布施無住分
머무름 없는 보시를 하라
“그리고 수보리야,
수행자는 마땅히 法에도 머무름이 없이 보시해야 하나니
이른바 겉보기(色)나 소리, 냄새, 맛, 촉감, 사념 따위에 집착해서야 쓰겠느냐.
수보리야,
수행자는 마땅히 이처럼 분별에 초월하여 보시해야 하느니라.
왜 그런 것인가?
수행자가 분별에 구애받지 않고 보시해야 깨달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한가?
동쪽의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옵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그렇다면 남쪽, 서쪽, 북쪽과 그 사이의 간방間方, 그리고 위와 아래의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옵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머무름이 없는 것은 허공과 같아
수행자가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보시한다면
그 공효가 허공처럼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수행자는 마땅히 이 가르침에 따라
일체의 집착이 없는 허공에 머물러야 하느니라.”
-단예선사 解義-
세존은 본 장에서 보시布施를 예로 들어 머무름 없는 마음의 경지를 설하고 있다.
보시란 쉽게 말해 베푸는 것이다.
그런데 베푸는 바가 불교에서는 그 자체로 수행이 된다.
왜 보시가 수행이 되는가?
보시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외계와 단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의식의 시공이 좁고 영력이 낮을 가능성이 그만큼 큰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보시를 수행으로 삼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문제는 보시를 할 때이다.
보시란 본래 외계와 순수하게 공명이 되면서 저절로 우러나와야 한다.
그래서 보시를 의식하면서 행하게 되면 이것은 청정한 마음의 발로라고 보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머무름이 있으면서 하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가 아니게 된다.
사실 무언가를 남에게 베풀 때처럼 자신을 의식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가령 사회에 어떤 공헌을 했을 때
여기서 파생되는 명예를 의식하지 않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공덕은 있을지 몰라도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의미는 퇴색하고 만다.
머무름 없는 보시를 평상의 삶으로 삼게 되면 이름하여 보살도가 된다.
보살이 펴는 대자대비를 묵묵히 실천해 나가다 보면
그 마음이 태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게 될 것이다.
시공이 보살처럼 확대될 테고
그렇기에 수행의 경지 또한 한껏 무르익을 것이다.
하지만 보살도에서 한 가지 빠트려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바로 반야이다.
지혜를 수반하지 않는 보살도는 대각의 고지를 몇 보 남겨 두고
정체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수행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깊어졌을 때는
화룡점정의 마침표가 필요하며
어떤 경우가 됐든지 그 일은 반야로써 매듭을 져야만 한다.
요컨대 보시에 관계된 모든 분별로부터 자유롭게 돼야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가 성립된다.
머무름 없는 보시를 행할 정도의 의식 수준이라면
가히 일정 경지에 올랐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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