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507회 엄마와 에스보드 아들

Buddhastudy 2013. 8. 23. 21:41

출처 YouTube

 

아이를 키워서 이 아이가 망나니가 돼서 사회에 여러 물의를 일으킨 경우도 있죠. 우리 애가 커서, 지금 청년이 젊은 애들을 성추행해가지고 사회 물의를 일으키거나, 사람을 죽여서 물의를 일으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뭐 공부는 잘해서 똑똑한데 부정부패를 해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거나 이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면 이런 거를 생각할 때 본인이, 우리 아이가 앞으로 그런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는데, 그런 사람이 되더라도 살아 있는 게 좋으나? 그런 사람이 될 바에야 죽는 게 낫겠다. 이 엄마가 결정을 해야 되요.

 

내 자식이라 하더라도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고, 세상에 많은 혼탁을 줄 바에야, 살 필요가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아니면 어떤 물의를 일으키더라도 그래도 살아있어야 된다. 이게 내 자식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느냐? 살아있어야 되요. 그러면 원하는 데로 해 주세요. 그러니까 스님이 여기서 결정 하라 그러잖아. 나 같으면, 이 아이가 자라서 세상에 온갖 물의를 일으킬 것이 예견되면, 오히려 죽는 게 낫겠다. 이렇게 딱 결심을 할 거 같애.

 

그러니까 극단적인 예 같지만, 딱 둘 중에 선택을 해야 된다니까. 세상에 아무 쓸모가 없고, 세상에 많은 불이익을 끼치고, 세상을 혼란하게 할 바에야, 내 자식이라 하더라도 없는 게 낫겠다. 이렇게 부모가 입장이 분명하면, 애를 인간이 가야 할 길로 가고. 그걸 거부해서 지가 죽어도 부모가 죽었다 해서 후회를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 잘 죽었다. 이렇게 장례를 치러주고 끝내버려야 되요. 그럴 지금 입장이 딱 되면, 이건 유서 아니라 어떤 협박에도 이길 수가 있지.

 

부모가 입장이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요. 엄마가 입장이 없기 때문에. 으흠. 그러니까 이런 엄마이기 때문에 이런 아이가 나온다 이 말이오. 어린아이들은 이거 정말 너를 위해서나 세상을 위해서나 이건 안 되는 거야라고 하면, 죽는다고 해도 안 되는 거야. 이렇게 가야 중심이 잡힐 거 아니오. 그러면 애들이 자기가 원하는 걸 어떤 수단을 써서 안 되면 훔치든지, 그것도 안 되면 죽겠다고 협박해서 얻어가는, 이렇게 키우면 어떻게 되겠어? 그러면 나중에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지.

 

지금 이 아이가 하는 이런 짓을 용납하면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는 아이가 될 거고, 이거를 개선하려면 죽는 것도 각오를 해야 만이 이걸 개선할 수 있다 이런 얘기요. 이 자리에서 딱 선택을 해요. 그러니까 애가 딱 죽는다 하더라도, ~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내 아이라도 자라면 세상에 여러 가지 불이익만 줄 거기 때문에, 그냥 이왕지 죽었으니까 잘 장례를 치러주면 되지, 애를 하나 더 낳아서 키우든지, 양자를 낳아서 키우면 되지, 그것 때문에 후회하고 울고불고 이럴 필요가 없다. 이게 딱 분명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으면, 지금 애를 고치려는 생각을 하지 마라 이 말이오. 이거는 마지막 대결이란 말이오. 내 죽는 거 갖고 둘 중에 선택하라, 칼을 뽑아댔다 이 말이오. 그러면 여기서 굴복을 하면 평생 애 하자는 데로 끌려가야지. . 중간은 없다. 이 말이오. “알겠습니다.” 하지 말고 지금 선택을 해요.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단호하게 한다는 거는 애가 유서대로 행동할 수 도 있다는 걸 전제로 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래도 아이를 위해서 차라리 그럴 바에야 죽는 게 낫다. 이게 진정으로 너를 위하는 길이다. 이 생은 죽고 다음 생에 그럼 한 번 해 봐라. 이렇게 마음이 되 있느냐? “그때 해줄걸.” 이렇게 죽고 난 뒤 후회가 되겠느냐, 이 말이오. 사로잡히니까 죽을 수가 있지. 엄마가 앞에서 얘기했지만,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선 자기를 버려야 돼. 자기를 자꾸 움켜쥐고 분별을 하면 안 돼. 자기를 확 죽여야 돼. 아이를 위해선 내가 죽음도 각오하는 그런 사람이 돼야 돼.

 

그런 헌신성이 있어야, 애가 잘못 될 때도, 야단을 쳐도, 털끝만큼도 내가 양심의 가책이 없어. 이건 정말 아이를 위해서 내가 야단을 치기 때문에. 이건 나를 위해서 하는 게 하니라, 너를 위해서 하는 거기 때문에. 매를 때리더라도. 그런데 지금 엄마가 자기중심이 없다, 이 말이오. 엄마가 얼마나 자기중심이 없으니 애가 대들지. 애라는 건 원래 지 맘대로 하기 위해서, 어릴 때는 밥 안 먹어. 이래 나오죠. 그럼 엄마가 애한테 지잖아요. 밥그릇 갖고 따라 다니잖아. 애가 굶고, 바짝 여의면 엄마가 못 이기지.

 

그래도 밥그릇 딱 뺏어버리고 그래 굶어라. 이래서 열흘이든 스무날이든 굶도록 놔두면 굶어 죽더라도, 열흘 굶으니까 엄마가 항복한다, 그러면 평생 어때요? 엄마가 애한테 굴복해야 될 거 아니오. 그죠? 그럴 때 밥그릇 딱 뺏어 버릴 수가 있느냐? 사춘기 때 집나간다. 이리 나오잖아. 그지? 집나간다 할 때, “그래, 나가라하고 문 걸어 잠가버리고, 어디로 가든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있어요? 찾으러 다녀야 되잖아. 그래. 그러니까 엄마가 자식을 이길 수가 업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은 교육을 못시키는 거요.

 

그것이 아이에게 옳지 않다면, 정말 이건 내 어떤 사로잡힘이 아니라, 이것이 정말 아이에게 옳지 않다면, 단호하게 안 된다, 라고 해야지. 그렇게 해서 죽는다 하더라도 흔들릴게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거기에 중간 타협점은 없다. 이런 얘기에요. 그런 걸 요행을 바라면 안 된다. 그거 선택이 기도지 딴 게 선택이 아니다. 그런 쓸데없는 그런 비겁한 중간의 그런 방법을 찾지 마라. 이 말이오.

 

그런데 엄마가 자식을 키우면 자식에게 도움이 된다면 내 몸이라도 버려서 하겠다. 이게 자식에게 나쁘다면 내 몸을 버려서라도 막겠다. 이런 헌신성과 희생정신이 있어야 된다, 이거야. 애가 아무리 울고불고 난리를 피워도 안 돼는 거는 안 돼는 거고. 돼는 거라면 내가 구걸을 해서라도 해 줘야 되는 거고. 이런 게 분명해야 되는데, 그냥 내 생각에, 안 된다 했다가, 된다 했다가. 안 된다 했다가, 된다 했다가. 이러니까 조그마한 애가 딱 통밥 굴려서 안 된다 해도 까짓것 밀어붙이면 된다. 애가 딱 잡히는 거 아니오.

 

한번 울어버리면 된다. 밥그릇 한번 던져버리면 된다. 유서 하나 쓰면 된다. 이게 딱 애가 알잖아. 벌써 이건 이미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이거야. 선택을. 그럼 그 선택에서 엄마가 어떤 선택을 할 땐 각오를 해야 되는 거요. 어떤 희생이 오더라도 이건 아니기 때문에 끝장 낼 각오를 해야 된다. 이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