 생각하게끔 교육되었죠.

 

어린 시절이 지나 청소년기가 될 무렵에는

학교이자 군대라 할 수 있는 기관에서는

이제 하루에 한 끼만 제공을 합니다.

나머지 두 끼는 본인이 알아서 구해야하는데

국유 노예인 헬로트가 사는 마을로 가서

약탈을 하며 식량을 뺏어야 했습니다.

특히, 식민지에서 데려온 노예들은 목숨을 앗아도 되는데

이는 정책상 힘 있는 노예는 일부러 없애길 권장하여

추후, 스파르타에 대한 반란의 씨를 없애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잔인한 교육을 감당하며 그리스 최강의

육군부대가 될 수 있었던 스파르타도 한 가지 약점이 있었습니다.

힘든 훈련을 극복한 극소수 엘리트들이 각개 전투에서는 강했지만

전쟁에서는 병사가 많은 쪽이 장기전에서 유리했기 때문에

막상 전쟁에서 숫자의 한계를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431년부터 시작된 그리스 세계의 내전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도 스파르타는 중반까지는

아테네에 이끌려 가는 형국을 보였으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리산드로스가

페르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으며

아테네를 격파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리산드로스는

에게해 전체에 걸쳐 바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는 아테네를 상대로는 민주정 대신에

‘30인 참주라는 과두제 정부를 만들었고

다른 폴리스들에게는 ‘Decarchy’ 라 불리는 10인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스파르타가 임명한 하모스트를 지도자로 남겨두는데

하모스트는 리산드로스에게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패전국인 아테네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의견이 양분되었습니다.

리산드로와 아기스 왕은 스파르타의 주요 동맹국이었던

코린토스, 테베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멸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 내의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온건파가 승리하면서

아테네는 살아남게 됩니다.

이에, 리산드로스는 아테네를 살려주는 대가로

이제까지 아테네가 자국에서 추방했던 자들을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건을 끼워 넣었습니다.

 

아테네로부터 추방되었던 자들은

다시 아테네로 귀환하게 되었는데

이는 아테네의 정치적 불안정을 도래했습니다.

 

리산드로스는 추방자 중에서

자신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로 구성하여

아테네의 새로운 정치체제인

30인 참주정 과두제를 수립하였습니다.

, 민주제가 없어진 아테네는 과두정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그 정점에는 리산드로스가 있었던 겁니다.

 

아테네의 30인 참주들 중에서

리산드로스의 입김이 닿은 쪽은

온건파 테라메네스라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와 대립하는 강경파 크리티아스가 있었는데

둘의 갈등 끝에 결국 테레메네스는

크리티아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크리티아스는 테레메네스 외에도 아테네 내부의

민주파 1,500명을 사형에 처하거나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공포정치를 시행합니다.

하지만, 이에 사람들은 불만이 커져 갔고

기원전 403. 민주파의 트라시불로스의 항쟁으로 인해

30인 참주정은 1년 만에 끝을 맺게 됩니다.

 

이를 지켜보던 리산드로스는

아테네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상황을 자신의 뜻대로 수습하려 했지만

결국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민주정을 인정하게 되었고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오래전 페르시아 전쟁 전후로

그리스를 지키기 위해 결성된 두 동맹.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있었습니다.

 

아테네가 있던 델로스 동맹은

처음에는 폴리스끼리 대등한 존재였는데

페르시아 전쟁 때의 아테네 활약 때문에

아테네가 우위를 점하게 된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처음부터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폴리스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킨 형태로 강압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폴리스들은

동맹회의 때 1표씩 행사할 수 있었지만

동맹회의를 소집할 수 있는 권리는 스파르타에게만 있었습니다.

 

또한, 투표를 통해 동맹회의 결정이 나더라도

이를 스파르타에게는 강제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오랜 세월동안

여러 폴리스들이 힘을 모아 스파르타를 도와주는 형태를 띄었고

이러한 여러 폴리스들의 힘은 아테네와의 전쟁에서도

스파르타가 이기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에게 승리를 거둔 후에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게 공을 인정해 주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되려 이제는 스파르타를 견제할 세력이 없다고 생각해

다른 동맹국들에게 더더욱 강자로서 군림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원전 402,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동맹 폴리스인 엘리스를 공격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뜻을 따르라고

다른 동맹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코린토스와 테베는 스파르타의 강압적인 태도에 지원요청을 거절합니다.

 

4년이 지난 기원전 398, 스파르타는

두 명의 왕이 존재하는 정치형태였는데

그중 한 명인 아게실라오스 2세가 페르시아와의 결별을 선언합니다.

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절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페르시아와 관계를 끊고

이오니아로 원정을 떠난 상황이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이오니아 원정을 떠나는데 있어

여러 폴리스들에게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라고 했는데

이때도 코린토스와 테베 그리고 아테네가

이를 거절하며 폴리스들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스파르타는 단독으로 페르시아를 공격하였고

프리기아 지방의 사트라프인 파르나바주스는 후퇴를 거듭하다

스파르타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스파르타에 반감을 가진 나라들은 바로

코린토스, 테베, 아테네, 그리고

이전부터 스파르타의 무력에 굴복하지 않았던

아르고스도 포함되었습니다.

 

기원전 395. 아테네는 코린토스, 테베와 동맹을 맺고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스파르타에게 대항하는

코린토스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 중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스파르타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스파르타는 타 국가에 대한 불신이 큰 나머지

내정에 관한 기록을 하지 않았으며

페르시아 전쟁,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다음 세계사 영상부터는 스파르타와 다른 폴리스들 간의 전쟁인

코린토스 전쟁에 대해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