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군주 캄비세스 왕의 명령은 잔혹했습니다.
그는 뇌물을 받고 부당한 판결을 내렸던 재판관 시삼네스를 잔인하게 처형했지요.
그리고 왕은 바로 시삼네스의 아들 오타네스를 후임 판관으로 임명한 뒤에 말했습니다.
"어떤 의자에 앉아 판결하고 있는지 명심하라"
왕은 잔인했으나, 또한 잔인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바로 법이었으니 왕은 정의롭지 못한 판결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만천하에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법은 그렇습니다.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믿음.
그러기에 우리는 법정에 권위를 부여하고 판결에 수긍합니다.
때로는 억울할지라도…
그러나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특별조사단이 발표한 이 보고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보고서 안에는 법원행정처가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재판을 놓고 거래를 시도했다는 정황은 물론이고 판사들의 성향을 조사하고 뒤를 밟은 정황이 고스란히 들어있었습니다.
현직 대법원장은 고개를 숙였고 전직 대법원장이 수사 선상에 오를지도 모를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는데…
사람들이 마침내 법정까지 믿을 수 없게 된다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올해 초에 많은 이들 입에 오르내린 격문형태의 시가 한 편 있었습니다.
"반박 성명 발표한 대법관 13인에게 고함"
- 김주대
당시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에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영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있었고 이에 대해서 대법관 전원이 사상 초유의 반박성명을 냈던 상황이었지요.
물론 이와 관련된 의혹은 이번 특조단의 조사 결과, 더욱 짙어진 상황…
시인은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판결에만 전념하라고
비린내 나는 생선은 우리가 팔고
육중한 기계음 들리는 공장 컨베이어벨트는
우리가 지켰다…우리는 법을 못 배웠으니까.
기꺼이… 인정하며… 법의 칼을 쥐어주었다…"
- 김주대 < 반박 성명 발표한 대법관 13인에게 고함 >
시인의 말처럼 법관은 권력의 대리자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임명권자가 누구도 아닌 시민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떤 의자에 앉아 판결하고 있는지 명심하라"
캄비세스 왕은 판관이 된 시삼네스의 아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대법관들을 향해서 격문을 썼던 김주대 시인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의 위에 법이 있고 법 위에 우리가 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저작권: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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