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317회 남편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준비 없이 저 세상

Buddhastudy 2013. 3. 18. 05:28

출처 YouTube

     

먼저 질문 하신 분 갑자기 당한 일이라서 마음이 많이 아프시라고 생각을 합니다. 먼저 위로 말씀을 드리고요. 우리가 콩을 심으면 콩 싹이 트고, 콩이 자라고, 콩 꽃이 피고, 콩 열매가 열립니다. 그럴 때 그 콩 씨앗을 봤을 때는 도무지 거기에 어떻게 이런 모양의 잎사귀, 이런 모양의 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린 그런걸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미 그 콩 씨앗 안에 잎은 어떻게 생기고, 줄기는 어떻게 생기고, 키는 얼마나 크고, 꽃은 어떤 모양이 되고 열매는 어떻게 열릴 거라는 게 그 콩 씨앗 안에 그런 정보가 다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인이라 그래. . 어떤 결과가 일어날 때는 그 결과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어떤 원인이 있어요. 이 콩 씨앗이 인입니다. 그런데 이 인이 있다고 해서 인과 결과가 똑같이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언제쯤 심어지느냐? 수분이 어느 정도로 공급이 되느냐? 기온이 어느 정도가 되느냐? 거름이 어느 정도로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많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아무리 기온이 다르고 거름이 다르고 땅이 다르고 습기가 다르고 해도 콩이 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콩에서 콩이 나오는 거요. 그래서 이 원인이 중요한거요. 인이 중요한거요.

 

그러나 콩에서 콩이 나오는 건 인이 좌우하지마는, 그게 얼마나 많이 나오느냐? 그러니까 굵어봐야 어느 정도까지 밖에 안 굵는다하는 것은 인이 결정하지만, 그러나 그 범위 안에서 그만한 굵기가 될 수도 있고, 더 작은 굵기가 될 수도 있고, 양이 많아 질 수도 있고, 적어질 수도 있고, 키가 좀 더 커질 수 있고, 좀 작아질 수 있고. 이런 거는 인에만 작용하는 게 아니라 연이 좌우하는 거요. 그래서 이 세상의 원리는 인연과라 그래요. 인연과. 줄여서 인과라고 쓰지마는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__과다.

 

인은 원인이고 연은 조건이에요. 주위 환경이에요. 그러니까 원인이 중요하지마는 환경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환경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원인 또한 매우 중요해요. 이 원인과 환경이 결합해서 결과, 이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거요. 여러분 개인을 인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다스릴 거냐? 수행은 인의 문제에요. 이것이 잘 준비된 사람은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도 오히려 그 열악한 환경을 자기가 영향을 줘서 주위를 좋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어떤 집에 시집을 갔는데 그 시집이 가난하고 가정의 불화가 많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아주 보살심을 내게 되면 어떠냐? 그 집을 화목한 집안으로 또 부유한 집안으로 만들 수가 있는 거요. 반대로 아무리 화목하고 부유한 집안도 아주 이런 성품이 나쁜 사람이 들어가서 그 집안 전체를 나쁜 방향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이럴 때는 뭐가 우세한거에요? 인이 우세한거에요.

 

또 여러분이 결혼해서 시집을 갈 때 만약에 남편을 돈도 많고 인격도 있는 사람하고 만났으면 여러분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아주 열악한 데 시집을 가서 거기 찌들어서 아주 불행한 인생을 살 수도 있어요. 똑같은 사람인데 어떤 환경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진로가 달라져버려. 이럴 때는 뭐가 큰 영향을 끼칩니까? 연이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거요. 그래서 이 인과 연이 다 중요한데, 여러분은 주로 연 타령만 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주로 뭐 타령을 합니까? 인 타령을 해요. “너만 잘해 봐요.” 자꾸 이런 식으로 말해요.

 

너만 잘하면 세상이 어떻든 무슨 관계냐?” 남에게는 자꾸 인을 강조하고, 자기는 연을 강요합니다. 이 무슨 얘기냐? 책임전가다. 이런 얘기요. 책임전가. 사실은 자신에게는 인을 중요시해야 됩니다. 이게 수행이에요. 다른 사람에게는 연을 중요시해야 돼. 이게 정토사회를 만드는 거요. “아이고, 저 사람도 환경만 좋았으면 그렇게 될 수 있겠냐? 그런 좋은 환경을 못 만들어 준 나도 책임이 있지.” 이렇게 마음을 내는데 보살의 마음이다.

 

그러니까 이 남편의 죽음은 남편 자신의 인에 자기 인연이 있습니다. 단명할 인연이 있다 이 말이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이 단명할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게 꼭 내 책임이라고 말 할 수가 없어요. 그 인연을 따라서 살다 가는 거요. 그런데 이런 인연을 미리 알았다면 어떻게 되겠냐? 미리 알았다면 어느 정도 변경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인연을 미리 알지 못해서 변경이 가능한. 즉 주위 조건을 변화시켜줌으로 해서 본인이 그걸 알았다면 본인이 자기 업을 바꿈으로 해서 변화를 시킬 수 있고.

 

또 주위 사람이 알았다면 주위의 조건을 변화시킴으로 해서 이것을 어느 정도 연장이 가능하다. 이런 얘기요. 그런 거에 대한 무지. 법에 대한 무지가 나에게 있었다하는 거는 인정을 할 수 있겠죠. 그것은 수행차원에서요. 내가 법에 대한 무지가 있었다. 그러니 내가 법을 바르게 깨쳐서 다시는 이런 어리석음으로 해서 오는 불행은 막아야 되겠다. 이게 이 남편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발심하는 거요. 남편이 사건에 대한 후회가 아니고 후회라는 건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자꾸 하는 거요.

 

그러니까 앞으로 나아가야 되는 거요. 그러니 앞으로 자식이나 다른 내 인생에 대해서도 이런 어리석음이 없게 하기 위해서 법에 대한 좀 더 밝음이 있어야 되겠다. 나를 좀 더 자세히 알아가고. 또 나의 행위들이 어떻게 자녀들이나 이웃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를 내가 알아서 내가 이 업을 바꿔야 되겠다. 이렇게 남편의 죽음을 통해서 내가 발심을 한다. 이거야. 석가모니부처님이 전생의 이름이 뭐요? 선애동자요. 선애동자는 원래 수행자가 아니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심으로 해서 그 슬픔도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깨친 바가 있었어요.

 

그 많은 재물을 아버지가 하나도 못 가져가고, 그 높은 지위를 아버지가 하나도 못 가져가는 것을 보면서 저 아무 가져갈 수도 없는 재물과 지위를 위해서 왜 아버지 위로 7대 할아버지부터 그렇게 거기에 집착을 했느냐? 이거야. 그걸 보면서 오히려 크게 깨달은 거요. 그래서 그 재물을 가난한 이에게 나눠줘 버리고 그 높은 지위를 왕에게 반납을 해버린 거요. 그리고 자기는 숲속으로 들어가서 정진을 한거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자기 어리석음을 깨우친 거요. 이게 발심이에요.

 

그러니까 질문하신 분도 이렇게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해서 뭔가를 깨우친다면. , 재물이라는 것도 아무 집착할 바가 못 되고, 지위니 명예니 두 부부가 살면서 네가 옳으니 그르니 싸우는데, 지금 이 지경에 와서 누가 옳으면 뭐하냐? 이러면 아까운, 얼마를 같이 사는 그 아까운 시간을 이런 식으로 쓰잘데기 없이 허비한 그런 어리석음을 깨우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후회하는 것은 아무런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뭔가를 깨우쳐서 앞으로는 이런 어리석음을 살지 않겠다. 하는 큰마음을 내게 되면 이건 불행이 뭐로 바뀌는 거다? 법으로 바뀐 게 돼.

 

그러니까 수행이라는 것은 불행을 복으로 바꾸는 게 수행이오. 이것이 재앙이 아니라 나에게 떨어진 큰 복으로 바꾸는 거. 그 사람 잘 죽었다 이게 아니라. 그의 죽음이 안타깝지만 그의 죽음을 통해서 내가 깨우칠 수 없는, 큰 인생을 깨우치는 계기가 됩니다. 이렇게 전환하는 것이 지금 제일 중요한 문제요. 딴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러면 이런 단명한 사람을 굳이 지금은 법을 얘기 하는 게 아니에요. 옛날 얘끼 하는거요. 옛날식으로 표현하면. 이 표현 자체를 쉽게 옛날식으로 표현하면 단명할 인연이 있는 사람하고, 혼자 살 인연이 여자하고 만나게 됩니다.

 

서로 눈에 딱 좋아 보이는 거요. 그런데 남자가 마음이 좀 약해. 겉으로는 큰 소리 빵빵 치고 허우대는 멀쩡한데 마음은 아주 여리고, 여자는 사람도 적고 불쌍해 보이는 거 같은데 아주 속 고집이 엄청나게 강해. 이런 두 사람이 싸우면 남자가 아내한테 큰 소리 치고, 때로는 폭력까지 행사하고 이러죠. 이러면 여자가 불쌍하고 남자가 나쁜 놈이 되죠. 그래서 이런 갈등을 통해서 누가 죽어요? 남자가 죽어요. 왜 그럴까? 남자는 나무토막 같고. 여자는 쇠 같아. 그러면 나무토막을 가지고 쇠를 때리면 나무가 부러집니까? 쇠가 부러집니까? 나무가 부러져.

 

밖에서 보면 나무가 나쁜 놈인데 부러지는 건 나무가 부러지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인연을 알면 여자가 숙여줘야 되요. 나무로 때리면 피해줘야 된다. 안 맞으려고 피해주는 게 아니라. 남편 안 부러지게 하려고. 그럴 때 여러분이 볼 때는 왜 남자가 참회를 해야지 여자가 참회 하냐? 이거는 심성을 모를 때는 그래요. 겉으로만 보고. 이런 이치들을 알고 이제 정진을 했으면 우리가 헤어지는 불행, 사별하는 불행 이런 것들을 좀 막을 수가 있죠. 갈등의 불행도 막을 수가 있고. 뭐든지 다 가능합니다.

 

그러나 갈등은 정진하면 100% 막아집니다. 그런데 죽고 사는 거 이거는 오래 사는 게 옳다. 오래 사는 게 좋다. 이 생각 버리셔야 돼. 예수가 십자가에 못 안 박히고 오래오래 편안하게 살았으면 예수님이 됐어요? 안됐어요? 안 돼지 이차돈 선사가 오래오래 왕궁에서 재상까지 올라갔으면 이차돈이 될 수 없었죠. 오래 사는 게 꼭 좋은 거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아무 일 없는 게 꼭 좋은 거 아니에요. 외부적인 조건을 이 주체입장에서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한거지. 조건이 중요한거 아니에요.

 

그런데서 여러분이 법을 알고 이런 관계를 맺었으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가 있고. 먼저 죽고 나중 죽고. 이런 걸 갖고 너무 심각하게 우울해 할 필요는 없다. 지금 혼자 남았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게 수행이에요. 상대가 뭐라고 그런다고 내가 그를 미워하면 내 손해요. 그것처럼 지금 남편이 죽었다고 내가 운다고 남편이 삽니까? 아니죠. 결국은 아무 일도 안하고 늘 그 생각만 하고 우울하면 자기 인생만 망쳐지죠. 그럼 남편이 보고 있다면 내 인생을 망쳐지는 것을 남편이 좋아하겠어요? 좋아 안하겠지. 그걸 보는 사람이 얼마나 안타깝겠어. 어리석은 짓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지금 정신을 차리는 게 필요합니다. 지금 정신을 차리는 게 필요합니다. 바로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돌아가신 남편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일이오. 그런데서 용기를 가지시고 법문 듣고 정진하시고 행복할 때 법문 듣는 거하고 이런 어려움을 당했을 때 법을 공부하는 거하고 天壤之差천양지차입니다. 이렇게 몇 번의 좌절을 겪은 사람이 법문을 들으면 법문이 훨씬 깊이 있게 다가옵니다. 세상이 지 뜻대로 되는 그런 범위 안에서는 법문이 제대로 안 들어옵니다. 흘러지나가지. 그러니 좋은 법을 들을 좋은 기회가 됐다.

 

그다음에 두 번째 제를 지는 걸 말하는데. 이 제를 지내는 데는 하나는 문화적 요소가 있고 하나는 법적인 요소가 있어요. 문화적 요소로 말하면 그냥 하나의 문화에요. 유교식으로 뭐하고? 제사를 지내는 게 있죠. 불교식으로는 뭐가 있다? 천도재를 지내는 게 있고, 기독교식은 기독교식으로 다 종교마다 민족마다 다 문화가 조금씩 달라요. 죽은 사람에 대한 산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품을 감내하는가? 그 감내를 표현하는 방식의 문화는 수백 수천기지요. 그 가운데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재를 지내는 것도 하나의 표현방식이오.

 

그 문화는 그렇게 하면 정말 그렇게 됩니까? 이렇게 물으면 안 돼. 문화라는 것은 마음의 표현이에요. 찬송가를 불러준다고 천국에 가느냐? 염불해준다고 극락에 가느냐? 이렇게 묻는 거는 문화를 진리의 측면에서 자꾸 보는 거요. 이 문화에요. 문화. 슬픔을 위로하는 표현방식이라는 거요. 그래서 엉엉 울어서 슬픔을 달래는 표현방식도 있고. 어떤 나라에 가면 장례식 때 막~ 춤추고 노래해서 그 슬픔을 달래는 방식도 있어. 우린 주로 우는 문화만 있다 보니까 그러는데.

 

이 지구상에 여러 군데 가보면 전혀 다른 문화들 가지고 있어요. 불교적으로는 염불을 하는 문화에요. 기독교는 찬송을 하는 문화에요. 문화가 다른 거요. 그런데 각각 종교인들이나 사람들은 문화를 자꾸 절대화하는 거요. 문화는 상대적인 거요. 문화를 절대화하면 어떠냐? 문화와 문화 사이에 진위논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문화를 파괴하는 거요. 문화는 진위 논쟁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문화는 그냥 하나의 표현이에요. 여러분 우리 육체를 단련하는 운동에 여러 종류가 있죠. 어떤 운동이 좋다. 이렇게 진위 논쟁을 하게 되면 결국은 하나의 운동으로 통일해야 되는 거요. 운동이 다른 거요.

 

다를 때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데로 하면 되는 거요. 그것처럼 문화라는 것은 다양한 거요. 표현방식이 다양한거요. 사람들은 그 각각의 표현방식을 따라서 표현하는 거요. 그래서 이것은 진위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우리들의 아픔을 달래는 하나의 표현이다. 불교에서 지내는 49재에 대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라는 것. 장례 문화다. 이 말이오. 쉽게 얘기하면. 두 번째 그럼 왜 이런 문화가 형성됐느냐? 하는 걸 굳이 원인을 따져서 말한다면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쳤다. 남의 뺨을 때렸다. 그래 감옥에 갔어.

 

그랬을 때 제일 중요한건 뭐요? 첫째 본인이 반성을 해야죠. 그죠? 잘못했다고. 두 번째는 반성만 하면 됩니까? 배상을 해야 됩니까? 배상을 해야지. 본인이 배상을 못할 때는 누가 해야 됩니까? 부모나 자식이나 제 3자가 배상을 해도 되죠? 이게 우리 인간 삶이오. 그래서 제일 첫 번째가 본인이 아닌 옆에 있는 사람, 가족이 도와줄 수 있는 법이 뭐요? 첫째? 배상을 해주는 거요. 그 배상을 해주는 게 뭐요? 보시오.

 

우리가 살다보면 내 먹기 위해서 남 먹는 거 뺏을 수도 있고, 내 살기 위해서 남 죽일 수도 있고, 내 이익 보기 위해서 남 손해 끼칠 수도 있고. 그게 우리 중생 살이죠. 그러기 때문에 첫째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고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고 배고픈 자를 먹이고 병든 이를 치료하고. 이렇게 베풀어야 되는 거요. 이 베푸는걸 뭐란다? 재라. 이렇게 불러. 그러니까 귀신한테 뭘 올린다 하는 제사 제자가 아니고 불교에서 말하는 49재 천도재할 때 재자는 베푼다. (베풀 재)자야. 베푼다. 이런 뜻이에요.

 

널리 베풀어서 바로 빚을 탕감시키는 거요. 배상함으로 해서 그 죄를 탕감하는 방법이오. 그래서 베푸는 거요. 베푸는데 재에요. 옛날에는 다 먹고 사는 게 힘들었잖아. 그래서 주로 제일 중요한 게 음식이오. 음식을 만들어서 베풀었어요. 그래서 늘 조금이라도 늘 골고루 주지 않습니까? 제사 지내고 뭐라고 그래요? 음복을 해야 영험이 있다. 이런 말 하죠. 먹어줘야 돼. 베푸는 게 재에요. 어떤 의식이 재가 아니고. 불교에서는 어떤 의식보다는 뭐가 중요한다? 법의 측면, 담마에서는 베푸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들어오니까 의식이 있었어요.

 

유교에서 의식이 있죠. 물건 차려놓고 지내는. 그래서 그런 것들이 불교하고 믹서가 된 거요. 그래서 제사 음식 차리는 거는 유교적인 전통적인 걸 받고, 거기에 유교식으로 안하는 이유는 베푸는 거요. 널리 베푸는 거. 우란분재 핵심도 바로 배고픈 자. 제일 배고픈 자가 누구요? 스님들이오. 거지 중에도 상거지. 일반저기는 세끼먹지만 스님 거지는 한 끼 밖에 안 먹죠. 스님 거지 중에도 제일 배고플 때가 언제요? 안거가 끝날 때. 그래서 그분들에게 음식을 공양을 올리는 거요. 베풀었다. 이래요. 이렇게 첫째 베푸는 게 재에요. 베푸셔야 돼.

 

목련경에 의하면 유산의 1/3을 베풀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유산을 3등분을 해서 1등분은 아버지 몫으로 베풀고, 한 등분은 아들이 가지고 한 등분은 어머니를 드렸어. 그런데 그 어머니가 아버지 몫으로 베풀라고 준 것을 안 베풀고 자기가 다 먹어버렸어. 그래서 지옥에 떨어진 거요. 그래서 자식둔 자로서 살아남은 자들로서 죽은 사람을 위해서 대신 베푸는 거요. 그래서 저희들은 천도재에 들어온 돈은 거의 다 인도나 북한이나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써요.

 

여기서는 한 끼 식사하려면 5천 원들지만. 거기는 한 끼 먹는데 150원만 하면 된단 말이오. 그러면 똑같은 천만 원이라도 어때요? 그 효용 가치가 월등하게 열배로 더 높은 거요. 그러니까 여기 천만 원이면 거기가면 1억이 되고, 여기 100만원이면 거기가면 천만원이 되요. 값어치로 따지면. 첫째 베풀어야 된다. 두 번째 아무리 이렇게 베풀어도 본인이 반성을 안 하면 어때요? 안 돼요. 그래서 첫째 베풀고, 두 번째는 가족이 가서 대신 또 사과해야 되죠. 그래요? 안 그래요? 세상이치가. 대신 또 잘못했다고 사과해줘야 되요. 그게 참회요. 가서 빌어야 돼.

 

지장보살한테 빌어서 도와달라고 빌고 자기가 엎드려서 절하면서 대신 사과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본인이 깨우치는 거요. 본인이 깨우치는 게 뭐냐 하면 염불하는 거요. 염불이라는 게 뭐냐? 법문이에요. 법문을 통해서 이 법의 이치를 깨우치는 거요. 아무리 밖에서 해줘도 본인이 내가 뭘 잘못됐나? 이러면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되죠. 떼어내 놔도 또 그 짓한단 말이오. 그래서 본인을 깨우쳐서 죄를 탕감시킨다.

 

그래서 천도재를 지낼 때는 첫째는 베풀고, 두 번째는 기도를 하고, 참회 절을 하고, 염불을 하고. 세 번째는 거기에 요령을 흔들고 뭐하고 하는 그게 전부 다 법문이에요. 법에 대한,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고 하는 모든 법문에 대한 것. 그걸 의식화 해 놓은 거요. 이런 세 가지를 한다. 그러니까 왜 불교에서는 그런 천도재를 지내는 문화가 생겼느냐? 이런 원리에 견주어서 그런 문화가 생겼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냥 하나의 문화에요. 장례 문화에요.

 

사람이 죽으면 우린 땅에 묻죠. 장례 문화에요. 인도가면 어떻게 합니까? 불에 태우죠. 문화에요. 티벳 가면 조장이라 해서 잘라가지고 새가 먹고 가도록 해. 그러면 어이고 새가 먹도록 왜 그걸 갖다 버리느냐?” 그 사람들은 생각이 틀려요. 좋은 세상은 저 위에 있다고 생각해요. 하늘나라에 있다고. 새가 먹고 날라 올라면 하늘에 좀 더 가까워진다. 그래서 조장이 생긴 거요. 그래서 실제로 그런지 안 그러지는 별게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장례문화가 생겼다.

 

그런 것처럼 불교에서는 이런 이치에 의해서 이런 문화가 생겨났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 불자들은 그런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문화적 전통에 따라 천도재를 지내는 거요. 그러나 이런 문화라는 건 잘못하면 허례허식이 되기 쉬워요. 그래서 가능하면 원뜻을 살리는 게 좋다. 옛날에는 배고픈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음식을 많이 차렸는데. 지금은 배고픈 사람이 없어서 음식 많이 차리면 오히려 버립니까? 다 먹습니까? 버리리가 쉽지? 그러면 그런 음식 차리는 건 전혀 이치에 맞지 않잖아.

 

그러니까 음식은 간소하게 차리고 오히려 그 돈은 어떻게 한다?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바로 이 이치에 맞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재를 지낼 때 아주 간소하게 차립니다. 그러고 보시금은 인도나 아프카니스탄이나 민다나오나 이런데 다 보내는 거요. 그런데 또 차리는 문제가 복잡합니다. 보통은 돈을 많이 내면 잘 차려주고, 적게 내면 적게 차리고 이러죠? 거기에 산 사람도 빈부격차가 있듯이 죽은 사람도 빈부격차가 있다. 그러면 법에 안 맞잖아요. 그런데 안 차린다.

 

딱 보시가 얼마 들어 왔는지 베풀어 버리고 음식 차리지 말고 하자. 음식 차려봐야 귀신이 먹어요? 안 먹어요? 안 먹잖아. 원래 귀신 먹으라고 차린 건 아니에요. 사람 마음이 그래서 차리지. 진짜 먹고 가버리면 차릴까? 안 차릴까? 그러니까 사람들 줄려고 차리는 거요. 사람들 주기위해서 음식을 만드는데 그냥 의식상 잠깐 얹어 놓는 거요. 그런데 안 차리면 우리 문화습관상 섭섭하단 말이오. 돈을 천만 원이나 냈는데 와서 보니 향만 딱 꽂고 아무것도 안 차렸어요. 그럼 섭섭하단 말이오. 섭섭하니까 차리자. 차리는 건 좋은데 이게 또 많이 차리고 적게 차리고 하면 문제잖아.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이걸 나눠요. 문화 전통도 살리고 가능하면 불교의 원리도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재의 핵심은 베푸는 거니까. 이 영가를 위해서 자기가 베푸는 걸 먼저 정해. 100만원을 베풀든 천만 원을 베풀든 난 베풀겠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오신 어떤 분은 아버지 유산을 딱 정리해서 어머니하고 정리해서 1억을 베풀겠다. ? 안 지낸다는 거요. 그냥 베풀겠다. **다 이 말이오. 두 번째 문화적인 요소에서는 이건 법적인 요소고. 문화적인 요소에서는 섭섭하잖아. 그죠?

 

그러니까 음식을 차려. 안 차리면 섭섭해. 그럼 음식을 차리는데 얼마나 차릴 거냐?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각자 알아서 차려라. 시비를 없게 하기위해서. 절에서 음식을 안차려주고 어떻게 한다? 집에서 해 와서 차려라. 자기 집에서 해 와서. 그럼 자기 집에서 해 와서 차리는 거야 많이 가지고 와서 차리든 적게 차리든 시비가 되나? 안 되나? 안되지. 그러니까 제비가 얼마냐? 이런 말은 없다. 이 말이오. 보시를 얼마 할 거냐? 이게 제요. 보시를 얼마나 하느냐? 자기가 100만원 할거냐? 천 만원을 하든, 1억을 하든 하는 거는 하는 거로 딱 끝내고 음식은 자기 집에서 알아서 차려라.

 

그러니까 밥은 들고 오기 어렵고, 국은 끓이기 어려우니 와가지고 부엌 빌려 줄테니까 해라 이거야. 그럼 많이 차리고 싶으면 많이 차리고 적게 차리고 싶으면 적게 차리고. 현재는 우린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다음에 스님이 재를 지내주느냐? 이게 문제에요. 여기는 기도를 대신해줍니까? 자기기도 자기가 하라 그래요? 자기기도 자기가 하라 그래요. 그럼 유교식으로 한 번 보세요. 유교식으로 할 때 제사를 누가 와서 대신 지내줍니까? 자기 자식이 제주가 돼서 지냅니까?

 

그러면 법적으로 보면 베푸는 게 재기 때문에 이미 베풀면 이미 재가 끝난 거요. 그럼 여기 와서 뭔가를 지내는 것은 이미 이건 문화적 요소요. 그럼 스님은 사제계급이오? 수행자요? 수행자요. 원래 사제계급이 아니오. 사제계급은 제사 지내주고 복 빌어주는 건 누가 하는 거다? 바라문이 하는 거요. 그런데 지금 스님들 어느덧 바라문이 되어있어. 현실적으로. 그래서 법을 설하는 거요. 법을 설하는 거는 하지마는, 요기 제사를 지내는 거는 옛날에는 가족들이 우~ 모여 지냈는데 요즘은 아들딸이 한둘밖에 없으니까 가족들이 많으면 좋지만 모지라면 어떻게 다? 도반들이 다 가족이 돼서 지내는 거요. 정토회는 그렇게 하고 있어.

 

옛날에는 글자를 모르니까 염불을 누구밖에 할 줄 몰랐다? 스님 밖에 할 줄 몰랐어. 요새는 책보고 읽으면 되니 누구나 다 할 수가 있어. 옛날에는 목탁도 스님 빼고 못치게 했는데 요즘은 치면 돼. 옛날에는 못했지만. 옛날에는 어릴 때부터 그것만 연습한 사람만 할 수 있었죠. 요즘은 문자가 있고 프로그램이 있어 누구든지 그대로 하면 돼. 그렇게 해서 지내고. 이건 문화에요. 이런 문화는 지켜나가는 게 좋죠. 지켜나가는 게 좋다.

 

그러나 문화를 절대화 하면 문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남의 종교를 없애버리고 제사 지내는 거 못지내 게 하고 이런 게 다 뭐요? 내 문화는 옳고 네 문화는 틀렸다는 데서 생긴 거요. 문화는 옳고 그른 게 없어. 서로 다를 뿐이오. 내 문화는 내가 잘 보존하고 남의 문화는 존중해 줘야 돼. 그런데서 담마적 요소. 법적인 요소와 진리적 요소는 베푸는데 있고 나머지는 문화적 요소에요. 그에 맞춰서 행하시면 되겠다