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부자로 태어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부자로 태어나는 건가요?
전생에 나쁜 일을 많이 해서 가난한 건가요?
이에 대해 불교에서는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스리랑카에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한국에 태어났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스리랑카에 태어났을 뿐이고, 그냥 한국에 태어났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부잣집에 태어나고
전생에 복을 못 지어서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배계급의 지배 논리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기 위해서 만든 논리가
‘전생에 복을 많이 지으면 남자가 되고,
복을 못 지으면 여자가 된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를 차별하기 위한 논리입니다.
남녀가 평등한 세상이 되면
‘전생에 복을 많이 지으면 남자가 되고,
복을 못 지으면 여자가 된다’ 하는 논리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왕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남자를 잘 받들어야 한다’,
‘왕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하는 것처럼
지배자들이 자신의 지배 계급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런 논리를 만든 거예요.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건
다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저렇게 된 거야.
그러니 너희는 잔소리하지 말고
그냥 저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해.
네가 못 사는 건 네가 전생에 복을 못 지어서 그런 거니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이런 말들은 다 지배 계급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사상입니다.
부처님은 지배 논리, 계급차별, 성차별, 이런 것을 다 부정하고
만인이 평등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봉건 지배 질서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되어 오면서
그 질서에 적응하다 보니까
이런 논리가 불교 안에도 스며들게 된 겁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에서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논리에 부응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전생에 복을 많이 지으면 남자가 되고
전생에 복을 못 지으면 여자가 되고
복을 많이 지으면 건강하고
복을 못 지으면 장애자로 태어난다는 말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런 말들은 모두 브라만의 지배 논리입니다.
힌두교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 논리를 수용하다 보니
마치 불교의 가르침인 것처럼 된 것이지
부처님은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불교 경전들은
대부분 인도에서 4세기에서 5세기경에 문자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때가 인도의 굽타 시대인데
가장 남녀 차별이 심하고 계급 차별이 심한 봉건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에 경전이 편집되다 보니까
불교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이것은 불교의 본래 가르침 하고는 좀 거리가 멉니다.
불교문화적 측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것은 담마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가 결합하여 수정란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생명이 시작됩니다.
현대 과학의 발달로 이 수정란을 인공적으로 분열시키면
1개의 수정란이 2개가 됩니다.
또 분열시키면 4개도 만들 수 있어요.
4개의 수정란을 각각 네 여성의 자궁에 넣어서 키우면
똑같은 아이가 4명 태어납니다.
스리랑카의 여성, 미국의 여성, 무슬림 지역의 여성, 한국의 여성에게
각각 수정란 1개씩을 넣으면
그 아이는 똑같은 수정란인데도
자란 환경에 따라 모두 다른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똑같은 수정란이고, 생긴 것도 똑같은데
네 아이가 운명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똑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잖아요.
까르마는 인도 말인데 ‘운명’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정해져 있다는 뜻이죠.
까르마라는 용어는 같지만,
부처님이 사용한 까르마는 다른 뜻을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까르마는
‘형성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형성된 것은 뭐든지 다 변합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말을 아시죠?
인도 전통 사상에서는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가르친다면,
붓다는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지 않고 형성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질문자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좋다’ 하고 생각하거나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좋다’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왜 어떤 사람은 부자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날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더 좋다면 부처님도 부자로 그냥 사셨겠죠.
무엇 때문에 다 버리고 출가하여 가난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만약 질문자의 생각이 맞다면,
부처님은 과거 생에서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출가를 하여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출가하기 전 왕자일 때는
과거 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싯다르타 태자가 된 겁니다.
전생 때문에 부자가 되거나 가난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현대의 빈부격차를 합리화 시켜주는 논리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환경위기 시대에
소비를 많이 하는 사람은 매우 나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지구환경을 가장 많이 파괴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에 대해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부자가 되었다고 하면서 선망합니다.
하지만 기후 위기 시대에 가장 많은 해악을 끼치는 사람은
바로 소비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부자가 되게 해 주거나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거나
이런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내가 어떤 조건에 있든
괴로움 없이 살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즉 니르바나(열반)를 추구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조금 생소하게 들립니까?
여러분은 오랫동안
‘부자인 사람은 전생에 복을 많이 지었고,
가난한 사람은 전생에 복을 못 지었다’
이런 논리를 갖고 살아왔기 때문에
제가 한 이야기가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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