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일묵스님_팔정도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4회 마음의 두 얼굴(전도몽상과 삼법인)(41:44)

Buddhastudy 2011. 10. 9. 20:48

  방송 보기: 불교TV

 

그러면 이거는 결코 행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데도, 우리가 행복이으로 생각하는 것. 그 밑바탕에는 뭐가 숨어 있냐하면 그런 감각적 욕망이라는 것이 행복이라고 보기 때문에 즐긴단 말이에요. 그죠? 그것이 만약에 괴로움이라고 생각하면 그걸 즐기겠어요? 그건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이 괴로움을 행복으로, 본질적으로 괴로움이라는 것을 행복이라고 이해하는, 이것도 전형적인 어리석음에 해당합니다.

 

또 이거하고 또 하나 더 감각적 욕망과 좀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우리가 보통 태어남이라는 것을 굉장히 행복으로 생각을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태어남으로부터 우리가 태어났기 때문에 노병사가 있잖아요. 사실은 태어남이라고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인데, 그것을 행복으로 추구를 하게 되면, 계속 그런 마음들이 커지게 되고, 그로인해서 우리가 윤회를 끊을 수가 없다. 윤회를 끊으려한다면 우리가 사는 삶이라는 것이 고라고 볼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괴로움으로. 그래서 이것도 괴로움을 행복으로 생각하는 하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게 전형적인 뭐가 있겠어요? 아상이라고 하는 것, 나라고 하는 애고의식. 내가 있다. 내가 잘나야 되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누려야 되고, 내가 이것을 해야 되고. 이런 것들이 기본적으로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죠. 나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있다고 스스로가 인정을 해버리면, 그때부터는 이것을 바꾸기가 어려운. 그 다음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은 이것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이런것들은 번뇌에 해당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일어나는 것들은 우리 삶의 도움이 되는게 아니라, 우리 삶을 계속 괴롭게 하는 요소로 흘러갈 수가 있잖아요. 그죠?

 

그래서 이 세 가지를 전형적인 전도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전도몽상이라고 불교를. 그래서 이것을 모르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이야기를 하고요. 그래서 이렇게 보는 것, 이것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현명하게 어떤 대상에 주의력을 주는 게 아니라, 어리석게 주의를 주는 거라는 거죠. 특히 이 에고의식이라 하는 이거는 굉장히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부분입니다. 항상 에고가 강한 사람일수록, 자아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옆에서 누가 한마디만 자극을 줘도, 그걸 못 참고 굉장히 힘들어 하고, 그거에 의해서 엄청난 화가 일어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내가 있다고 생각을 하면 항상 나와 남을 구분하고, 이 내가 잘되기를 바라고, 남이 야 죽던 말 던 나만 잘살면 된다. 이런 마음으로 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불교적으로 볼 때는 항상 연기적인 사고가 연기법을 항상 말씀하셨잖아요. 그죠? 항상 우리가 만나는 이런 관계들은 서로서로 연관을 주는 거지 독립된 존재라는 것은 없습니다. 서로서로가 항상 인연지어져 있다. 관련지어져 있기 때문에 남이 괴로운 것이 결국은 나한테 고통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나만 잘되면 된다고 산을 파해치면, 그것이 결국은 역으로 어떻게 돌아옵니까? 우리한테 피해로 돌아오잖아요. 그죠? 그것이 전혀 우리하고 무관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죠?

 

그런 것들을 잘 이해를 하면, 그런 것을 이해하려면 연기적인 사고가 필요한데, 연기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그런 자아의식이라는 나라는 이런 생각들이 버려져야 가능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내가 있다. 내가 잘나야 된다. 내가 더 많은 것을 누려야 된다. 그런 것도 그 밑뿌리를 보면은 이런 자아가 없는데 마치 내가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런 어리석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거죠. 그죠? 그래서 이거를, 이 세 가지를 불교에서 위빨라싸. 전도몽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전도몽상을 우리가 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냐? 이거죠. 보통 일반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전도몽상들이란 말이죠.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지 못했을 때는 이런 것이 전도된 생각들인지 조차도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런 전도몽상이 있다는 것을 이해를 했고, 그거를 알면, 일반 사람들은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을 해요. 그러면 그게 자기가 노력하는 만큼 얻는게 있겠어요? 자기가 동쪽으로 가길 원하면서 서쪽으로 가는거나 똑같습니다. 이거는 행복이 아닌 것을 쥐고 앉아서 계속 행복이라고 생각을 하고 추구를 하니까.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얻고, 완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됩니다. 첫 단추를 잘 끼고, 거기서 이런 어리석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현명하게 주의력이 기우려질 수있도록. 지혜롭게. 그런 지혜를 배워야 되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하기는 쉽지는 않지만, 그래서 부처님께서 사성제나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런 지혜를 배우면, 그 가르침에 따라 사유를 하는 훈련을, 인식의 전환을 자꾸 하다 보면 여러분들도 언젠가는 이런 지혜가 성장하면서 이런 어리석음을 벗어날 수가 있겠죠. 그죠?

 

지혜롭게 어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사유하는, 그런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성제를 이해를 하고, 그래서 이런 그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우리 삶의 고통을 준다는 것을 이해를 하고, 이런 어리석음이 바탕이 되면 우리 삶에 결코 행복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를 하고. 이런 사성제 맞게 사유를 하는 것, 이것이 필요한데요. 부처님께서 팔정도에서 정사유. 정견과 정사유가 있는데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이해를 정견이라 합니다. 진리에 맞는 그런 견해를 기르는 거고요.

 

정사유는 뭐냐하면 탐욕과 성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정사유입니다.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런 마음 없이 세상을 대한는 것이 바른 사유다. 이렇게 다거죠. 이건 좋고, 이건 나쁘고 이렇게 좋다 싫다 이런 감정이 개입되기 시작하면 그로 인해서 어리석음은 점점 깊어진다 이거죠. 그리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는 거에요. 우리가 진리를 알고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내 감정이나 편견 이런 걸 벌여야 되잖아요 그죠? 그래서 그런 걸 버리게 해주는, 일단 그것을 버려야 우리가 객관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거죠. 자기감정에 의지하지 않고.

 

그래서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지 않고 항상 어떤 균형잡힌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게 하는 그 요소로서 부처님께서 정념이라고 하는 사띠를 말씀을 하신 겁니다. 사띠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사띠나 지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설명을 드릴 텐데, 기본적으로 사띠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어나는 현상을 그냥 좋아하고 싫어나는 법 없이 그냥 그대로 말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시계라고 하는 것을 시계로만 아는거지, 시계에 대해서 좋다 싫다 이런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거죠.

 

처음에 우리가 그 대상을 인식한 거기서 끝나지, 거기에 대해 좋다 싫다 이런 마음으로 발전하지 않게,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만 자꾸 하다보면, 탐욕과 성냄이 개입되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가 대상을 만나는 훈련이 됩니다. 그렇게 해야 그 대상을 우리가 접하는 어떤 상황들을 객관화 시켜서 볼 수 있는 어떤 바탕이 된다는 거죠. 욕심이나 성냄이 개입하게 되면 상황을 왜곡해서 보기 쉽잖아요? 그죠?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좋은 면을 자꾸 보려고 하잖아요 그죠? 사랑을 하면 콩깍지가 낀다 그러죠. 콩깍지가 바로 뭐냐 하면 사람을 왜곡시키는겁니다. 안 예쁜 걸 예쁘게 보게 만드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의 그 객관적으로 보이는게 아니라, 좋은 쪽으로 자꾸 보게 만드는 거죠. 대게 싫어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모습을 갖고 있어도 싫은 거에요.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그러니까 그런 마음이 개입된 상태에서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기가 어렵다는 거죠. 그래서 수행의 메카니즘이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상태를 파악을 해 보니까, 아까 말한 그런 왜곡으로부터 시작해서, 탐욕과 성냄을 계속 일으키고 있더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이런 비유를 많이 드는데요. 이것(시계)이 사실은 뜨거운 것이에요. 사람들이 이것을 뜨겁다고 생각안하고 뭐로 생각할 수 있냐 하면, 이것이 안 뜨겁고 행복한 것으로 생각을 해요. 그래 이걸 이렇게 쥐고 있습니다. 행복하다 생각하니 이런 집착이 일어난단 말이죠. 이러니까 여러분들에게 뭐가 일어나겠어요? 고통이 일어납니다. 뜨거운 걸 쥐고 있으니까. 그런데 고통이 일어나는데, 이 고통의 원인을 모르니까, 여기다 약을 바르거나 물을 바르거나 이렇게 계속 치유를 하겠죠. 그죠?

 

그런데 이건 근원적인 치유가 안 됩니다. 이 고통의 근원이 이걸 쥐고 있기 때문에 그게 안되는데,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거을 알면 이것을 놓을 수가 있잖아요 그죠? 그러면 이것을 근원적으로 치유가 가능한 거죠.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형태도 꼭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집착하고 이렇게 하는 것들의 본질을 보면 사실은 그게 행복이 아닌 것을 쥐고 있단 말이에요. 괴로움인 것을 행복으로 잘못생각하고 잘못알고 쥐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 어리석음을 깨야 여러분들이 진짜로 어떤 전환이 일어나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야 됩니다.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서 이 어리석음을 부수어야 근원적으로 여러분들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런걸 보는 방해해요. 우리 마음을. 이것이 진짜 괴로움이라고 보기 위해서는 우리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해야 이걸 볼 수 있는데, 이 탐욕이나 성냄이 있는 상태에서 우리 마음이 산란스럽고 안정되지 않기 때문에 그 좋아하고 싫어나는데 감정이 끄달리지, 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단 말이에요. 첫 번째 부처님께서 지혜로서 반조를 하시고 일단은 사람들의 마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거에 끄달리지 않는 마음상태로 만들어야 되겠다. 그래야 지혜가 생길수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는 마음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제시한 수행 방법이 알아차림. 바로 사띠 수행입니다. 이게 바로 사념처수행이고, 이 정념, 그러니까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념. 정념이 바로 삼마사띠. 사띠라는 것이 마음챙김이다. 알아차림이다. 깨어있음, 정신차림. 뭐 이런 용어로 쓸 수 있는데요 어떤 대상을 만날 때 좋아하고 싫어함 없이 만나는 걸 이야기를 합니다. 그냥 그래도 알아차리는 거죠.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렇게 해서 그 사띠를 알아차림에 일어나는 데로 그냥 내 몸에서 뭐가 일어나는지,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마음을 일으키는지를 알아차리고.

 

또 몸에서 일어나는 것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다 보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런 것들이 아주 안정되고 고요한 상태에서 알게 되면, 그때 알게 되는 것들은 대부분 어떻게 되겠어요? 바른 정보가 되겠죠? 바른 지식이 되고 바른 정보가 된단 말이에요. 그죠? 그런 지식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지혜가 생긴다는 거죠. 그래서 일단은 알아차림을 개발할 수 있도록 부처님께서 사념처 수행, 알아차림을 개발하는 수행, 이게 첫 번째 위빠사나 수행에서 알아차림을 바탕으로 해서 위빠사나수행은 결국은 지혜를 개발하는 수행입니다.

 

이 알아차림이 바탕이 되면 여러분들 마음이 고요해지고, 안정되고 평온해 집니다. 그러면 그런 상태에서 깊이 있게 이런 현상을 관찰하고 조사를 할 수 있어요. 통찰하고. 그러면 우리가 내가 옛날엔 그냥 쥐고만 있던 이것을 이렇게 관찰하다보면 ~ 이것이 결코 행복한 것만 아니고, 변하고, 괴로움인 것이구나. 이렇게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면 그때 우리가 변화가 일어나고. 이것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힘을 그런 것을 지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은 사띠라고 하는 것이 탐욕과 성냄을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해줍니다. 알아차림이. 알아차림 수행을 통해서.

 

이 알아차림의 힘이 강해지다 보면 나중에는 이 상태에서 이렇게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에서 어떤 현상을 관찰하고 조사를 하면 굉장히 깊이 있는 지혜를 개발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 지혜를 통해서 아까말한 전도몽상, 이 어리석음을 타파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되도록 부처님께서 일단 사띠를 개발하게 하고, 그 사띠를 통해서 지혜가 닦여지도록 하는 거구요. 이 사띠를 개발해서 우리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가장 강력하게 아주 강하게 우리 마음을 아주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요하게 해주는 것이 삼매입니다.

 

그 삼매에 우리가 사마디라고 하는 삼매상태가 되면은 우리마음이 최고로 고요하고 ,그때는 탐욕과 성냄이 일시적으로 완전히 가라앉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 마음상태를 어던 현상을 바라보는 지혜를 봐서 현상을 고찰하게 되면, 이건 아주 깊은 통찰에 이룰 수가 있죠. 그래서 팔정도 중에서 선정수행이라는게 있잖아요. 그죠? 계정혜라고 할 때 그 선정은 이런 탐욕과 성냄이라고 하는 것을 완전히 가라앉히게 하는, 그런 수행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알아차림과 지혜라고 하는 것은 알아차림을 통해서 탐욕과 성냄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그로인해 지혜를 닦음으로서 어리석음을 극복할 수가 있는데요.

 

그 어리석음을 극복하는 그 방법이 영원하지 않은 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보는 게 아니라,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거. 아까 우리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본 것을 바로 잡는 거죠. 뒤바뀐 이 생각을 바로 잡는 것이 바로 이 지혜를 기르는 건데. 여러분들이 이런 현상을 죽 관찰해 보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 중에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관찰합니다.

 

여러분 몸뚱이도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포분열이 7년만 지나면 여러분 몸은 과거의 몸하고 완전 다른 몸이 됩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언제적 몸이냐? 이거죠. 지금 이 순간의 몸도 계속 변하고, 계속 변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여러분 마음이 가만있던가요? 변하지 않던가요? 변하던가요? 어릴 때 마음이 안변한 사람 손들어 보세요. 없습니다. 계속 상황상황에 따라서. 여기서 법문을 들을때는 아~ 그래, 그래야지 하다가, 또 나가면 마음이 변합니다. 계속 계속 변하죠, 상황에 따라서, 조건에 따라서. 이 마음이라는 것도 항상한게 하나도 없습니다.

 

조건이 변하면 계속 마음이 변해요. 그러면 변하지 않는 뭔가 실체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관찰해 보면,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요. 그게 실제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변한다라는 것을 알게 되면 뭐를 알 수 있어요. 이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라는, 변한다는 것은 뭐를 의미하느냐 하면 그것이 행복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돈이 천억즘 있는데 그게 영원히 있다면 행복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이게 어느 순간에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요.

 

내가 어떤 뭔가 안정적이라 생각하면 어느 순간에 확 무너뜨릴 수 있잖아요. 우리가 에를 들어서 이번 일을 가지고 한 번 생각을 해보면, 그런 불의의 사고를 당하신 분들이 그 전날 이런 일을 당하리라고 생각하신 분들이 잘 있겠어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내가 지금 이 사는 것이 안정돼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떤 조건의 변화에 의해서 갑자기 밀어닥쳤을 때, 그거는 갑자기 무너질 수 있잖아요. 그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내가 안정적이다라고 생각한 것이 결코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게 우리 삶이고, 내가 지나가다 갑자기 무슨 사고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변한다는 것을 알면 결코 우리삶이 행복이라고 꼭 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겠죠? 그죠?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를 하게 되면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끝으로 이 무상고 무아라고 하는 이 세 가지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거라서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사뻬라는 말은 모든이라는 뜻이에요. 빨리어로. 상카라라는 말은 형성된 거, 유의법이란 뜻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 이런 걸 이야기 하고요. 안있짜라고 하는 것은 무상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뻬 상카라 안있짜. 따라해보세요. 그리고 사뻬상카라 두빠. 사뻬상카라안있짜라는 말은 제행무상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사뻬상카라두카라는 것은 일체개고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사뻬담마, 담마는 뭐에요? 법이죠. 그죠? 아나따, 아나딴는 자아가 없다, 무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제법무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빨리어로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사뻬상카라안있짜. 사뻬상카라두카, 사뻬담바아나따. 이 세 가지가 불교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는 걸 이해를 하시고, 이거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지혜를 기르는 것이고, 그걸 통해서 여러분들이 이런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한번쯤 이해를 하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번뇌의 구조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