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나 인터넷은 물론 전화조차 보급되지 않았던 그 시절
어떻게 수천의 사람들이 한뜻을 모을 수 있었던 걸까요?
기록은 기억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김연아,
기록하여 기록하다./
3.1운동의 여파는 일제의 감시가 극에 달했던 1919년 봄
“뉘시오?”
“안녕하세요. 어르신 처음 뵙겠습니다.”
충청도 일대 마을마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어린 이방인이 나타납니다.
“좀 쉬었다 가자.”(유예도/ 사촌언니)
“그럼 언닌 집으로 돌아가. 나 혼자 다녀올게. 언니 집에서 봐. 나 다녀올게.”
일본 헌병들의 눈을 피해 밤낮으로 다녀간 곳만 스무여 곳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의 집성촌
유림 대표들을 찾아간 ‘어린 이방인’의 20여일/
꼭 만나야 했던, 찾아야 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사월 초하루입니다. 오실 수 있겠습니까?”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하는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1919, 독립선언문/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남은 한 마디의 물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찾고자 했던
흩어진 대한독립의 마음/
힘든 줄 모르고 버텨낸 20여 일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충남 천안군 아우내장터
1919년 4월 1일 (음력 3월 1일)/
어린 이방인과 약속한 그날
24곳의 마을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물음에 대한
3천여 명의 마음/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일본 헌병의 총검에 학살당한
19명의 사망자와 30여명의 부상자/
하루에 거사로 끝날 듯 했던 그날의 외침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군기를 사용하여 민족을 죽이느냐
-원심공판 시말서 중/
“피고에게 징역 3년형을 선고한다!”
서대문 형무소는 단순한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지방에서 독립운동 하던 이들이 이곳에 수감되었다는 건
일제에 불복해 서울로 송치되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여성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 8호 여옥사/
일제치하, 독립을 꿈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작된 옥중 생활은
숨 쉬는 것도 괴로울 정도의 악랄한 고문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지나간 1년
“대한독립 만세”
돌아온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1920년 3월 1일)
18의 의지는 다시 한 번 감옥안의 마음을 모아 일으킵니다.
/여옥사에서 울려 퍼진
또 한 번의 만세운동
1920년 9월 28일
19세의 나이로 옥중 순국/
유관순
(1902.12.16. ~ 1920. 9.28)
“11살 먹은 애들까지 다 올라가서 만세를 불렀어.
유관순 누님이 앞에 서서 만세를 부르고 들어가는데
일본 헌병들이 쫓아오더니만
총으로 사람을 그냥 함부로 막 쏴서
(유관순 아버지를) 칼로 찔렀어요.
(유관순과 함께) 사람 왜 죽였냐고 사람 살려내라고...
모두의 독립을 위해 바친
그녀의 열일곱, 열여덟
/모두의 ‘하루’를 일군
그녀의 열일곱, 열여덟
김연아,
유관순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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