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지금도 내가 무언가를 바꾸려고
뭔가 시도를 하려고 하면
일단 가족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나죠.
자식이 셋 있다 보니까.
솔직하게 얘기하면
‘나도 할 수 있어요.’ 이건 제 스스로에게도 가식적이고 거짓말인 것 같고
저는 감히 못할 거 같아요.
성동일
기억하여 기록하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 되며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고
누군가는 웃음을 얻었던 세상
독립은 망령된 이야기
-신용희
조선 독립이라는 선동은 허언이고 망동이다.
-이완용
조선양반들이 일제의 귀족으로 신분세탁을 해가며
호의호식을 택할 때,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의 형제 50여명의 가족들이
전 재산을 걸고 한 마음으로 내린 결단
만주 벌판에 ‘조선인을 위한 학교를 세우자’
가문의 전 재산으로 세운 항일투쟁의 뿌리 ‘신흥무관학교’
그 명동일대 땅 대부분이 그 집안 소유의 땅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해 보면 몇 백억 원이 훨씬 넘겠죠.
우당 이회영 일가의 재산 규모
-실제가치 약 2조 원 추정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돈을 한 푼도 안 남기고 다 썼다는 게 참...
백사 이항복 가문의 후손
조선의 명문가 집안이 택한 독립운동의 길
‘일주일에 세 번 밥을 지우면
운수대통이라 여겼다’
-아들 이규창의 회고
첫째 이건영 병환으로 사망
둘째 이석영 영양실조로 사망
셋째 이철영 병환으로 사망
여섯째 이호영 의병활동 중 행방불명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이끌었던
넷째 우당 이회영 선생
1932년 11월
중국 다롄 경찰서
“말해”
“재판장에서 말하겠소”
일본 관동군 사령관 처단을 위해
만주로 향하던 중
밀정의 고발로 일경에 체포
조국을 떠난 지 22년, 예순 다섯의 나이
중국 다롄에서 옥사
‘류치장 창살에 목매 죽은 리상한 로인’
일제는 그의 죽음에 대해 거짓 발표한다.
만주로 떠난 여섯 형제 중
조국의 광복을 본 이는
다섯째 이시영, 한 명뿐이다.
모두의 독립을 위해 바친 가족의 전 재산
그리고 일생
이회영
(1867. 3. 17~ 1932. 11. 17)
성동일
이회영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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