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제가 어릴 적부터 할머니가 무슨 말만 해도
소리를 지르고 폭언을 일삼습니다.
저는 이런 아빠를 어떻게 대해야 되고,
괴로워하는 할머니께 어떠한 위로를 해 드려야 할까요?//
집안이 편안하지 못하군요. ㅎㅎ
그래도 그런 우여곡절이 있고 시끄러움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가운데 자기가 지금 살아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잘 살고 있고.
자기가 지금 정말 밥도 먹기 어렵게 살면
이렇게 질문도 못할 거예요.
지금 이 얘기는 다 옛날 얘기에요, 첫째는.
“옛날에 그랬다”
그 옛날에 얘기가 아직 끝이 덜 나고 지금도 연결이 되어서
아직도 시끄러운 게 계속되고 있는데
할머니가 어렵게 생활하면서 고생고생하면서 아버지를 키웠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엄마가 고생고생하면서 아이를 키우면
아이들이 잘될 거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결과보세요.
고생고생해서 키웠더니 그 아들이 커서 고생한 보람이 없는 결과가 나오잖아.
그러면 또 그런 남편 만나서 자기 어머니도 고생고생해서 자기들 키웠는데
자기들 중에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어쩌면 엄마가 실망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상식적으론 어쩌면 불공평하고 불합리하잖아요.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이렇게 했으면
그 결과가 좋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결과가 나쁘면 고생한 보람이 없어진다.
우리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면 이런데
어떤 원리, 이치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 얘기에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어떤 그런 학대로 인해서
이혼하고 혼자서 고생하면서 아들을 키웠기 때문에
그 할머니의 심리상태가 굉장히 괴로운 가운데
분하고 화나고 이런 가운데
아이를 키웠기 때문에
아이는 그 엄마의 그 심리가 그대로 아이의 마음을 형성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원리로 보면 정상이다. 이런 얘기에요.
할머니는 고생했는데 아버지가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게 아니고
이렇게 되도록 키워졌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이해가 잘 안 되나 봐요.
엄마의 심리가
억압받고 분노에 차 있고, 원망하고, 괴롭고
이런 상태로 아이를 키웠기 때문에
아이의 심리상태도 그런 분노, 원망 이런 게 형성이 되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엄마가 고생해서 자기를 키웠기 때문에
엄마를 잘 돌봐야한다,
아버지도 그런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엄마만 보면 화가 나고 성질이 올라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 나서 혼자서는 또
“내가 성질을 못 이겨서 엄마를 괴롭혔구나” 이렇게 반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마를 보면 안 돼요, 이게 자동으로 올라오기 때문에.
이걸 보고 자기가 배우는 게 있어야 해요.
그런 아버지를 엄마가 만나서
엄마 또한 고생했어.
고생하면서 또 자기를 키웠기 때문에
자기들도 이렇게 확률이 높다.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고함지르고 막 싫어하고 미워하듯이
자기도 지금 똑같은 거예요.
그런 아빠를 지금 미워하고 싫어하고 이렇게 된다.
왜 그럴까?
아버지가 바람 피울 때, 엄마가 힘들어하면서 여러분들을 키웠기 때문에.
그런데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있다면 할아버지에 대한 갈등이 심할 텐데
할아버지도 안 계시니까 그게 결국은 할머니한테로 간단 말이에요.
자긴 지금 아버지가 있으니까 아버지하고 갈등이 되는데
아버지가 안 계시면 자신들이 형성된 이런 심리가 지금은 아버지 때문에 엄마를 옹호하지만
또 엄마하고 불만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할머니 걱정하고 아버지 생각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한다?
자기가 이런 까르마, 업의 대물림에서 벗어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자기 자식은 어때요?
나도 행복하고 내 자식에게 이렇게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끊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아무리 아버지를 미워하고 화나고 이러면서
내 자식을 잘 키운다 해도
또 이런 것이 나도 모르게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또 대물림해서 내려갈 확률이 높다.
그러니 자기가 이미 형성된 까르마는
이렇게 갈 확률이 높은 거예요.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그런데 수행의 위대함은
이걸 보고, 이 이치를 알면
자기가 이렇게 안 가야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고 만약에 밤에 달려가면
그 앞에 강물이 있으면 강물에 빠질 수밖에 없어.
그런데 그 강물에 빠진다는 걸 미리 알면
사람의 위대함은 멈출 수 있다.
우리들의 정신 작용은
이게 반복되면 습이 붙는 그런 작용이 있어요, 습관.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반복되면
그래도 계속하려고 하는
마치 움직이는 물체가 계속 움직이려는 것과 같은 관성의 법칙이 있다.
이게 좀 약하면 습관이라 그러고
그게 좀 강하면 중독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이게 정신 작용의 일부가 그래요.
우리는 다 뭐든지 계속 반복하면 습관성,
습관성이다 하는 건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그렇게 된다.
그러니까 그 이성으로 안 하겠다고 해도 3일을 못 넘기고 도로 돌아가 버려서
작심삼일, 이런 말 쓰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마치 통제가 안 되고
그렇게 살아가는 걸 보고 옛날 사람들은
“아,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구나”
이게 운명론이에요.
“저 봐라, 어쩔 수 없지 않으냐, 결국 저렇게 되지 않느냐”
운명론의 원인, 원인을 조금씩 달리 설명하는 거예요.
중국에서는 태어날 때의 그 생년-월-일-시,
이 4가지를 사주라 그런다.
이때, 그거에 의해서 ‘너는 어떻게 살라’고 정해져 있다.
인도에서는 ‘전생에 네가 어떻게 살았냐’ 그 결과로
‘이생에 올 때 이미 너는 어떻게 살라’고 정해져 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꼭 그거는 서양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있고
저 위의 하느님이, 신이, 명부에
“너는 어떻게 살라고” 명부가 딱 정해져 있다.
신의 뜻에 의해서 되는 거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게 운명론이에요.
여러분들도 뭘 하다가 뜻대로 안 되면 뭐 한다?
어떤 부부가 와서
“스님 저희 부부는 전생에 뭐였겠어요?” 이렇게 물으면
“뭐긴 뭐야? 원수지.” 이래요.
“아이고, 어떻게 아세요?” 이래.
왜 그럴까?
부부사이가 좋은 사람이 와서 스님한테 와서 물을까? 나쁜 사람이 와서 물을까?
그래.
이건 뭘 말하냐?
현재를 두고 하는 얘리다.
현재 이 어려움을 가지고 전생 타령을 하거나 사주 타령을 하거나 하느님 타령을 해요.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 뭐요?
남을 원망하다 그것도 안 되면
“아이고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느님 타령하잖아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게 뭐요? 전생 타령하지.
“아이고 내 팔자야” 이게 팔자타령을 하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도 이런 문제라면서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남자를 만났고, 이런 집에 태어났고, 이런 부모를 만났고, 이런 자식을 낳았고”
이래 되기가 쉽거나
“아이고, 팔자가 어떻게 되었길래 이러나
궁합이 안 맞아서 이렇게 되었나
하나님이 나만 미워하나 봐” 이렇게 되기가 쉽다.
그런데 부처님이란 분은
왜 인간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해서 연구하고 연구하고 연구했어.
부처님은 작은 나라지만 왕자로 태어나서 다음에 왕이 될 사람이었어.
그러니까 사주팔자로 치면 좋아요? 안 좋아요? 좋지.
전생으로 쳐도 전생에 복 많이 지은 사람이지.
하느님을 얘기하면 하느님이 신이 보살피는 사람이지.
다 부러워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도 괴로운 거예요.
그러니까 인생이 아주 어려운 게 처했으면 신타령을 할 텐데
자기는 조건이 좋은데도 인생은 고뇌가 있다
부자도 고뇌가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고뇌가 있고
인물이 잘난 탤런트도 고뇌가 있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남이 볼 때는
“저 사람이야 뭐가 괴롭겠노”하지만 본인은 괴로우니까
지금의 논리로는 이 괴로움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말이오.
전생 타령, 뭐 이런 타령을 할 수가 없잖아.
그래서 이 괴로움에 대해서
“왜 괴로울까?” 이걸 연구를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붓다의 가르침은
뭘 믿는 게 아니고 탐구,
“이 일이 왜 일어났을까?
어떤 원인으로 해서 이런 결과가 났을까?”
이 탐구적 자세여야 한다.
요즘 말로 하면 마치 과학자와 같은 거예요.
이렇게 탐구탐구한 결과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이 괴로움에는 어떤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을 찾아서 소멸시키면, 이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법칙을 발견해서 탐구를 해서
그는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재물을 많이 가진 게 아니라 재물도 버려버리고
왕위도 버려버리고
가족도 떠나버리고
그래서 다 떨어진 옷 입고, 밥은 얻어먹고, 옷은 주워입고, 잠은 나무 밑에서 자고.
그런데도 두려움도 없고 괴로움도 없이 사는 거요.
오히려 왕은
재물은 다 가지고, 큰 집은 왕궁을 다 가지고, 좋은 마차타고, 좋은 옷입고, 부인도 여러명 있고, 온갖 좋은 보석을 가지고, 음식은 좋은 거 다 먹고
그런 왕은 괴롭다 이거야, 두려움도 있고.
그런 사람이 나무 밑에 거지처럼 앉아있는 부처님한테 와서
“괴로워죽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납니까?”
이렇게 물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분의 삶을 보면
오늘 우리가 괴로워하는 이거,
여러분들이 가족관계 때문에
자기처럼 아버지 때문에 괴롭다 그러면
이분 얘기 대로하면 아버지하고 관계를 떠나면 되잖아요.
관계가 좋았는데도 떠나버렸단 말이오.
부부관계가 괴롭다고 하면 부부관계를 떠나면 되잖아요.
이분은 부부관계가 좋았는데도 떠나버렸다는 거예요.
돈이 없어서 괴롭다고 하면
이분은 있는 돈도 버렸는데도 안 괴롭고 행복하단 말이에요.
출세를 못해서 괴롭다,
이분은 있는 지위도 버려버렸단 말이오.
집이 어때서 괴롭다.
이분은 집 없어도 안 괴로운 것에요.
이분이 괴롭지 않게 살았다는 건 뭐예요?
우리 모두 다 괴롭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얘기에요.
그런데 여기서 가장 핵심이 뭐냐?
알아차림이라는 거예요. 알아차림.
우리의 정신 작용 중에는 기억이라는 게 있어.
기억을 함으로해서 유리한 거는 뭐요?
옛날 거를 가지고 교훈을 삼아서 앞으로 미래에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데
교훈이 되게 할 수도 있는데
이 과거에 지나간 그 기억 때문에
트라우마, 상처가 되어
현재와 미래의 장애가 되기도 한다는 거예요.
우리의 기억력은
우리를 더 발전시켜주는 좋은점도 있지만
이 기억 때문에 살아가는데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이런 이치를 아는 것, 알아차리는 것,
내가 괴로우면
“아, 내가 괴롭네, 이렇게 가면 죽겠네”
이렇게 알아차림이라는 정신작용이
인간 정신 작용 중에 가장 높은 정신 작용이에요.
이 알아차림이 있으면 어떠냐?
이 습관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
요렇게 되풀이,
“계속 이렇게 이렇게 먹으면 내가 죽겠네” 이러면
안 죽는 길을 내가 찾아나갈 수도 있다.
안다고 반드시 벗어난다가 아니라
윤회라 그래, 계속 똑같은 걸 반복하는 걸.
거기서부터 내가 벗어날 가능성이 열린다.
운명이라고 하면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정해져 있다, 이건데.
“아니다, 그걸 벗어날 수 있는 첫발이 내 상태를 내가 알아차리는 거다.”
“오, 내가 고집이 있네”
내가 고집이 있는 줄 모르면 계속 고집하는데
“오, 내가 고집이 있네”
그러면 자기가 얘기할 때
“아, 내가 지금 고집하고 있구나
어, 내가 지금 화내고 있구나”
이렇게 자기 상태가 점검이 되면
변화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거예요.
지금 자기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아, 우리 할머니가 굉장히 고생하고 살아서
참, 아빠를 애지중지 키웠는데
아빠가 제 아빠하고 똑 닮았네!” 이렇게 되잖아, 그지? ㅎㅎ
“또 그 아빠 만나서 우리 엄마가 억수로 고생하면서 우리를 키웠는데
잘못하면 우리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겠네”
집에 아들들이 있다면 이런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럼 나도 고생하면서 살았는데
내 아들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겠네” 이거예요.
그러면 이게 교훈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왜 아빠가 저렇게 됐나? 엄마가 할머니가 그렇게 했는데.
바로 할머니가 성질내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면서 자식을 키웠기 때문에
그게 자식의 심리가 형성이 되다 보니
아빠도 불행한 사람, 자기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마치 자기 운명이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런 원리를 알면 아빠도 불쌍한 사람이에요.
이런 걸 모르면 나쁜놈이 되고
알면 불쌍한 사람이야.
그런데 자기가 지금
그 아빠 미워하고 다투다 보면 자기도 똑같이 나중에 되기 때문에
“아, 나는 안 저래야지”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모가 화를 내면
우린 두 가지 길이 열리는 거예요.
90%는 애도 화를 내는 거요, 나중에 크면, 내리기라고 그래.
성질을 그대로 닮는다.
그런데 엄마가 성질내니까 내 안에 상처가 많았어.
그러니까 나는 내 아이에게 화를 안내야지.
이렇게 가면 오히려 이게 장점이 된다, 이 말이오.
부부가 이혼을 한 걸 보고
그게 습이 들어있으면 대다수가
부부가 이혼을 하면 자식이 이혼할 확률이 훨씬 높아집니다.
그런데 이 알아차림이 있으면
“오, 그러니까 나는 아이들에게 이걸 안 주려면
내가 가진 고통을 생각하면서
아, 나는 안 그래야지” 이러면 변화가 올 수도 있다.
그런데 결심만으로는 안 돼요.
대부분 다 결심하는데 결과는 똑같기가 쉬워요.
그러니 오늘부터
아빠를 미워하면 아빠처럼 안 되는 게 아니고
미워하면 할수록 누구처럼 된다?
아빠처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자식 중에 자기를 거쳐서 그런 까르마를 가진 사람이 태어난다.
유전자도 물질, 생물학적 유전자도 자식대에 바로 나타나는 게 있고
한 단계 건너 다음 단계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그런 할머니가 어땠니, 아빠가 어땠니, 엄마가 어땠니
자긴 지금 그런 과거 부모 얘기를 지금 하고 있다면
그런 얘기를 계속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한다면
자기도 거의 80~90%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아져요.
그러니까 이 순간부터 딱 끊고
나는 이미 지나간 일이다.
어떤 환경에서 내가 자랐든, 이 환경이 어떻든
나는 그렇게는 안 살아야 하겠다.
그러면 지금은 아빠도 얘기하지 말고, 엄마 얘기도 하지 말고
할머니 얘기도 하지말고
자기에게 딱 집중해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빠가 짜증내는 그 소리를 듣고 나도 짜증낼 거냐?
아니다, 불쌍한 사람이다. 불쌍한 사람이니까 저렇구나.
엄마가 막 하소연하는 거 보고
나는 어떻게 할 것이냐?
엄마의 인생이고, 나는 그런 말을 들어도 엄마가 고생했구나이지
그것 때문에 같이 울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분노하지도 않을 거다.
할머니가 뭐라고 뭐라고 해도
할머니 인생이고, 나는 거기에 반응하지 않을 거다.
동조해서 울지도 않고, 듣기 싫다고 반대하지도 않고.
이렇게 그런 소리를 들어도, 그런 모습을 봐도 내가 평정심을 유지하면
나는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거기에 저항하거나 거기에 끌려가면
자기도 모르게 그 늪에 빠져서 같은 결과가 된다.
그러니 첫째는 아버지가 그렇게 하면
“아버지도 삶이 고달프고 힘드셔서 저렇구나”
엄마가 그렇게 얘기하면
“엄마도 삶이 고달프고 힘드셔서 저렇구나”
할머니가 그렇게 얘기하면
“할머니도 고달파서 힘드셔서 그렇구나.”
내가 볼 때는 할머니하고 아버지하고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지만
할머니는 그래도 이 세상에서 자기 아들밖에 없어.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거 개입하면 안 돼.
그건 괜히 자기는 남의 모자 사이에 자기가 껴서
쓸데없는 짓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의 삶으로 두고.
지금 자기가 개입한다고 개선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냉정하게 말하면 구경꾼으로 그냥 있으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만 해.
“아빠, 할머니한테 그러지 마세요” 한다고 그렇게 될까?
이미 까르마가 되었기 때문에 될 수가 없어.
그게 무슨 무시해라, 외면해라 하는 게 아니라
산에 자라는 나무 보고
빨리 자라라, 늦게 자라라 한다고 그게 될 수 없잖아.
그런 것처럼 그냥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힘들어 보이면 돈을 10만원 보내드리든지
아빠가 힘들어하면 나중에 가서 밥을 한 끼 사주든지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지
할 수 없는 일에 관심을 두고 신경을 뺏기면
자기가 거기 말려들게 된다.
이게 확실히 돼야
그 까르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
이 생물학적으로 유전으로부터 끊을 수 있다.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관점이 딱 분명하지 않으면
늘 그냥 그 나물에 그 밥으로, 인생이 늘~~
안 해야지 해도 늘 그렇게 하고
둘이 싸우지 마라, 하면서
엄마아빠 싸우지 마라, 하면서
엄마가 말 안 들으니까 엄마 미워하고
아빠 말 안 들으니까 아빠 미워하고
나하고 엄마하고 싸우고, 아빠하고 엄마하고 싸우고, 나하고 아빠하고 싸우고
이게 낫나?
엄마아빠 싸우는 거 구경하면
나하고 엄마는 안 싸우고, 나하고 아빠하고는 안 싸우고
이게 실익이 있나?
“둘이 싸우지 마라”고 하다가
그걸 말리려고 하다가
나도 엄마하고 싸우고, 나도 아빠하고 싸우고, 삼각이 다 싸운다.
이게 착한 게 아니고 어리석은 거다.
그러니까 여기서 정신 딱 차리지 않으면
자기는 그 늪에 같이 빠져서 같은 고통을 겪다가 생을 마치게 된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늪에 빠졌더라도
나는 기어 나와서 내 삶을 살고
힘이 있으면 작대기라도 가져와서 건질 수 있으면 건지고.
그래서 더 이상 그런 할머니가 어떻고, 아버지가 어떻고, 엄마가 어떻고
이런 생각을 딱 놔버려야 해.
...
하소연 듣기가 힘들면 전화해도 안 받으면 되고
그거 뭐 어렵지 않아요.
전화를 안 받으면 돼.
내가 술 못 먹는데 옆의 친구가 자꾸 술을 권하면
아무리 권해도 안 먹으면 되고
그래도 자꾸 권하면 거절하기 어려우면 받아서 먹는 척하고 부어버리면 되고
그것도 또 안된다고 자꾸 그러면 한잔 먹고 방에 가서 자버리면 되는 거요.
거기에 끌려들어 가면 안 된다.
그것처럼 전화를 자기가 안 되겠다 싶으면 안 받으면 되고
두 번째 받았으면 그냥 아까 술을 받아서 부어버리듯이
그냥 한쪽 귀에는 음악 틀어놓고 한쪽 귀에는 어머니나 할머니 말 들으면서
“네, 네, 네, 어머니 어머니”
이렇게 들어도 되고
그다음에 오히려 진지하게 듣는 방법도 있어.
자기에게 공부가 되면.
그런데 내가 이런 얘기하는 건 자기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들으면 끌려 들어간다 이 말이야.
그래서 엄마 얘기 들으면 같이 울다가
자기도 모르게 아빠를 미워하게 된다.
그러면 그거는 좋은 게 아니라 끌려들어 가는 거야.
그 늪에 빠진 거다.
“아, 어머니가 힘드시구나” 이렇게 그냥 듣고
거기에 엄마하고 같이 아빠의 욕을 하면 안 되고
또 어머니에게 동조한다고 아빠에게 욕을 해도 안되고
또 어머니에게
“엄마, 아빠 욕 그만해라” 이렇게 화해시킨다고 엄마를 나무래도 안 된다.
엄마는 힘들어서 얘기했는데
자기 말 안들어주니, 자기하고 싸우게 되고.
또 동조를 해주면 어떠냐?
자기가 자기 아빠를 미워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냥 들어드리고
“알겠습니다, 아이고 힘드시군요. 네, 어머니 알겠습니다.
제가 맛있는 거라도 사드세요.
내가 한 100만원 보내드릴 테니까 드세요.”
이렇게 말하지, 더 이상 개입 하지 않아야 한다.
아빠가 똔 전화와서 엄마 욕을 하면
“아이고, 아빠 힘드시군요.
네네, 제가 한 100만원 보내드릴 테니까
그냥 술이나 좀 드세요.” 이러고 말아야지
그걸 듣고 엄마한테 전화해서
“엄마, 아빠가 그러는데..”
이렇게 개입하면 안 된다.
그냥 들어드리는 거예요.
상담자가 직업이라면 들어줄 수 있잖아요.
직업인 상담자처럼.
상담자는 늘 남의 괴로움을 들어주잖아.
그냥 들어주면 돼.
딸이고 손자가 되어서 힘들다는 왜 못 들어줘?
그냥 들어주면 되지. 돈 드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내가 공부가 안 되어서 들어주면 자꾸 거기 끌려들어간다 하면
음악 틀어놓고 듣는 방법이 있고
하나는 안 받는 방법도 있다.
그거는 내 수준이 안되어서 그렇다.
내 수준만 된다면 들어주는 게 제일 좋지.
그런데 자기가 해결하려고 하지 마라. 이거야.
그건 자기 사정이지
남이 싸우든 말든 자기가 그러면 그 집에 안 가든지
싸우는 거 구경하면서 밥 먹고 오든지.
그건 자기 공부가 안 됐다는 얘기지.
남탓하는 거 아니오.
결국은 엄마 때문에 내가 힘들다 이 얘기 아니오.
내가 계속하잖아.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래도.
저희 부부가 싸우든지, 저희 엄마 자식이 전화를 해서 서로 욕을 하든지
자기가 무슨 상관이야.
관여 안 하면 되지.
관여하면 끌려들어 간다고 이렇게 긴 시간을 얘기했는데도
또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렇게 끌려 들어가서 가서 한 늪에 빠져서 같이 허우적대고 살든지
그렇지 않으려면 그 사람들 얘기를 더 이상 자기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엄마 보고 싶으면 엄마보고
아빠 보고 싶으면 아빠 보고
둘이 싸우면 그냥 문 열고 나가 밖에 좀 있다가 싸움 끝나면 들어오고
안 그러면 둘이야 싸우든지 말든지
밥 먹으면서 자기는 구경하면 되고
이렇게 딱 관점을 가져야
이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알기는 어떻게 알아?
이게 잘 안 돼.
이게 잘 되면 왜 인생이 이렇게 복잡하겠어.
그러니까 이것은 까르마이기 때문에
자기가 그 집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살면서 그렇게 지지고 볶고 사는 게
못 벗어나면 운명이고 사주팔자이고,
벗어나면 자유의 길을 가는 거고.
얘기가 길었네요.
...
안 되도록 하면 더 좋고
되도 괜찮아요.
왜 되도 괜찮을까?
우리 할머니가 그렇게 살고, 엄마도 그렇게 사는데
내가 그렇게 산다고 무슨 큰 일이 있겠어?
안 그래요?
인생, 그렇게 꼭 이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이게 별로 안 좋아보이면 바꿔보면 되고
안 바꿔지면 그대로 살아도 돼요.
..
네 바꾸세요.
늘 배수진을 쳐야 해요.
안 바뀌어도 괜찮아.
우리 부모 다 조상 대대로 그렇게 살았는데
내가 쥐뿔났다고 그렇게 안 살 이유가 뭐가 있겠어?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데
“하는 데 까지는 한번 해보자” 이래야
되도 좋고 안되도 좋지.
자기처럼 “바꾸어야 한다” 이랬다가 안 바뀌어지면
자기를 이제 욕해.
아빠 욕하다가 자기를 욕하게 되요.
“네 문제야, 수준이 안 돼” 이러면서.
그러니까 “지금도 괜찮다.
그러나 조금 더 잘 되는 길을 한번 가보자.”
이렇게 가볍게 관점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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