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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코린토스 역사 2: 참주정 ~ 페르시아 전쟁

Buddhastudy 2023. 10. 19. 19:12

 

 

기원전 480. 스파르타 연합군은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을 막기 위해

테르모필레 지역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페르시아 군대를 막아섰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영화 300>이 흥행되면서

현대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헤로도토스는 당시의 페르시아군의 규모가

군인과 잡역부를 합쳐 470만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다수의 역사가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숫자로 여겨

10~ 50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00만이 되지 않는 숫자라 하더라도

스파르타군의 300명만이 수십만의 병력을 막아내긴 어려웠습니다.

이에 그리스 연합군의 구성은

300명의 스파르타 완전 시민

1000명의 스파르타 외부 자유민

3000명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시민

그 외 노예계급인 헤일로타이 등을 모두 합쳐

70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채널 내 재생목록 세계사에 있는

테르모필레 전투 영상을 참고하시면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으며

이번 영상은 이 때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일원이었던

코린토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코린토스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400 명의 동맹군을 보냈으며

이어진 플라타이아 전투 (Battle of Plataea)

특유의 코린토스 투구를 쓴

5,000명의 호플리테스 (hoplites-보병)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코린토스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

두 강대국 다음으로 세 번째 강한 국력을 갖고 있었던 폴리스였습니다.

다른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처럼 초기에는 왕족이 지배하였으나

바키아다이 (Bacchiadae) 가문 귀족이 권력을 빼앗아

100년간 코린토스를 통치했습니다.

 

그러다 BC 657년에 이르러

군대 사령관인 키프셀루스가 권력을 장악하며

독재를 의미하는 참주정을 30년간 시행하였고

대를 이어 2대 참주인 페리안드로스가

40년간 코린토스의 권력을 독점하였습니다.

 

페리안드로스는 40년간의 독재 기간 동안

시민들의 세금을 줄이고, 교역과 산업을 정리하며

코린토스를 최고의 폴리스로 키워나갔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의 권력을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회 유명 인사들을 제거하는 공포정치를 단행하였고

그의 의심은 점점 증폭되어

자신의 아내와 첩들까지 죽여 버리게 됩니다.

 

이를 지켜보던 페리안드로스의 아들 리코프론은

아버지를 외면하여 외할아버지가 통치하던 에피다우로스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모아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아직 17살에 불과했던 리코프론은

전쟁 경험이 많았던 아버지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페리안드로스는 리코프론의 반란군을

손쉽게 제압하고 장인을 포로로 두며

이참에 에피다우로스를 코린토스로 병합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연이어, 케르키라까지 정복한 후

케르키라의 총독 자리에 아들인 리코프론을 총독으로 임명시켰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아들이었지만

페리안드로스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리코프론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리코프론에게 자신이 죽고 나면

코린토스의 통치자 자리를 내주겠다는 말로

아들을 달래기 위해, 직접 케르키라로 찾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케르키라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땅을 침범했던 페리안드로스에 분노를 느끼며

반란을 일으켜 케르키라 총독인 리코프론을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이에 페리안드로스는 케르키라로 다시 쳐들어가 반란을 진압했고

케르키라의 귀족 자제 300명을 리디아로 추방시켰습니다.

리디아로 보낸 이유로는 귀족 자제들을 환관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으나

이들이 탄 배가 사모스섬에 도착했을 때

사모스 사람들이 케르키라인들을 불쌍히 여겨 풀어주었습니다.

 

 

 

페리안드로스의 독재가 길어질수록

적은 늘어났고 세력 또한 강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키프셀루스와는 달리

경호원들이 없이는 외출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40년간의 독재를 마치고 그가 죽었을 때

페리안드로스에게는 살아남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의 뒤를 이은 조카는

3년을 견디지 못하고 반대파 귀족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고

코린토스에서는 기나긴 세월의 참주정이 종식되었습니다.

 

키프셀루스가 바키아다이 가문으로부터 권력을 쟁취하여

30년간의 독재, 페리안드로스의 40, 그리고 후계자의 3

모두 70년 이상의 코린토스 참주정치는

다시 소수 귀족들의 과두정으로 되돌아갑니다.

 

기원전 582. 코린토스에서는 주요 가문들에 의해

이스트미아 경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가장 유명했던 4대 범그리스 제전경기가 있었는데

이는 올림피아, 피티아, 이스트미아, 네메아 대회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올림피아 제전경기는

기원전 776년부터 4년마다 7월 하순이나 8월에

제우스를 기념하는 대회였습니다.

이에 반해 코린토스의 이스트미아 제전경기는

포세이돈 신전에서 2년마다 봄 또는 이른 여름에 열렸으며

경기들에는 전차 경주, 판크라티온, 레슬링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무렵, 그리스 세계에서는 스파르타가 무력을 동원해

개별적으로 여러 도시국가와 군사 조약을 체결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에 B.C 550년 코린토스 또한

스파르타와 동맹을 체결하며 국력을 키워갔으며

지협의 교통과 교역을 기반으로 아테네, 테베와 경쟁하였습니다.

 

코린토스에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사원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수천 명의 헤타이라를 고용했는데

헤타이라는 당시 그리스 세계의 매춘업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매춘부들을 의미했습니다.

 

도시는 부유한 상인들과 도시를 빈번하게 드나들었던

고위 관료들에게 접대를 제공한

이러한 신전 매춘부들로 유명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헤타이라로 알려진 라이스(Lais)

자신과의 특별한 만남에 대해

막대한 비용을 청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코린토스의 호화로움은 그 유명세가 더해져

로마 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총애를 받은

풍자시인 호라티우스 (Horace)의 표현으로

모두가 코린토스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코린토스인들은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 이후

고전 건축의 세 번째 주요 양식인

코린트 양식(Corinthian order)을 개발했습니다.

코린트 양식은 세 개의 양식 중 가장 복잡한 양식으로

도시의 부와 화려한 생활방식을 보여줍니다.

참고로, 코린토스 양식 이전에 있었던

도리아식 양식에서는 스파르타인들의 엄격한 단순성을 보여주었으며

이오니아 양식에서는 아테네를 비롯해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에서 발달하여

섬세하고 우아하며 여성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원전 492년부터 페르시아는

세 차례에 걸쳐 그리스 세계를 침략하며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기간 동안 코린토스 지협에서 열린 회의에서

코린토스는 스파르타 아래 연합하는

헬레닉 동맹(Hellenic League)을 수립합니다.

 

코린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주요 참가국이었으며

테르모필레 (Thermopylae)를 방어하기 위해 400명의 군사를 보냈고

살라미스 해전을 위해 아데이만토스(Adeimantos) 휘하에

49대의 전함을 공급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플라타이아 전투 (Battle of Plataea)에는

코린토스 투구를 쓴 5,000명의 호플리테스 (hoplites-보병)를 보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으나

이후 그리스에서는 폴리스들끼리 세력 다툼을 일으킵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의 큰 활약으로 인해

이제 그리스에서의 패권은 아테네가 차지하였습니다.

 

그리스는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이에 반하는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긴장감이 흐르는 그리스 세계의 한 가운데

BC 435, 코린토스와 식민지 케르키라는

에피담노스(Epidamnus)를 둘러싸고 전쟁에 돌입합니다.

 

코린토스와 케르키라의 해전은 당시까지

그리스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최대 해전이었습니다.

해전은 코린토스의 승리로 끝이 날뻔했으나

케르키라는 최대 세력이었던 아테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이전부터 무역 경쟁으로 갈등을 빚고 있었던

코린토스와 아테네는 이를 계기로 상호 간에 원한을 쌓아가게 됩니다.

 

이 일을 계기로 기원전 431년부터 시작된

그리스 세계의 내전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제압하면서 끝을 맺게 됩니다.

 

코린토스는 이참에 아테네를 완전히 멸하자고 주장했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 이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테네를 살려두었습니다.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소속으로 전쟁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스파르타는 전쟁이 끝난 후,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에게

공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되려, 이제는 스파르타에게 대적할 세력이 없다고 여겨

다른 동맹국들에게 강자로서 군림하였습니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기원전 398,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동맹을 맺었던

페르시아와 결별을 선언하고 이오니아 원정을 떠납니다.

 

이 전투에 있어, 그리스 내 폴리스들에게

군사를 이끌고 참여하라고 했지만

코린토스와 테베 그리고 아테네는 이를 거절합니다.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여기에는 코린토스, 테베, 아테네, 아르고스가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395, 코린토스 외 연합군들은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스파르타에게 대항하는 코린토스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채널 내 재생목록 세계사.

지난 코린토스 역사 1편에 이어

코린토스 역사 두 번째 이야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고대 코린토스의 참주정 시절부터 다른 폴리스들과의 관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